202화. 반어의 이상
맹 노부인은 아혜를 보고 아주 기뻐하며 연거푸 말했다.
“돌아왔으면 됐다. 돌아왔으면 됐어.”
정미가 사라지면 맹 노부인의 두통을 완화시켜 줄 사람이 없게 되니, 맹 노부인은 정미가 살아있길 바랐다.
정미는 노부인을 대하는 아혜의 모습이 자신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혜는 웃으며 맹 노부인의 팔짱을 끼고 말했다.
“조모님, 조모님이 떠올랐을 때 등에 날개라도 달아서 돌아오고 싶었다구요.”
아혜의 진심 어린 표정은 평소 정미의 냉담하고 소원한 표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맹 노부인은 크게 기뻐하며 아복에게 뭔가를 가져오라 했다. 아복은 진주에 비취옥을 얹은 최고급 비녀를 가져왔고, 노부인은 그 비녀를 직접 아혜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또, 심복 파자에게 열쇠를 가지고 가서 혈연(*血燕: 붉은색을 띠는 제비집으로 보통의 제비집보다 귀하며 비쌈) 반 근을 가져오라고도 했다.
“미야, 고생했으니 혈연을 먹고 몸보신 좀 하려무나.”
그러자 아혜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조모님.”
이어서 회인백 부인 유 씨와 셋째 나리의 아내 풍 씨가 나타났으나, 한 씨만 보이지 않았다.
염송당에서 나온 후, 정철은 아혜를 비서거로 데려다주던 중 혹시나 여동생이 한 씨에게 서운함을 느낄까 봐 말했다.
“어머니께서 며칠 동안 계속 네가 떨어진 절벽 아래로 가서 널 찾고 계셨었거든. 그래서 지금 돌아오시는 중일 거야.”
“응, 알겠어.”
아혜는 간결하게 대답했지만, 정철의 배웅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정미는 처음엔 겉과 속이 다른 아혜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내 깨달았다.
‘그동안 아혜는 온종일 나와 함께하며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건 알지 못하겠지. 예를 들어, 백부의 길 같은 건 말이야.’
* * *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어!”
청가는 문가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정철과 정미가 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려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에 화미와 환안이 달려 나왔고 공처럼 뚱뚱해진 고양이도 따라서 굴러 나왔다.
세 사람은 아혜를 둘러싸고 눈물을 닦았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엉엉엉…….”
정철은 반장 정도 떨어져서 조용히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미미가 내게 차갑게 굴더라도, 그저 잘 지내기만 한다면 무엇보다도 좋은 일이지.’
“야옹―”
반어가 항의하듯 울며 세 여종을 비집고 아혜의 품속에 뛰어들었다.
아혜가 깜짝 놀라 작게 소리치자 화미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모르셨지요? 아가씨께서 실종된 이후로 반어가 밥을 한 끼도 먹지 않았다고요. 살 빠진 것 좀 보세요.”
하지만 아혜의 미소는 여전히 굳은 채였다. 그녀는 애써 혐오감을 감추며 반어를 쳐다보았다.
“정말 살이 빠졌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어가 갑자기 튀어 오르더니, 아혜의 얼굴에 앞발을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환안과 다른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아혜가 빠르게 고개를 옆으로 젖혀 얼굴은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찍’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혜의 어깨 쪽 옷이 크게 찢어져 새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반어는 노란 털을 바짝 세우며 눈에서는 한기를 뿜었고, 마치 작은 호랑이처럼 또다시 튀어 올라 아혜의 얼굴을 공격했다.
아혜는 얼굴을 가리고 뒤로 숨었다. 세 여종은 앞다퉈나가 반어를 잡으려 했다.
이때 정철이 단숨에 다가와 반어를 품에 끌어안고 다정하게 물었다.
“미미, 괜찮아?”
아혜가 손을 놓고 두려운 듯 말했다.
“오라버니, 어서 그 애를 데려가. 다신 보고 싶지 않아.”
정철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여 반어를 쳐다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오라버니가 반어를 데리고 갈게. 며칠 동안 네가 보이지 않아서 화가 났나 봐. 온순해지면 다시 데려다줄게.”
“그럴 필요 없어!”
아혜의 목소리는 순간 높아졌으나 다시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반어는 오라버니를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앞으로 오라버니가 키워. 나는 이제 필요 없어.”
정철이 반어를 쳐다봤다.
