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알다
돌아가는 길 도중, 정철은 임랑과 마주쳤다.
임랑은 기뻐하며 달려와 정철을 끌어안고는 그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
“다행이다. 난 네가 살아있을 줄 알았어!”
임랑은 정철을 안다가 등 뒤에 있던 정미까지 안게 되었고, 정미는 싫다는 듯 빠져나와 임랑과 그가 데려온 사람들을 궁금해하며 쳐다보았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백부의 하인과 그중 하나는 다섯째 공주의 호위였다.
“난 괜찮아. 너희 다 내려온 거야?”
정철이 임랑을 밀쳐내며 차분한 말투를 되찾고 말했다.
“안 내려올 수가 있나.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네 시체를 치워야 할까 봐.”
임랑이 주먹으로 정철을 한 대 쳤다.
“네가 남긴 표시를 보고 사람들을 데리고 널 찾으러 왔지. 사람들을 나누어서 다른 방향도 살펴보게 했어. 청겸, 네가 이렇게 조급해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여동생을 구하려고 제 목숨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내리다니. 봐봐, 우리도 결국 내려왔잖아. 길을 찾기 쉽지가 않아 시간을 조금 지체하긴 했지만, 최소한 안전하지. 네가 이렇게 무모하게 굴다가 만일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지 않겠어?”
정철이 웃었다.
“내 입장에선 득보다 실이 많지 않아.”
‘미미를 잃으면, 이 세상에 내가 원하는 건 없으니. 아니, 심지어 미미를 얻는 건 감히 원한 적도 없어. 미미가 평안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게 내 가장 큰 바람이지.’
“너희처럼 길을 찾아 내려오면 한 시진이나 걸리잖아. 한 시진이면 많은 일이 일어나고도 남지.”
정철은 이유를 설명하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석근, 곧바로 사람을 데리고 돌아가 내 은사인 고 선생을 찾아.”
임랑은 어리둥절했다.
“왜 고 선생을 찾아야 해?”
정철은 뒤돌아서 산봉우리와 절벽을 마주 본 채 설명했다.
“누군가 내 여동생을 구해 사라진 것 같다. 아마도 여기 왔다가 사라진 것 같은데, 이곳은 길이 막혀있어. 내 여동생을 데리고 사라졌다면, 여기에 기문진법(奇門陣法)으로 통로를 가렸을 가능성이 커. 내 은사이신 고 선생께서는 이 분야에 정통하시니, 네가 찾아가 줬으면 해.”
임랑은 믿지 못했다.
“청겸, 네 여동생을 구한 사람이 여기서 사라졌다는 걸 확신한다고? 만약, 만약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면 어떡하려고?”
정철이 뒤돌아서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분명 그런 사람이 있을 거야. 내가 아까 물 아래로 뛰어들어 저 연못을 살폈는데, 바닥은 아주 깊고 넓었고 사내 시체 하나만 보이더군. 연못 옆엔 사람 형상으로 움푹 파인 곳이 있던데, 내 여동생이 떨어진 곳일 거야. 파인 정도와 사방의 핏자국으로 봐서 내 여동생은…… 분명 혼자서 멀리 갈 수 없는 상태였을 테지. 게다가 저곳의 땅은 축축해서 얕은 발자국이 남아있더라. 바로 이 방향으로 말이야.”
임랑이 혀를 찼다.
“연못 바닥까지 살펴봤다고? 사내 시체도 하나 있었고? 이미 썩어 문드러진 건 아니겠지?”
정철이 그를 한 번 흘겨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 부패 되진 않았어. 그저 피범벅이 된 채 수초랑 얽혀서 주변이 온통 핏물이었을 뿐이지.”
정철의 말에 여기저기서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랑이 동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산에서 내려오느라 힘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했거든. 그래서 저 물을 마셨는데…….”
‘나는 안 마셔서 다행이지. 하늘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정미는 정철의 등에 엎드린 채 가슴 아파했다.
‘연못 속 사내 시체는 분명 그 아이의 아버지일 거야. 그런데도 오라버니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나를 찾기 위해 계속 물에 뛰어들었구나. 얼마나 물을 많이 마셨을지…….’
