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짙은 안개
얼마나 지났을까, 정미가 그 여인을 알아보기로 결심을 내렸을 때, 갑자기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쳐다보니, 청포를 입은 사내가 느릿느릿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정미는 사내의 옆얼굴만 어렴풋이 보였다. 얼굴은 젊어 보였지만, 새하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풀어헤치고 있었다.
갑자기 기묘한 모습의 사내가 나타나 천천히 물가의 여인에게로 몸을 기울이자, 정미는 갑자기 경계심이 일어 두려움도 잊고 곧바로 달려갔다.
감히 답을 찾기 두려우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 여인의 안전을 지키고 싶었다.
“멈춰, 그녀를 놓아줘!”
정미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쯤, 백발의 사내는 몸을 숙여 여인을 뒤집었다.
덕분에 정미는 여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저절로 뒷걸음질 치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여인은 정미 자신이었다!
‘그럼, 그럼 나는 뭔데?’
정미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쳐다보며 망연자실했다.
백발의 사내는 정미를 쳐다보지도 않고 여인을 안아 올렸다.
정미는 다급해져서 달려가 사내의 앞을 막아섰다.
“너 누구야, 날 어디로 데려갈 셈이지?”
사내는 눈꺼풀도 들지 않고 여인을 안은 채 정미의 몸을 통과해버렸다.
정미는 머리에 천둥이 친 듯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고, 백발의 사내가 점점 멀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쫓아갔다.
정미는 연못에서 수십 장의 거리를 달려나가다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튕겨져 돌아왔다.
정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가 더욱 속도를 내어 돌진했고, 이번엔 더 세게 튕겨져 나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결국 정미는 백발의 사내가 점점 사라지는 걸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정미는 물가에 앉아 머리를 감싸고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발걸음을 떼고 여인이 엎드려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그곳의 풀은 이미 눌려 있었고, 축축한 땅은 사람 모양으로 약간 움푹 들어가 있었다.
사람 모양 주변에는 핏자국이 얼룩져있었는데, 새하얀 손수건 하나가 피에 물들여져 풀뿌리에 얽혀있었다. 손수건 귀퉁이에는 잠자리가 한 쌍 수놓아져 있었다.
정미는 손을 뻗어 그 손수건을 주우려 했지만, 손가락은 그대로 손수건을 통과해버렸다.
정미는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나 물가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을 물 안으로 넣어보았지만 조금도 물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심지어 조금의 물보라조차 일지 않았다.
정미는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죽었구나!’
이 사실을 깨달은 정미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가 죽었다면, 그 백발의 사내는 왜 내 시체를 가져간 거지? 선심을 쓴 거라 해도, 땅에 묻어줘야 마땅한 거 아냐? 그래야 둘째 오라버니가 나를 찾을 수 있지.’
“둘째 오라버니…….”
정미는 두 마디를 계속 중얼거리다가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라버니가 싫어할 만한 짓들을 하지 않았을 텐데. 여동생으로만 남는 게 뭐 어때서. 오라버니를 자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역시 내가 너무 욕심부린 탓에 하늘이 벌을 내린 거구나. 절벽에 떨어져 이런 결말을 맞게 되다니. 내가 이렇게 죽으면, 오라버니와 큰언니는 어떻게 하지? 만약 악몽 속의 일이 일어나면, 누가 그들을 구해주냔 말이야.’
정미는 생각할수록 괴로워졌고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했다.
‘만약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다신 그렇게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악운을 피해가게 할 수만 있고, 둘째 오라버니가 행복하고 평안할 수만 있다면, 그저 여동생의 분수에 만족하며 제멋대로 굴지 않을게요…….’
기도가 끝나고 눈을 떠보았지만, 눈앞엔 여전히 청산녹수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다. 정미는 빗물 같은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나 너무 무서워. 귀신이 되더라도 혼자 여기 외롭게 있고 싶지 않아, 보고 싶어…….”
슬프게 울다가 거의 기절할 때쯤, 눈앞에 갑자기 흰빛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눈을 뜨니, 정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익숙한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석근, 놔줘. 내 목숨은 이미 저 아래에 있으니.”
그리고 방금까지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던 그 모습이 펄쩍 뛰어오르더니, 아까의 자신처럼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오라버니!”
정미는 깜짝 놀라 혼비백산하여 두 팔을 뻗어 오라버니를 안으려고 했지만, 정철은 그녀의 품을 그대로 통과해버렸다.
정미는 텅 빈 두 손 사이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철이 한 손으로는 절벽의 덩굴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으며 민첩하게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정미는 옅은 연기처럼 정철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천만번 불러도 정철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미는 정철이 위험하고 가파른 절벽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 걸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은 그가 잡은 덩굴이 끊어지면서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만약 제때 절벽에 튀어나온 부분을 잡지 않았다면 이미 절벽 아래로 떨어져 분골쇄신하였을 것이다.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정철이 아래로 떨어지는데,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어 비수를 꺼내 절벽에 꽂으며 떨어지는 속도를 최대한 줄여보다가, 마침내 다시 덩굴 하나를 잡았을 때였다.
정철이 마침내 발을 바닥에 내디뎠을 때, 정미는 이미 온몸에 힘이 빠져 있었지만, 정철에게 달려들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얼마나 멍청했던 걸까. 둘째 오라버니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니. 예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얌전하고 귀여운 여동생이 될 텐데.’
“오라버니, 나 여기 있어. 나 보여?”
정미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정철을 꽉 안고 놓아주지 않으며 아무렇게나 볼에 입을 맞추곤 말했다.
“깜짝 놀라 죽는 줄 알았다고, 알아?”
정철은 한참 동안 숨을 고르다가 힘을 조금 회복한 뒤에야 너덜너덜해져 거치적거리는 겉옷을 찢어버렸다.
