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답례
환안은 정철을 쳐다봤다. 정철의 청수한 얼굴은 밤빛에 가려져 더욱 차갑고 무정해 보였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으로 팔근을 따라가다가, 정일헌의 입구에 다다르자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목숨을 걸고 말했다.
“둘째 공자님, 매번 오실 때마다 저희 아가씨의 기분을 상하게 하시더니, 저희 아가씨를 신경 쓰지도 않으시고. 앞으로는 오지 말아주세요.”
이 말을 내뱉자 환안의 가슴이 뒤늦게 두려움으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내 팔근을 밀치고 재빨리 달아났다.
팔근은 환안을 따라잡지 못해 되돌아왔고 정철의 표정이 왠지 암담해 보여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공자님, 정말 셋째 아가씨를 보러 가지 않으실 겁니까?”
정철은 팔근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팔근은 코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들은 하나같이 다 왜 이러는 거람. 정말 알 수가 없군.’
* * *
환안은 단숨에 비서거로 달려왔고, 화미는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달려오는 환안이 보이자 화미는 실망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둘째 공자께선 오지 않으셨어?”
“응.”
환안은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급히 달려온 탓에 뺨은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잘 됐지 뭐. 또 아가씨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을 테니까! 화미, 앞으로 둘째 공자님께서 또 오시면, 절대 들이지 마!”
화미는 급히 방문을 한 번 쳐다보고는 환안을 멀리 끌어당기고 작게 말했다.
“작게 말해. 아가씨께서 들으면 어쩌려고? 이 바보야, 둘째 공자께서 정말 안 오시면, 가장 슬퍼할 사람이 바로 아가씨라고.”
“하지만 둘째 공자님은 이제 아가씨가 슬프든 안 슬프든 신경도 안 쓰신다고. 아가씨가 뭐하러 둘째 공자님 때문에 상심하셔야 하는데?”
화미가 손을 들어 환안의 붉어진 뺨을 꼬집으며 한숨 쉬었다.
“이 세상에 받는 만큼 똑같이 주는 일이 어디 있어. 상대방이 내게 더 이상 주지 않겠다고 해서, 나도 깔끔하게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가능한 사람은 없을걸. 감정도 욕망도 없는 신선이 아닌 이상.”
환안이 눈을 끔뻑거렸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화미가 먼 곳을 쳐다보며 작게 말했다.
“나는 아가씨의 기분이 왜 좋지 않은지 조금 알 것 같아.”
“왜?”
환안이 급히 그녀를 살짝 밀며 물었다.
“아마도 둘째 공자께서 늘 아가씨에게 너무 잘해주셨다가 갑자기 혼사 얘기를 하니까, 아가씨께선 둘째 공자님이 혼인하신 뒤로 자신을 신경 써주시지 않을까 봐 걱정돼서 말다툼을 하신 것 같아. 그리고 둘째 공자님은 분명 아가씨께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옳지 않다고 여겨서 예전처럼 봐주지 않으신 거지. 어쨌든 둘째 공자님도 평생 혼인하지 않을 순 없으니까.”
“그런 거야?”
환안은 조금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둘째 공자님은 오라버니인걸. 아가씨께 자신을 아껴줄 올케언니가 하나 더 생기면 기쁜 일 아니야?”
화미가 환안을 노려봤다.
“그러니까 네가 바보라는 거야. 사람은 다 이기적이라고. 그러니까 아가씨의 일은 모른 척 해드리자. 그렇지 않으면 난감해하실 거야.”
“그럼, 네 말은 둘째 공자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야?”
화미는 잠시 멍해졌다.
“그건 모르지. 하지만 만약 둘째 공자께서도 다른 주인님들처럼 아가씨를 대했다면, 지금 아가씨가 이렇게 힘들어하시지도 않았을 거야.”
환안이 중얼댔다.
“왜 우리 아가씨께서 욕심을 부린다고 하는 것처럼 들리지?”
화미가 환안을 밀쳤다.
“함부로 말하지 마. 아가씨께서 들을라!”
두 사람은 잡담을 멈추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편, 방문 뒤에 조용히 기대있던 정미도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누웠다.
