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음차양착(陰差陽錯)
정미가 투덜거리던 중, 정철이 갑자기 손을 들어 입가를 매만지자 정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정철은 뭔가 떠오른 듯 입가를 어루만지며 가볍게 웃더니 점점 슬픈 얼굴로 변했다.
“미미, 아직 살아있다면, 오라버니는 평생 네 오라버니로 남아 네가 평생 즐거울 수 있도록 지킬게. 만약…… 만약 이미 이 세상에 없다면, 조금만 기다려줘. 오라버니가 져야 할 책임을 다 지고 나면 널 찾으러 갈게. 다음 생엔, 오라버니가 널 아내로 맞아도 될까?”
정미는 멍하니 정철을 쳐다보다가 입을 막고 눈물을 흘렸다.
‘바보 같은 오라버니, 다음 생에 서로를 잊으면 어떡하려고?’
정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튀어 오르는 모닥불도 잠잠해지는 듯했다.
그는 너무 피곤했던지라, 어느새 절벽에 기대 잠에 들었다.
정미는 한참 동안 정철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됐어, 이번 생은 이미 끝났는데 더 생각해봤자지. 어쨌든 지금은 오라버니와 함께 있으니까.’
생각을 정리하자 정미는 마음이 편안해졌고, 다가가서 정철의 팔을 껴안은 채 살아있는 사람인 것처럼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저 혼백일 뿐인 정미는 전혀 잠에 들지 못했고, 정철의 팔을 껴안은 채 계속 뒤척였다. 결국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간 정미는 가녀리고 작은 손으로 뻔뻔스럽게 그의 옷섶 안에 손을 넣어 단단한 복부를 만져보고서야 만족한 듯 잠깐 잠에 들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정미는 정말 혼수상태에 빠진 듯 귓가에 싸늘하고 희미한 읊조림만 계속 들려오는 듯햇다.
“떠도는 넋이여, 어디에 있느냐. 삼혼도 오고 칠백도 올 테니, 넋이여 돌아오라……. ……깨어났소?”
정미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백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백발과 다르게 그의 얼굴은 스무 살이 조금 넘어보였다. 차갑고 준수한 외모였고 입가엔 옅은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정미는 그의 눈빛이 향하는 곳을 쳐다봤고, 이어 충격은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변했다.
대나무로 만든 긴 침상 위엔 더없이 낯익은 사람이 누워있었다.
그것은 백발의 사내가 가져간 자신의 시신이었으나, 그 시신은 지금 눈을 뜨고 있었다!
정미는 입을 틀어막고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젯밤 분명 오라버니의 팔을 껴안고 잠들었는데, 일어나니까 왜 여기 와있는 거지? 내가 여기 있다면 침상 위에서 깨어난 저 사람은 또 누구인 거고?’
정미가 질겁하는 사이, 침상 위의 사람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죠? 여긴 어디고요?”
그녀는 한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힘든 듯 아주 천천히 말했다.
백발의 사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절벽에서 떨어져서 혼을 잃었소. 방금 강신술에 성공해서 깨어난 거고.”
“당신은 도사인가요?”
“그런 셈이지.”
정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중, 화가 나 백발 사내에게 난폭하게 달려들었다.
“뭐가 도사라는 거야. 분명 그저 얼치기겠지. 그런 주제에 왜 강신술을 써서 엉뚱한 고혼을 불러온 거냐고!”
정미는 혼을 불러오는 일에 대해선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혜가 예전에 가르쳐주기를, 부의의 13과목 중 제12과는 ‘부금과(符禁科)’라 하는데, 혼을 진정시키고 몰아내는 것에 관한 것이라 했다. 그 말은, 나중에 정미도 혼을 불러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혜에게 부금과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배워놨을 텐데. 그럼 지금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거니까. 잠깐, 아혜?’
정미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침상 위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우선 쉬고 있으시오.”
백발의 사내는 이 말을 남기고 뒤돌아나갔다.
그가 나간 후, 침상 위의 여인은 멍한 표정을 거두고 미소를 지었다.
정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혜의 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만약 아혜가 웃는다면 분명 저 모습일 거야!’
‘아혜, 너지?’
정미는 자신의 몸에 달려들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아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중얼거렸다.
“드디어 몸이 생겼구나.”
이 말에 정미는 천천히 일어났다.
‘마음속으로 늘 걱정했던 일이 결국 일어났구나. 이제 내가 아무리 울부짖고 소란을 피워도 소용이 없을 거야. 역시 공짜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안 돼. 반드시 되갚아야 하는 거니까!’
아혜는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와 벽 모퉁이로 걸어가더니, 나무 선반 위에 놓인 맑은 물에 자신을 비추어보았다. 가늘고 아름다운 손이 복숭아꽃보다도 아름다운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아주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뜻밖의 기쁨이 있을 줄이야.”
정미는 한기가 뼛속에서부터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죽거나 귀신이 되는 건 무서운 게 아니었구나. 정말 무서운 건 내 몸이 흙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어!’
정미가 아혜를 노려봤다.
‘아혜는 나보다 능력이 좋고 말도 잘하니까,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정가의 셋째 아가씨가 갈수록 철이 들고 재능이 출중해진다거나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하지 않을까?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거지?
그리고 둘째 오라버니. 이제야 오라버니의 마음을 알았는데, 나중에 오라버니가 아혜를 만나게 되면 아혜가 나 대신 오라버니를 차지하게 되는 걸까? 그건 절대 참을 수 없어!’
참을 수 없다곤 했지만, 정미가 팔찌 안에서 참기만 한 지도 벌써 사흘이나 되었다.