그러고는 일어나 정미의 몸을 통과해 사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정미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녀는 두 남매가 상봉했음에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에 몹시 슬퍼하다가, 날아올라 곧바로 정철의 등에 안겼다.
‘어쨌든, 다시 오라버니를 만난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할만한 일이야. 다신 손을 놓치지 않겠어. 고혼(*孤魂: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넋이나 영혼)이 되었더라도 오라버니를 따라 집으로 돌아갈 거야.’
정철은 연못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어느 방향으로 달려갔다.
정미에겐 하늘하늘하고 허전한 몸뚱이밖에 남지 않았기에 정철을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이미 한 번 겪어본 덕분에 빠르게 반응하여 다시 그의 등에 매달렸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철이 달려간 방향을 알아챈 정미는 기뻐했다.
‘다행이다. 오라버니가 이렇게 빨리 내가 떨어진 곳을 찾아내다니. 만약 오라버니가 더 빨리 알아챈다면, 그 백발의 괴인을 따라잡고 내 시신을 되찾아올 수 있을지도 몰라!’
정철은 정미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피가 묻은 손수건을 주워 올렸다.
그는 손수건을 꽉 쥔 채 그 어질러진 풀밭을 한참 쳐다보다가, 마침내 조금 힘이 생긴 듯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미가 아직 살아있어, 미미는 분명 아직 살아있을 거야!”
정미는 멍하니 듣다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쓰려왔다.
‘오라버니가 이렇게 혼비백산하는 모습은 처음 봐. 이게 다 나를 위해서인 거야?’
정미의 마음속에 강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죄책감으로 감춰진 아래에는 차마 인정할 수 없는 달콤함이 있었다.
정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귀신이 되어서까지 이렇게 욕심이 끝이 없다니.’
그때 정철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너덜너덜해진 겉옷을 벗어버렸다.
정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라버니가 뭘 하려는 거지? 왜 내의까지 벗는 거야? 설마 바지까지 벗는 건 아니겠지?’
정미는 급히 눈을 가렸다가 도저히 아쉬운지 자기합리화를 했다.
‘어쨌든 난 지금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도 나를 못 보잖아. 봐도 상관없지 않을까? 앞으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러고는 당당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늘은 아직 밝았고 거리가 가까워, 전에 밤하늘 달빛 아래서 본 것보다 그의 몸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정철은 무술을 배웠기에, 평소엔 말라보였지만 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등은 군살 하나 없이 깔끔했다. 마치 우아한 치타처럼, 아주 큰 힘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등에 교차로 그어져 있는 생생한 상처들은 아주 놀라웠다.
정미가 손을 뻗어 마음 아파하며 그 상처를 쓰다듬었다.
‘등이 이미 이 모양인데, 앞은 얼마나 많이 다쳤을까. 하지만 이제 지혈생기부를 만들어줄 방법이 없어 아쉽다.’
정미는 볼수록 마음이 아파 와, 정철의 앞으로 돌아가 앞쪽을 보려고 했다.
이때, 정철이 갑자기 손을 허리띠에 올렸고, 정미는 깜짝 놀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정미가 잠시 당황한 사이 정철은 이미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고, 정미를 등지고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정미는 깜짝 놀라 따라 들어가려고 했지만, 물에 보이지 않는 결계라도 있는 듯 정미를 튕겨버렸다.
그래서 정미는 물가에 엎드려 연못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물소리가 들리며 정철이 연못에서 뛰어올랐다.
정미가 달려가 정철의 목을 껴안았다.
“오라버니, 뭐 하러 물에 뛰어들었어?”
정미는 오라버니를 꾸짖은 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급히 정철의 품에서 빠져나와 몸을 돌렸고, 더는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
잠시 후, 물에 뛰어드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미는 고개를 돌려 멍하니 수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막았다.
‘오라버니는 내가 물 아래에 있는 줄 알고 계속 물에 뛰어드는 거구나.’
정미의 예상이 맞았다. 정철은 뭍에 올라올 때마다 잠깐의 휴식 후 다시 물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마침내 물가에 서서 다시 옷을 한 겹씩 입었다.
그러고는 정미가 떨어진 곳으로 다시 돌아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갈돌을 쌓은 뒤 나뭇가지를 꽂았다. 그 후 옷자락을 뜯어 나뭇가지에 묶어 표시해놓고는 그제야 어떤 방향으로 걸어갔다.
정미는 절로 웃음이 났다.
‘오라버니가 맞췄어. 그 백발 사내도 그 방향으로 갔다고!’
하지만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까 백발 사내를 쫓아갔을 때, 수십 장 정도밖에 쫓지 못했는데 나는 뭔가에 막혀 돌아왔다고. 지금 오라버니가 그 방향으로 가면, 오라버니와 떨어져야 하는 거 아냐?’
정미는 생각할수록 혼란스러워 벌벌 떨며 정철의 등에 엎드렸고 앞서 막혀 돌아온 거리를 벗어났을 때에야 안심할 수 있었다.
정철은 계속 그 방향으로 걸어갔다. 길은 점점 더 좁아졌다.
반 시진 후, 정철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정미도 마찬가지로 깜짝 놀랐다.
‘왜 길이 없는 거지. 그 백발 사내는 분명 이 방향으로 갔는데.’
눈앞은 곧게 뻗은 절벽이었고, 정철은 한참 서 있다가 혼잣말을 중얼댔다.
“잘못 짚었나?”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뒤돌아갔다. 듬직한 등이었지만, 정미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려왔다.
정미는 오라버니가 틀리지 않았다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정미 자신마저도 알 수 없어졌다.
‘그 백발 사내가 설마 저승사자인 건가? 하지만 저승사자라면, 내 혼을 가져가야지, 왜 시신을 가져간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