‘역시, 내 곁을 따라다니는 시종들마저 내가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하는구나. 어쩐지 오라버니가 나를 쳐다보기도 싫어하더라니. 안 볼 거면 안 보라지. 난 둘째 오라버니의 아내 따윈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그래,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 오라버니가 아무리 사나운 여인과 혼인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정미는 자신을 위로하면서도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채 잠들었다.
* * *
두 여종의 예상과는 달리, 다음 날 정미는 일찍 일어나 차분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는 곧바로 제생당으로 갔다.
맹 노부인의 두통을 치료해준 덕분에 문안 인사 드리는 걸 생략할 수 있었다.
“셋째 아가씨를 뵙습니다.”
“셋째 아가씨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
제생당으로 들어가는 길, 의원부터 청소하는 머슴까지 모두 공손하게 정미에게 인사를 올렸다.
정미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는 전용 진료실로 가 환안에게 분부했다.
“이제 환자를 들여도 돼.”
“아가씨, 우선 책부터 보지 않으시고요?”
“그럴 필요 없어.”
정미는 환안을 내보낸 뒤 조금 붉어진 눈가를 문질렀다.
다양한 환자를 만나 그들의 걱정과 병을 덜어주어야만,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부의 공부에 지장을 주어선 안 됐다. 이건 정미가 스스로 정한 규칙이었다.
‘오라버니가 나를 싫어하더라도 그 슬픔에 잠겨있을 순 없어. 만약 악몽 속의 일이 일어나면 아무 능력도 없이 지켜보기만 할 순 없으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절대 떳떳하게 살 수 없을 거야.’
제생당 안, 정미는 여전히 부인들만 진료를 본다는 규칙을 따르고 있었지만, 더 이상 태산과에만 한정하지 않고 다른 지식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정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열 명이 넘는 환자를 보았다.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환안이 참지 못하고 말렸다.
“아가씨, 잠시 쉬세요. 어젠 오전만 해도 많아봤자 다섯에서 여섯 명만 받으셨는데…….”
“괜찮아. 아직 버틸 수 있어. 다음 환자를 불러와.”
환안은 입술을 깨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서!”
두 사람이 대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바깥에서 시끄러운 징과 북소리가 들려왔다.
“나가봐, 밖에 왜 이리 시끄러워?”
환안은 잠시 나갔다가 빠르게 돌아와 희색이 만면한 모습으로 말했다.
“아가씨, 이번 시험의 방안(*榜眼: 갑과(甲科)에 둘째로 급제한 사람)이 아가씨께 편액(*扁額: 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을 선물하러 왔어요. 밖에서 징을 치고 북을 치고, 사람도 아주 많아요.”
“이번 시험의 방안?”
정미는 어리둥절했다.
환안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알려주었다.
“그 담미심규증에 걸렸던 맹 대인이요!”
이때, 그 맹 나리가 셋째 나리와 함께 방으로 들어오더니, 정미를 보자마자 곧바로 읍을 했다.
맹 나리는 이미 아주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온몸의 면모가 번듯하고, 양측 귀밑머리는 여전히 희끗희끗하긴 했지만, 기력은 아주 좋아 보여 십 년은 더 젊게 보였다.
“작은 신의님, 제게 오늘 같은 날이 있게 된 건 다 당신의 뛰어난 의술 덕분입니다. 제 절을 받아주십시오.”
정미가 급히 피했다.
“맹 나리,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건 의원의 본분이지요.”
셋째 나리도 맹 나리를 붙잡으며 맞장구쳤다.
“그렇습니다. 아직 어린 아가씨가 어찌 이런 큰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맹 나리는 셋째 나리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끝까지 읍하고 나서야 몸을 꼿꼿이 세우고 정색하며 말했다.
“정 의원님의 말은 틀립니다. 배움엔 먼저와 나중이 없고, 그저 달인을 스승으로 여길 뿐이지요. 작은 신의님께선 아직 나이는 어리시지만, 저와 일가족을 구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제 절을 받을 만하지요.”
그러고는 뒤돌아서 다시 정미에게 예를 갖추며 공손하게 말했다.
