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절벽에서 떨어지다
한편 정미는 자신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된 줄은 모르고 있었고, 환자를 치료하고 목숨을 구하는 일에 갑자기 흥미가 생긴 듯 제생당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저녁이 되면 한 씨가 보낸 사람이 백부로 모셔가야 할 정도였다.
오늘도 정미는 한 씨가 부르는 바람에 제생당에서 이연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한 씨가 눈을 부라렸다.
“아무 일도 없으면 널 찾으면 안 되느냐? 아가씨가 되어선 온종일 제생당에만 틀어박혀 있다니, 그게 무슨 일이니?”
정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씨는 흥미가 떨어져 그녀를 한 번 노려보고는 말했다.
“일이 있긴 하지. 이틀 후에 황제께서 군신들을 거느리고 청량산(淸凉山)으로 피서를 가실 게다. 예전엔 네 아버지께서 늘 정동과 정희를 데리고 갔는데, 이번엔 내게 너보고 갈 건지 물어보라 하시더구나.”
“안 가요.”
정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너무 깔끔하게 거절해버리자, 한 씨는 잠시 멍해졌다가 그제야 말했다.
“네 둘째 오라버니도 갈 건데?”
정미는 그제야 눈을 들었다.
“둘째 오라버니도 간다고요?”
“그래. 예전엔 늘 여행을 다니거나 공부를 하곤 했으니까, 한 번도 못 가봤잖니. 게다가 이번 시험에 장원 급제했으니 당연히 따라 가야 하는 거고. 어때, 같이 갈 테냐?”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말했다.
“안 가요. 저도 바빠요.”
“이 바보 같은 계집!”
한 씨는 답답한 듯 정미의 이마를 한 번 건드리더니, 뭔가 말하려다가 결국 참고 한숨 쉬었다.
“됐다, 안 갈 거면 가지 말거라. 올해는 과거 시험이 미뤄져서 예전보다 더 늦게 가게 되었는데, 날씨가 이미 더워지고 있으니 가는 길이 편치 않을 거야.”
“네.”
한 씨는 정미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딸과 할 말이 없음에 유감스러워 정미가 흥미를 가질 만한 화제를 꺼내 보았다.
“네 둘째 오라버니의 혼사를 정했다.”
와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정미의 손가에 있던 찻잔이 뒤집혔다. 다행히 찻잔은 비어있었고 탁자 위에서 몇 바퀴 구르더니 떨어지기 전에 정미에게 붙잡혔다.
“왜 그렇게 놀라는 게냐? 네 혼사도 아닌데.”
정미는 한 씨의 조롱을 상대하지 않고 찻잔을 꽉 쥔 채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느 집안의 아가씨인가요?”
“충정후부의 적장녀란다.”
정미는 잠시 멍해졌다. 머릿속에 평범한 외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께서―”
한 씨가 웃었다.
“역시 그날 몰래 숨어서 들었구나. 사실 나는 충정후의 딸이 서가의 아가씨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는데, 네 아버지께선 계속 서가의 아가씨와 정혼해야 한다고 하시더구나. 그러다 뜻밖에도 서가 아가씨와 잘 맞지 않았고, 당연히 네 아버지도 별말 하지 못하셨지.”
정미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오라버니도 알고 있나요?”
한 씨가 피식 웃었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니. 네 오라버니가 직접 그 집안에 찾아가 기러기를 선물해야 할 텐데, 어찌 모를 수 있겠어?”
정미가 웃었다.
“오라버니가 알고 있으면 됐어요.”
이야기를 대충 끝마치고 난 후, 정미는 급히 이연원에서 나와 정일헌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조용히 비서거로 돌아갔다.
이번엔 결국 둘째 오라버니를 찾아가 물어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오라버니, 그 아가씨는 마음에 들어?’
* * *
다음날, 덕소 장공주부.
“또 빗나갔어.”
연무장에서 다섯째 공주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가 미안한 듯 웃었다.
“방금은 활을 제대로 잡지 않아서 그랬나 봐요. 다시 해볼게요.”
공주가 갑자기 손을 뻗어 정미의 활을 눌렀다.
“그만하자꾸나.”
정미는 멋쩍은 듯 우각궁을 거둬들였다.
“우리 말 타고 산에 가서 놀자.”
공주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갑작스레 제안했다.
“네?”
공주가 정미 가까이 다가와 갑자기 정미의 볼을 잡아당겼다.
“며칠 동안 웃지도 않고. 나가서 달리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정미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속눈썹을 가볍게 몇 번 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원래 활을 쏘고 말을 타던 두 사람은 옷차림이 가벼웠기에 굳이 옷을 갈아입지 않고 필수용품만 조금 챙기고 산으로 향했다.
산에 들어가자마자 두 사람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아주 좋은 말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온 시녀들과 호위들을 따돌렸다.
양쪽의 경치가 빠르게 뒤로 지나가고, 귓가엔 휙 휙 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흑마가 천천히 멈췄을 때, 정미의 등 뒤는 이미 땀으로 젖어있었지만, 아주 시원하고 상쾌했다.
주인이 화를 풀려고 했던 걸 알았는지, 흑마는 아주 빠르게 달려 다섯째 공주의 결따마(*말과의 하나로, 몸이 붉은색에 가까운 누런색임)를 훌쩍 뛰어넘었다.
잠시 후, 결따마는 그제야 다섯째 공주를 태우고 흑마를 따라잡았다.
공주가 고삐를 잡아당겨 정미 옆에 멈췄다.