‘미미는 나도 더 이상 보기 싫고, 내가 선물한 반어마저도 원치 않는구나. 이건 내가 늘 바라던 결과였다. 두 남매가 각자의 자리에서 잘 지내는 것. 근데 왜 마음이 이리도 아픈 걸까?’
정철이 침묵하는 사이, 반어는 불쾌한 듯 계속 몸을 비비 꼬며 발버둥 쳤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주인을 찾아서 기뻐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환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우선 반어를 데려가시지요. 오늘 정말 좀 이상한 것 같아요.”
화미가 급히 맞장구쳤다.
“맞아요, 맞아요. 아가씨의 옷까지 찢어졌잖아요. 소인이 목욕할 수 있도록 시중을 들겠습니다, 아가씨. 여긴 바람이 많이 불어서 계속 서 계시면 감기 걸려요.”
정철이 반어를 꼭 껴안고 아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라버니는 우선 가볼게. 미미, 무슨 일 있으면 정일헌으로 사람을 보내.”
“응.”
아혜는 환안과 화미의 부축을 받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정미는 그 자리에서 잠시 망설였다. 정철, 그리고 자기 대신 화풀이를 해준 반어를 무척 따라가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아쉬워하며 정철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아혜를 따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목욕과 환복을 마친 뒤, 아혜는 기분이 상쾌해져 시종들을 내보냈고 그제야 마음 놓고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고양이한테 다칠 뻔했네. 정말 방심했어! 정철의 의심을 피해야 하는 게 아쉽군. 아니면 몰래 죽여버려야 안심이 될 텐데.”
정미는 깜짝 놀랐다. 만약 아혜가 반어에게 손을 댄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 돼, 이렇게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정미는 ‘서금과(書禁科)’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그저 필사적으로, 아혜가 했던 말들과 며칠 동안 아혜가 백발 사내와 대화를 나눌 때 무의식적으로 언급한 말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 얼마 없는 지식들을 긁어모은 뒤, 자신조차도 미심쩍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가망이 없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밤이 되면 이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아혜는 방 안을 서성이며 정미의 모든 것을 익히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정미는 그 모습을 보고 더욱 화가 치밀어올랐다.
잠시 후, 환안이 들어와 정동과 다른 사람들이 왔다고 보고했다.
아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람들을 응대했고 겨우 그들을 돌려보냈을 때, 곧바로 한 씨와 마주쳤다.
한 씨는 여종과 파자가 따라잡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고, 아혜를 보자마자 품에 안고 흐느꼈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정말 애간장을 태우고 말이야. 네 외조모님껜 차마 말씀도 못 드렸다.”
정미는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한 씨가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내비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미는 늘 자신이 죽더라도, 어머니는 기껏해야 눈썹만 치켜세우는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한 씨의 이런 모습에 감동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친모녀라고 해도, 함께 지내야 할 시기를 놓치면 그 소원함은 영원히 메울 수 없기 마련인 법이었다.
하지만 아혜에겐 그런 고민이 없었기에 한 씨의 팔을 껴안으며 울다가 웃다가 했다.
“어머니, 다신 못 뵐 줄 알았어요…….”
아혜는 한 씨가 딸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앞으로의 생활에 도움이 되게 할 셈이었다.
한 씨는 잠시 몸이 뻣뻣해졌다. 딸이 이렇게 다정하게 대할 줄 몰랐기에, 순간 마음이 복잡해져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두 모녀는 방으로 들어갔고, 한 씨는 아혜에게 그간의 일을 자세히 물어보고 나서야 말했다.
“이틀 동안 집에서 잘 쉬고, 다 나으면 내가 위국공부와 덕소 장공주부로 데려가 주마. 널 위해 두 집안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아혜는 최대한 사람을 적게 만나고 싶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사실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사람을 만나기도 귀찮을 정도예요. 어머니께서 저 대신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잠시 찾아오지 말라 전해주셨으면 해요.”
한 씨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네 아버지는 황상을 따라 피서를 가셨다. 원래 정동과 정희도 데려가려 했는데, 결국 아무도 가지 않았어.”
“어째서요?”
한 씨는 조금 이상하단 표정을 하고 답했다.
“정동은 몸이 안 좋다며 가는 길에 버티지 못할까 봐 가지 않겠다 했고, 정희는 내년에 시험을 칠 생각이라 집에 남아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더구나.”
“아…….”