그렇다. 정미가 머물고 있는 곳은 예전에 아혜가 몸을 숨기고 있던 팔찌 속이었다. 태자의 동궁에서 이 팔찌를 주운 뒤, 정미는 한 번도 팔찌를 벗은 적이 없었다.
한지의 소성년식 날, 한지에게 밀쳐져 넘어진 뒤 팔찌에 피가 묻었고 그때부터 아혜가 정미의 몸속 어딘가에 들어올 수 있었을 터였다.
3일 전 정미는 몹시 분노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오히려 침착하게 생각해보다가 팔찌를 건드려보았고, 그러자 정말로 그 안에 들어와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다.
심지어 팔찌에 들어오던 그 찰나에 정미는 깨달았다.
‘내가 목소리를 낸다면 아혜와 교류할 수 있을 거야. 예전에 아혜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섣불리 시도할 순 없었다.
‘아혜가 이미 내 몸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쉽게 돌려주려 하지 않을 테지. 괜히 건드렸다가 아혜가 경계하게 되는 것보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며 기회를 기다리는 게 나을 거야.’
그리고 지금 정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을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아혜는 그 이상한 백발 사내와 부술에 관해 교류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이 토론하는 지식은 지금의 정미에겐 아주 심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듣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젊은 친구도 부술에 능할 줄은 몰랐군. 그렇게 가고 싶다면 아침 식사를 한 뒤 떠나게.”
아혜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 덕분에 운 좋게 살아날 수 있었어요. 부상도 이렇게 빨리 나았고요.”
정미는 조용히 이를 갈았다.
‘아혜는 지금 분명 나를 흉내 내고 있어. 역시 내 몸을 차지하고 살아갈 작정이구나.’
백발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젊은 친구의 나이에 부술에 이렇게 조예가 깊은 경우는 이례적이군. 스승이 누구인가?”
아혜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혼자 독학했습니다.”
백발 사내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더욱 진지하게 말했다.
“스승이 없다면, 나를 스승으로 삼는 건 어떤가?”
아혜는 당황했다. 백발 사내가 자신을 제자로 삼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정미는 매섭게 눈을 부라리다가 마음이 쓰려왔다.
백발 사내는 처음엔 아혜에게 냉담하고 소원하게 대했다. 그러나 사흘 동안 점점 아혜를 마음에 들어했다.
‘만약 나였다면, 지금까지도 내게 말을 붙이는 것조차 귀찮아 했을지도 몰라. 내가 침상에서 내려와 걸어 다닐 수 있는 걸 보고 일찍이 내쫓았겠지.’
“부법이 고명한 선배님께서 저를 제자로 받아주신다면,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가족들과 상의해봐야 해서…….”
정미가 팔찌 안에 숨어있을 땐 소리만 들려올 뿐 보이진 않았다. 백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나도 최근 연구하고 있는 부술이 있어 당장 시간이 나는 건 아니었는데…… 그럼 이렇게 하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반년 안에 자네에게 소식을 전하겠네. 그때 대답을 알려주게.”
아혜는 그의 제안에 응했다.
아침 식사를 한 후, 백발 사내가 아혜에게 말했다.
“나를 따라와 보게.”
정미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몰래 팔찌에서 나오자, 백발 사내가 길을 안내하고 아혜가 그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비가 반장 정도밖에 되지 않는 좁은 나무다리가 산골짜기를 잇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고 기석(*奇石: 모양이 기묘하게 생긴 돌)이 겹겹이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마치 선경(仙境)을 걷는 것만 같았다.
다리 끝에 다다랐을 때, 백발 사내가 멈춰서더니 한곳을 가리켰다.
“저기를 통과하면 길을 찾을 수 있어. 그럼 여기서 이제 배웅하지 않겠네.”
아혜의 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방금 걸어온 길이 꽤나 무서웠던 듯했다.
정미는 몰래 쌤통이라고 욕했다가, 만약 떨어졌다면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났을 거라 생각하니 갑자기 허탈했다.
“선배님, 저긴 폭포가 아닙니까? 어떻게 통과하지요?”
백발 사내가 옅게 웃었다.
“따라와 보게.”
그는 폭포 가까이 가 물에 매끈하게 갈려진 바위 몇 군데를 가볍게 몇 번 두드렸고, 이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폭포 중간을 스치자, 폭포가 주렴처럼 중간에서 갈라져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틈이 생겨났다.
“이제 가보게. 자네를 찾는 사람들이 애태우고 있을 테니. 만약 자네와의 부법 이야기가 즐겁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래 머무르게 하지 않았을 텐데.”
그가 아혜를 살짝 밀었고, 이어 아혜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주변이 바뀌어있었다.
푸른 산과 졸졸 흐르는 물줄기,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고, 멀리 내다보면 탁 트인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작은 시냇물이 발치에서 구불구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정말 실력이 있긴 하군. 하지만 내 사부가 될 필요는 없겠어. 후후, 속이기 쉬운 자라 다행이었지.”
아혜가 웃었다.
백발 사내가 사라지자, 정미는 부담감이 줄어들어 팔찌에서 자유롭게 밖으로 나왔다.
사흘 전, 물러날 곳이 없었던 정미는 팔찌 안으로 숨었다. 백발 사내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진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정미의 본능이 백발 사내의 눈앞에 드러나면 위험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잠시나마 자유를 얻은 셈이었다.
하지만 아혜의 말은 정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백발 사내는 혼을 잘못 불러 아혜의 소망을 이루게 해주었다. 하지만 아혜는 그에게 무정했다.
‘상황을 보니 몸을 평화롭게 되찾는 건 불가능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