“작은 신의님,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저 제가 이번 시험에 방안으로 급제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때 제가 흥진비래(*興盡悲來: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는 뜻)하여 담미심규증에 빠져버렸고, 그 모습이 미친 자와 다름없었지요. 사실 그때 저는 마치 제 영혼이 몸 밖으로 나온 듯, 제 자신이 미친 듯이 소란을 피우고 창피한 짓을 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지요. 깨어날 수만 있다면 시험에 합격하지 않은들 어떠하겠냐고요! 가족들과 함께 아름다운 나날들을 보낼 수만 있다면, 그 무엇보다 좋을 텐데 말입니다!”
맹 나리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오십이 넘은 사람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정말입니다. 그땐 정말 후회스러웠습니다. 십 년 동안 어렵고 힘들게 공부하느라, 너무 많은 것을 놓쳐버렸습니다. 그렇게 계속 실성한 상태로 지냈다면, 평생 후회만 했을 겁니다. 작은 신의님, 저희 가족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으니 제가 당신께 편액을 선물 드리든, 읍을 하든, 머리를 조아리든, 그 모든 게 제가 할 도리입니다.”
정미는 아직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뻘인 사람이 자신의 앞에서 허리를 굽히며 하늘처럼 떠받들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표정은 차분함을 유지한 채 옆으로 몸을 피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맹 나리께서 생각을 넓게 가지게 되신 게 가장 좋은 일이지요. 이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제겐 환자가 무슨 신분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저 도움이 필요한 환자로 보일 뿐이지요.”
“역시 신의께선 자애로우십니다.”
맹 나리는 금으로 글씨를 쓴 편액을 내려놓고 여러 번 감사하다고 말한 뒤 떠났다. 하지만 제생당 앞의 구경꾼들은 한참 동안 끊이질 않았다.
셋째 나리가 정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미야, 앞으로도 열심히 하렴. 제생당에 네가 있는 건, 우리 정가의 행운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셋째 숙부님. 계속 열심히 할 거예요.”
맹 나리가 편액을 선물한 일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어떤 호사가가 이 일의 경위를 들춰내었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사람들 모두가 ‘작은 신의가 뛰어난 의술로 사람을 치료하고, 미친 거인이 방안에 급제했다.’는 일을 흥미진진하게 떠들댔으며, 심지어 이야기꾼은 이 일을 이야기로 만들어 찻집에서 풀어내며 돈을 벌기도 했다.
* * *
장 재상의 관저.
황 씨가 살짝 볼록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부군인 장자명(章子銘)과 상의하고 있었다.
“저희도 정가의 셋째 아가씨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장자명이 황 씨를 끌어안고 웃었다.
“정말 그 정가의 셋째 아가씨 덕분이라 생각하는 거요?”
황 씨는 화가 나 그의 손을 퍽 치며 꾸짖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 기분이 상합니다! 저희가 가졌던 아이들은 모두 석 달도 되지 않아 이유도 모른 채 떠나버렸지 않습니까. 당신도 알고 계시면서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배를 어루만졌다.
“이 아이도 마찬가지로 같은 의원들의 진료를 받고, 같은 약을 먹었는데, 유일한 차이점은 제가 정가의 셋째 아가씨께 부수 한 잔을 구한 것뿐입니다. 이제 벌써 5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정가 셋째 아가씨의 공로가 아니라면 누구 덕분이란 말이에요?”
“그 말은, 그 정가의 셋째 아가씨가 소진 도사보다 더 대단하다는 뜻이오?”
황 씨가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장자명이 웃었다.
“어째서? 소진 도사는 속세 밖의 명인인데, 어찌 비교할 수 있겠소.”
황 씨가 눈을 부라렸다.
“당신은 모릅니다.”
정말 속세 밖의 명인이라면, 고귀한 가문을 왜 그리 자주 들락날락하겠는가. 하지만 황 씨는 이 말을 속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래, 내가 몰라서 그러오. 부인이 정가의 셋째 아가씨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거든, 낳고 나서 다시 말하도록 하지. 어떻소?”
황 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