공주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부는 바람을 맞다가 상쾌함을 느낀 뒤에야 고개를 돌려 정미에게 물었다.
“괜찮아졌어?”
정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훨씬 나아졌어요.”
공주는 웃다가 말 위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기분이 안 좋을 때 말을 타고 산에 들어와 이렇게 달리곤 해. 그럼 한결 나아져.”
정미도 공주를 따라 먼 곳을 바라봤다.
정미는 공주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쾌하게 마음을 푼 뒤, 대자연을 감상하자 한 사람의 고민거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당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이 적은 공주가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아—!’하고 크게 외쳤다.
메아리가 점점 멈추자, 공주가 고개를 돌려 정미에게 말했다.
“너도 해봐.”
정미는 공주를 흉내 내며 크게 소리쳤고, 흑마는 불쾌한 듯 콧방귀를 여러 번 껴 두 사람의 웃음을 자아냈다.
“들어봐, 메아리야.”
공주는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뜨며 말했다.
“아니,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정미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귀를 기울였고, 정말로 맑은 아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울음소리를 따라 말을 몰았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절벽 가까이에 고목 나무 하나가 가로로 뻗어있었고, 그 위에는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엎드려서 나무를 꼭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누님들 살려주세요―”
두 사람을 발견한 아이가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아이의 모습을 보니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정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공주에게 물었다.
“여긴 황가의 사냥터잖아요. 이렇게 어린아이가 왜 있는 거죠?”
공주가 절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근처 마을에서 몰래 사냥 온 거겠지.”
이곳은 황가의 사냥터였기에 보통 백성들은 들어올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사냥감이 유난히 많았고, 대담한 사람들은 몰래 들어와 밀렵하곤 했다.
“어린아이야, 너희 집 어른은?”
공주가 어린아이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정미는 깜짝 놀랐다. 평소 과묵하던 다섯째 공주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온화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공주의 위로에 점점 울음을 그쳤고 훌쩍대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금계를 잡으러 오셨는데, 여기서 떨어지셨어요. 저도 아버지를 찾고 싶은데, 너무 무서워서―”
“역시 밀렵하러 온 거구나.”
공주가 정미에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원래 이 지역엔 금계가 없어. 사냥할 때 좋은 징조를 위해서 특별히 남쪽에서 들여온 거라, 이 사냥터에만 있지.”
정미는 공주의 설명을 듣다가 그녀가 점점 절벽에 가까워지는 걸 보고 급히 붙잡았다.
“뭐 하시려는 거예요?”
정미는 절벽 쪽에 가로로 뻗은 고목 나무를 한 번 쳐다보자 오금이 저려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호위가 오길 기다려요. 너무 위험합니다.”
공주가 손을 뻗어 아이를 가리켰다.
“저 아이를 봐. 곧 버티지 못할 거라고. 호위들을 기다릴 겨를이 없어. 걱정 마. 조심히 올라가서 당겨 올려주기만 하면 돼.”
정미는 공주의 옷깃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분명 아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 제가 갈게요.”
공주의 주저하는 눈빛을 마주하며 정미가 말했다.
“제가 더 가볍습니다.”
공주보다 가볍다는 건 아주 작은 이유일 뿐이었고, 더 중요한 사실은 만약 공주에게 정말 큰일이 생긴다면 정미가 순장 당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직접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정미가 한 번 더 말렸다.
“공주께서 저보다 살집이 좋으시잖아요. 저 고목이 공주 전하와 아이를 버티지 못하면 어떡해요? 그럼 저 아이를 살릴 수 없는 건 물론이고, 공주 전하마저 위험해집니다. 그럼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아집니다. 전 어릴 때 자주 나무에 올라봤어요. 별일 없을 테니, 이따 아이를 받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공주를 겨우 말린 뒤, 정미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아이 쪽으로 발걸음을 뗐다. 그런데 흑마가 그녀의 옷자락을 덥석 물었다.
“됐어, 아흑. 놔줘.”
흑마는 정미의 옷자락을 물고 고개를 저었다.
정미가 흑마의 머리를 토닥였다.
“제멋대로 굴지 말고. 사람을 구하려는 거잖아.”
흑마는 머리로 정미의 손등을 비볐다.
정미는 왠지 마음이 시큰해져 고개를 숙이고 뺨을 흑마에게 비볐다. 그러고는 힘껏 옷자락을 빼내고 절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이는 울 힘마저 남아있지 않았고, 눈을 크게 뜬 채 꿈쩍도 하지 않고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고목을 안고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우직’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아이의 몸이 아래로 살짝 떨어졌다.
정미는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나아가 손을 뻗어 겨우 아이의 손끝을 붙잡았다.
“얘, 내 손 꽉 잡고 천천히 기어 올라와.”
정미는 한 손으로 고목을 꽉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어린아이에게 뻗고 있었다.
“못 잡겠어요, 누님. 힘이 없어요…….”
겨우 대여섯 된 어린아이는 놀라고 두려운 표정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그 눈빛은 어두컴컴한 세상에서 유일한 빛을 본 것만 같았다.
정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앞으로 조금 나아갔고, 마침내 아이의 손을 꽉 붙잡을 수 있었다.
정미는 안도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때, ‘우직’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후 정미는 그저 나무가 중간에서 부러져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걸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위로 던져 공주의 품으로 던졌다.
아이의 울음소리, 공주의 비명소리, 흑마의 긴 울부짖음이 귓가에서 점점 멀어져갔고, 정미는 생각할 틈도 없이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