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냉언(冷言)
정미는 아혜와 함께 시냇물을 따라 걸었다. 대략 몇 리 정도 걸었을 때, 마침내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도사 차림을 한 소년이었고, 등에는 땔감 한 짐을 인 채 쪼그려 앉아 양손으로 시냇물을 떠서 마시고 있었다.
아혜는 기뻐하며 널찍한 도포를 들고 달려갔다.
어린 도사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잠시 멍해졌다.
아혜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작은 도장(*道长: 도사를 부르는 존칭)님, 실수로 길을 잃었는데 여기가 어디인가요?”
어린 도사는 경계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침 해가 뜨기 시작할 때였고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무안한 듯 웃었다.
“미안합니다. 아가씨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산의 요괴인 줄 알았습니다.”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이렇게 밝은 때 요괴가 어찌 감히 나타나겠습니까.”
어린 도사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지요. 여긴 현청관의 경계입니다. 앞으로 몇 리만 더 가면 현청관이지요. 아, 어디로 가려고 하시는진 모르겠지만, 길을 모르신다면 우선 저를 따라 관으로 가셔도 됩니다. 제가 보고를 올리는 걸 기다려주시면, 아가씨를 산 아래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현청관의 사람이셨군요. 역시 마음이 선하십니다. 저는 회인백부의 셋째 소저이고, 실족하여 절벽에서 떨어졌다가 사흘 만에 여기까지 걸어왔는데 길을 잃어버렸네요…….”
“아가씨가 바로 그 절벽에서 떨어졌다던 아가씨였군요!”
어린 도사는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혜는 웃음을 거두고 어리둥절한 듯 물었다.
“작은 도장께서 저를 아시는 겁니까?”
어린 도사는 감격한 표정이었다.
“알지 못하지요. 하지만 지금 현청관의 사형(師兄)들 중 아가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사흘 전 고 선생이 제자를 데리고 현청관에 오셨는데, 어떤 아가씨가 이 근처에서 실종되었다고 진인께 도움을 구하셨거든요. 며칠 동안 사형제들이 모두 아가씨를 찾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진작에 떠올렸어야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정미는 기뻐했다.
‘고 선생의 제자라면, 분명 둘째 오라버니일 거야!’
정미는 기뻐하며 아혜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혜는 입을 꾹 다문 채 유난히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정미를 사칭하며 살아가야 할 아혜에게 정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정미가 조급해하든 아혜가 피하고 싶어 하든, 두 사람은 기뻐하는 어린 도사를 따라 현청관에 도착했다.
정미는 현청관에 와 본 적 있었다. 그러나 예전엔 집안 어른들을 따라 관에 와 향을 피우고 점을 치러 왔었고, 지금은 귀신이 되어 조심스럽게 팔찌 안에 숨어있었다.
도사는 귀신을 잡는 데 전문이니까, 만약 도법에 조예가 깊은 자를 마주치게 되면 억울한 일을 당할지도 몰랐다.
아혜가 느긋하게 향명(*香茗: 어린 싹으로 만든 고급 차)을 마시고 있을 때,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발이 걷히고 한 사람이 달려 들어왔다.
“미미―”
이 부름에 정미는 참지 못하고 팔찌에서 빠져나왔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미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의 둘째 오라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두꺼운 수염이 지저분하게 나 있었고, 옷은 구깃구깃했으며, 아혜를 바라보는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있었다.
“오라버니―”
정미는 정철의 품에 달려들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미미―”
정미가 고개를 돌리자, 정철이 아혜를 품에 안은 모습이 보였다.
“다행이다.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이야.”
제3자의 시점으로 보아서인지, 정미는 정철이 온몸을 떨며 한 손으론 아혜의 어깨를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론 허리를 끌어안으려다가 겁이 났는지, 품 안의 사람을 수정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정철의 눈가가 순간 촉촉해지는 것까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똑똑히 볼 수 있다고 해도, 오라버니가 지금 안고 있는 사람은 아혜잖아!’
정미는 계속 유지해오던 침착함이 무너져 아혜의 머리를 잡아당기며 정철의 품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오라버니, 나는 여기 있어. 지금 엉뚱한 사람을 안고 있다고. 어서 놓으란 말이야!’
하지만 정미가 아무리 악을 쓰고 고함을 질러도 아혜의 머리카락은 한 올조차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정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때 정철의 뒤를 따라온 고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청겸, 어서 네 여동생을 놓아주거라. 상태가 어떤지 보아야지.”
정철은 그제야 정미를 놓아주었고 한시도 아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미미,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다친 곳은?”
아혜가 두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그래, 오라버니랑 같이 집으로 가자.”
정철이 고 선생을 바라봤다.
“스승님―”
고 선생이 아혜를 몇 번 훑어보더니 웃었다.
“네 여동생이 복이 많고 운이 좋구나.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게다. 어서 돌아가서 쉬거라. 다만 북명진인께는 가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
“그래야지요. 진인의 일과가 끝나면 제자가 바로 동생과 함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래, 이제 찾았으니 동생과 이야기 나누거라, 스승은 이제 가봐야겠다. 더 지체했다간 네 사모님이 화내실 테니.”
소탈한 성정의 고 선생은 여동생을 찾은 제자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곧바로 아내를 달래러 집으로 돌아갔다.
현청관의 도동(*道童: 도를 닦는 도사의 심부름을 하는 아이)들이 차를 내어온 뒤 방에서 나가자 방 안엔 두 남매만 남게 되었다.