정미는 소매 속에서 급히 작은 손수건을 꺼내 정철의 입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손수건조차 정미가 걸친 옷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었기에, 정철은 당연히 아무 느낌도 없었다.
정미는 결국 울분이 터져 손수건을 거두고 발악하듯 정철의 뺨에 입맞춤했다.
‘됐어, 내가 느낌이 있으면 됐지.’
“석근, 어서 가봐. 더 늦었다간 날이 어두워질 텐데, 산에 오를 때 위험할 거야.”
임랑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 혼자 여기 남길 순 없어. 산짐승이 있으면 어쩌려고? 나도 여기 남고,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도록 하자.”
“안 돼.”
정철이 단호히 거절했다.
“네가 무공이 뛰어나고 빠르니까, 이 사람들을 데리고 소식을 전하러 가는 게 내가 안심이 돼. 실랑이는 이쯤 하자.”
임랑이 고개를 들어 가파른 절벽과 해가 점점 어두워지는 탓에 그림자가 진 괴석들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자넨 정말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마다하지 않는군. 그래, 내가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갈 테니, 넌 꼭 멀쩡히 살아있어야 해. 우리가 내일 내려올 때까지!”
‘우리가 위로 올라갔을 땐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일 테고, 날이 어두우면 당연히 이 절벽 아래로 내려올 수 없겠지.’
정철이 옅게 웃었다.
“꾸물대지 말고 어서 가봐.”
임랑은 몸을 뒤적이더니 화절자(*火折子: 옛날 불을 피울 수 있는 휴대용 도구) 몇 개를 건넸다.
“밤에 이걸 써. 지금 내게 쓸만한 물건이 없네.”
모두 급히 소집되어 사람을 찾으러 산에 들어온 사람들이었기에 먹을 것과 물마저 없었다.
“고맙다. 내일 보자.”
“그래, 내일 봐.”
임랑은 정철을 빤히 쳐다보다가 사람들을 데리고 떠났고, 정미는 궁금한 듯 쳐다보았다.
‘둘째 오라버니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편하게 말하는 건 본 적 없는데. 아주 친한 친우인가 봐.’
정철은 임랑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뒤돌아서서 절벽을 살폈다.
그는 혹시나 진법을 건드려 더 큰 결과를 낳을까, 절벽을 훼손시킬 수는 없었고 자갈돌 하나를 주워 조금씩 두드려보기 시작했다.
정미는 처음엔 정철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정철은 모닥불을 피운 뒤에도 그 행동을 계속했다. 정미는 탁탁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오라버니는 지금 통로를 찾는 건가?’
정철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두드려보다가 그제야 멈추고 모닥불 옆으로 돌아와 앉았다.
절벽의 몇 군데엔 정철의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역시 비어있군.”
정철이 혼잣말을 했다. 입가엔 옅은 웃음기가 떠올랐고, 그는 다시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미미, 아직 살아있니?”
‘오라버니, 나 아직 살아있어.’
정미가 정철의 손을 부드럽게 포개며 대답했다.
‘만약 내가 이대로 계속 오라버니 곁을 지킬 수 있다면, 오라버니의 희로애락을 모두 지켜보며 그 모든 걸 나눌 수 있다면, 그것도 살아있는 거라 할 수 있겠지. 아쉽게도 오라버니는 내가 곁에 있는 걸 모르겠지만.’
그때, 정철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모닥불 속으로 떨어지자 불꽃이 살짝 더 세게 이는 듯했다.
정미는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가 지금 울고 있는 거야?’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정철의 눈가에 있는 눈물 자국을 어루만졌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정미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이 모습은 정말 너무 불편하잖아!’
“미미.”
작은 외침이 들려오자, 정미가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내가 보여?”
하지만 정철은 그저 피에 젖은 손수건을 꺼내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보, 잠자리를 이렇게 뚱뚱하게 수놓다니.”
정철이 갑자기 웃었다.
정미는 다가가서 보더니 억울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오라버니는 정말 늘 말과 속마음이 다르다니까. 예전엔 분명 내가 수놓은 잠자리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지금에서야 솔직하게 말하는구나.’