이에 아혜는 대수롭지 않아 했고, 한 씨도 더 이상 아무 말 말하지 않았다.
한 씨는 우연히 정희가 사동에게 ‘누이의 생사가 묘연한데, 동생으로서 어찌 놀러 나갈 수 있겠느냐’는 말을 들은 걸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딸과 사이가 좋지 않던 쌍둥이 남매도 도리를 아는데, 나리는 그렇게 가버리시다니. 서운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때 아혜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어머니, 저 피곤한데…….”
그제야 한 씨는 급히 누워 쉬라고 말하고는 여종을 데리고 돌아갔다.
* * *
밤이 되자, 정미는 정일헌으로 날아갔다.
때는 이미 6월 중순이라 점점 더워질 시기였다. 밤이 되어도 여전히 더운 바람이 불었고, 정일헌의 창문들은 활짝 열려있었다. 정미는 곧바로 창문으로 날아 들어갔다.
뜻밖에도 정철은 서재에 있지 않았다.
정미는 응접실을 지나 동차간으로 향하던 중, 입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자님, 말씀하신 멸치를 다 완성했습니다.”
“들어오거라.”
방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매는 한 손에 쟁반을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죽청색의 주렴을 걷어 올렸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정미가 뒤따라 들어가자, 정철이 침상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대앉아있는 게 보였다. 검고 긴 머리카락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채 새하얀 옷 위에 풀어 헤쳐져 있었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는 반어를 쓰다듬고 있었다.
반어는 편안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다가 기척이 들리자 갑자기 눈빛이 똘망해지며 고개를 들었다. 소매가 보이자, 다시 정철의 무릎에 고개를 얹고 초조한 듯 꼬리를 흔들었다.
정철이 다정하게 반어의 등을 토닥였다.
“어서 일어나거라, 네 간식이 왔다.”
소매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탁자에 쟁반을 올려놓았다.
“공자님, 소인이 먹이겠습니다.”
“괜찮다. 내가 하면 돼.”
“방금 목욕하셨는데, 몸에 지저분한 게 묻잖아요. 소인이 먹이겠습니다. 예전에 고양이를 키워봐서 습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철은 피곤한 듯 손을 들어 미간을 주물렀다.
“그럼 알겠다. 반어가 오늘 좀 예민하니, 조심하거라.”
소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궜다. 차마 정철의 눈을 마주 보지도 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매는 반어를 건네받은 뒤, 손수건으로 멸치를 받쳐 들고는 꼼꼼하고 다정하게 먹여주었다. 반어는 처음엔 잔뜩 경계하다가 점점 긴장을 풀고 즐겁게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미가 눈을 부라렸다.
‘왜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 건데? 왜 소매가 얼굴을 붉히고 다정하게 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지? 다 오라버니 때문이야.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대하다니.’
정미는 정철을 흘겨보다가 잠시 멍해졌다.
아주 잠깐 사이에 정철은 잠들어있었다.
그는 잠든 와중에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기에, 정미는 왠지 마음이 아파 왔다.
이때 반어에게 간식을 다 먹인 소매도 그 모습을 보았고, 반어를 내려놓고 살금살금 다가와 정철과 반쯤 떨어진 곳에서 멈춰서더니, 그를 빤히 쳐다봤다.
정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여종이 오라버니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정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정철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이성에 눈을 떴으므로, 소매의 눈빛에 깊은 정과 기대가 묻어나는 것 또한 정미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정미는 불안해졌다.
‘소매는 오라버니의 통방이잖아. 설마, 설마 내 앞에서 아기를 만드는 건 아니겠지?’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미는 차마 더 깊게 상상하지 못하고 소매를 빤히 노려봤다.
소매의 손이 조금씩 정철의 얼굴로 다가갔다.
정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쳤다.
‘멈춰! 그저 오라버니를 만지는 거라 해도, 그건 나 말고 아무도 안 돼!’
그리고 이때, 정철이 눈을 번쩍 떴다.
소매는 순간 손을 떨었으나 곧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공자님, 잠이 드셨길래 이불을 덮어드리려 했습니다.”
그러자 정철은 얇은 이불을 아무렇게나 잡아당겨 몸을 덮었다. 그의 맑은 눈동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괜찮다. 소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이런 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앞으로 네가 마음대로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소매는 섭섭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물러나 보거라. 반어를 잘 두고.”
소매는 속눈썹을 낮게 드리우고 반어를 안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