방 안은 아주 조용했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의 김이 정철의 눈가를 뒤덮자 피곤한 기색이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아혜는 정철의 시선을 받으며 한쪽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미, 어딜 다쳤어? 오라버니에게 보여줘.”
아혜가 눈을 들고 정철을 차갑게 훑어봤다.
“다 나았어. 만약 다 낫지 않았다고 해도 어찌 오라버니에게 보여줄 수 있겠어?”
정철은 잠시 당황하더니 따뜻하게 웃었다.
“오라버니의 생각이 짧았네. 돌아가서 여의원을 모셔보자.”
아혜는 정철의 눈도 쳐다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잊은 거야? 나는 부의잖아. 숨만 붙어있으면 그런 상처들은 간단한 일이라고.”
정철은 여동생이 예전과 달라졌음을 분명히 느꼈다. 그건 단지 태도의 변화만은 아니었다.
‘미미가 절벽에 떨어지기 전, 사이가 잠시 틀어지긴 했지만 그때의 미미는 겉으론 나를 멀리하겠다 하면서도 내 눈을 속이진 못했어. 미미가 속으론 나를 의지하고 친근하게 여기는 게 보였다고.
그 점을 알고 있었으니, 내가 미미를 멀리하기로 결정했을 때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따뜻했던 건데. 지금 미미는 나를 완전히 멀리하고 차갑게 대하고 있구나.’
정철은 아파 오는 가슴을 달래며 따뜻하게 미소 지은 채 말했다.
“그럼 다행이다. 미미, 며칠 동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은 거니?”
정철이 아혜가 입은 널찍한 도포를 보며 물었다.
아혜는 무의식적으로 부인하려 했지만, 정철의 시선을 알아채고 순간 겁이 났다.
‘이 사람 앞에선 절대 방심할 수 없겠어.’
아혜는 그 백발 사내를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백발 사내는 강신술로 아혜를 불러들였고, 아혜는 자신의 정체를 들킬 가능성을 철저히 막기 위해 당연히 그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떤 사내가 구해줬어. 나는 깨어난 뒤 혹시나 그가 나쁜 마음을 품은 걸까 두려워서, 몰래 상처를 치료하고 도망쳐 나왔고…… 오라버니, 더 묻지 말아줘. 말하고 싶지 않아.”
아혜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정철의 눈빛이 갑자기 굳었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자 손등에 핏줄이 섰다.
‘설마 미미가 그 사내에게 나쁜 짓을 당한 건―’
이런 생각이 들자 정철은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혹시라도 정미가 더욱 괴로워할까 봐 감히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는 정미의 풀어진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미미가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어. 걱정 마, 앞으론 오라버니가 있으니까.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마.”
아혜는 고개를 돌려 정철의 손길을 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철은 그런 아혜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그 무엇도 묻지 못했다.
잠시 후 북명진인을 만났을 때, 아혜의 태도는 더욱 침착해졌다.
북명진인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아가씨가 내 부수를 마시고 통현(*通玄: 사물의 깊은 이치를 깨닮)하여 부의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던데?”
아혜가 대답했다.
“황당무계하게 들리긴 하시겠지만, 그렇습니다.”
북명진인은 자신이 정미가 저지른 일을 까발렸음에도 이리 침착하리라 예상치 못했다. 그는 순간 흥미가 일어 부의에 관한 문제를 몇 개 내어보았으나, 뜻밖에도 아혜는 정말로 당당하고 차분하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북명진인이 점점 눈을 반짝이더니 탄식했다.
“아쉽게도 빈도는 이미 더 이상 제자를 거두지 않기로 했네.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자네를 제자로 삼았을 터인데.”
아혜는 결코 스승을 원치 않았기에 장난스레 대답했다.
“북명진인의 제자가 되면 평생 시집을 갈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분명 허락하지 않으실걸요.”
북명진인은 잠시 멍해지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다. 수석 제자의 위치가 되어야만 평생 혼인할 수 없지.”
북명진인이 웃으며 정철을 바라봤다.
“어서 네 여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시집을 빨리 가고 싶은가 보구나.”
정철은 웃으며 북명진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 * *
백부로 돌아가는 길, 정철은 아주 자상하고 세심하게 정미를 대해주었다. 하지만 아혜의 태도는 점점 차가워졌고 결국 냉소하며 말했다.
“오라버니, 왜 이러는 거야? 내게 다정하게 대했다가, 멀어지고 싶을 땐 또 멀리 피해버리고. 내가 오라버니가 가지고 노는 강아지 고양이야?”
아혜가 정철을 빤히 쳐다보며 비웃었다.
“내가 왜 산에 들어갔는지 알아?”
그러고는 정철이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가 내게 차가웠다가 다정했다가 하니까 괴로워서 산에 들어가 기분을 풀어보려다가, 절벽에 떨어진 거야. 오라버니, 난 다신 죽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앞으로 내게서 멀리 떨어져 줘.”
정철은 한참을 침묵하며 마음을 가다듬다가 마침내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겠어. 어서 들어가자. 집안 어르신들이 다 널 걱정하고 계셔.”
아혜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 백부로 들어갔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미는 화가 나 기절할 것만 같았고, 오라버니를 보자 가슴이 찌르는 듯 아파 왔다.
하지만 정미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기에 그저 정철의 목에 매달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오라버니, 슬퍼하지 마. 내가 아혜를 쫓아내고 나면, 매일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게. 오라버니가 날 멀리하려고 해도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정철에겐 당연히 정미의 위로가 들리지 않았고, 조용히 아혜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