정미는 오라버니를 원망하며 당당히 그를 응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철이 고개를 숙여 손수건 모퉁이의 잠자리 자수에 입을 맞췄다.
정미는 멍해졌다.
‘내가 아무리 둔하고 멍청하더라도, 오라버니의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는 건 알아. 보통의 오라버니가 여동생의 손수건에 입맞춤할 리가 있나?’
이 생각이 떠오르자 정미는 제 가슴이 뜨거운 기름에 빠진 것처럼 괴로워졌다. 지금 그녀는 실체가 없는 몸이었지만, 손에 축축한 땀이 나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혹시, 내가 감히 꿈꿔봐도 되는 걸까? 사실 오라버니의 마음도 나와 같다고? 아니, 불가능해. 그럴 리 없잖아!’
정미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실망할까 두려워서인지, 자신의 이성이 그 생각을 믿지 못하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라버니는 자신의 진짜 출신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를―’
정철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미미, 알고 있어? 사실 나는 정가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야.”
손수건을 쳐다보는 정철의 표정은 마치 연모하는 여인을 볼 때처럼 온화했다.
정철이 다시 말을 이었을 때, 정미는 이미 멍해져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아홉째 당숙부가 주워온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나중에 백부에 들어오게 되었고, 언젠가 이 비밀을 들켜서 아무도 필요 없는 자식인 나를 내쫓을까 봐 매일 두려워했지. 그러다 백부에서 널 마주친 뒤론 점점 두렵지 않게 되었어. 오라버니는 정말 할 일이 많아. 만약 정말 그날이 오게 되더라도 너와 어머니를 책임져야 하니까. 미미, 만약 내가 정가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날 싫어할 거니?”
‘아니, 아니!’
정미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철이 백부에 양자로 오지 않았더라면, 다른 집의 자식이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정미가 그 누구보다도 많이 해왔던 생각이었다.
‘그럼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네가 내 여동생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모닥불 옆, 정철의 작은 탄식이 울렸다.
‘오라버니―’
정미는 멍하니 손가락을 뻗어 정철의 뺨을 찔렀다. 정미는 튀어나올 듯한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기대감인지 망연함인지 모를 말을 뱉었다.
‘오라버니가 한 말, 무슨 뜻이야?’
정철이 모아온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지피자 주변은 더욱 환해졌다.
정미는 정철의 눈빛 속에 묻어나오는 온정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그 온정에 정미는 본인이 형체 없는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는 느낌이 들었다.
작고 슬픈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바보야, 오라버니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계속 물었잖아? 지금 같은 상황에서만 말해줄 수 있어.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너야…….”
‘나라고? 오라버니의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나라고?’
정미는 감히 믿을 수 없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쭈그려 앉았다.
‘오라버니가,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 나라고 말했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에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겠지?’
정미는 갑자기 차마 정철을 쳐다볼 수 없어 얼굴을 가린 채 뒤돌아서 한참 동안 마음을 가다듬었다. 충격이 지나가자, 마음속엔 달콤함만이 가득 찼다. 조금씩 정철의 곁으로 다가간 정미는 그제야 손을 내려놓고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 기뻐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철의 눈빛에 정미는 마음이 아파, 굳은 표정으로 정철의 뺨을 찔러보았다.
‘쌤통이다, 바보 같은 오라버니. 진작에 알려줬으면 다섯째 공주와 산에 들어가 놀지도 않았을 텐데. 산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이 꼴이 되지도 않았을 거고. 어쨌든 다 오라버니 탓이야. 책임져야 해!’
말을 마치자 정미의 뺨이 뜨거워졌다. 갑자기 이 상태로 지내는 것도 좋은 점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내가 오라버니에게 무슨 짓을 하든, 무슨 뻔뻔한 말을 하든, 오라버니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잖아!’
정철의 말이 소녀에게 큰 용기를 주었는지, 정미는 입술을 오므리고 조금씩 다가가 결국 정철의 입술에 진한 입맞춤을 했다.
‘오라버니는 거짓말도 잘해. 나를 좋아하면 내가 입맞춤을 하는 것도 싫지 않았을 거잖아. 화본에 그렇게 쓰여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