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힐문
이때, 노백야를 모시는 여종이 급히 들어왔다.
“노부인, 노백야께서 나가서 술을 마셔야겠다고 소란을 피우세요. 소인이 도저히 말릴 수가 없습니다―”
맹 노부인은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이를 듣자마자 침상 기둥을 매섭게 내려쳤다.
“정말 한시름도 덜 수가 없구나. 개한테 물리고도 밖으로 나돌려고 하니!”
둘째 나리가 급히 말렸다.
“어머니, 진정하세요. 또 두통이 올 수 있지 않습니까.”
맹 노부인은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중얼댔다.
“요 이틀 동안 어찌 된 일인지, 제대로 되는 일이 없구나.”
맹 노부인이 눈꺼풀을 들자 둘째 나리가 보였고 갑자기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하여 물었다.
“둘째야, 철이와 서가 아가씨의 사주단자를 교환했지 않았더냐?”
“그저께 교환했습니다.”
맹 노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저께 사주단자를 교환했는데, 어젠 네 아버지가 개에게 물려서 집안 전체가 난리가 나고, 오늘은 내 머리가 갑자기 이리 아프고, 정요가 죽었다니…….”
맹 노부인은 말할수록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얘야, 사람을 보내 서 아가씨의 사주단자를 가져오거라. 한번 보자꾸나.”
“예.”
한 씨가 급히 설란을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란이 돌아왔다. 그러나 설란의 얼굴은 자신의 이름처럼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왜 그러느냐?”
여종의 안색이 좋지 않자, 한 씨가 물었다.
“부인, 사주단자가…….”
설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맹 노부인이 고함쳤다.
“가져오거라!”
설란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 씨를 쳐다보자, 한 씨가 다급히 말했다.
“어서 가져다드리거라.”
그제야 설란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서가복의 사주팔자가 적힌 사주단자를 꺼내 건넸다. 순간 방 안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홍색에 금색으로 글자가 쓰인 쪽지는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채였다. 그건 누가 봐도 쥐가 물어뜯은 모습이었다!
“이, 이건―”
맹 노부인은 곧 기절할 것만 같은 모습으로 손을 떨며 사주단자를 가리켰다.
방 안은 아주 혼란스러워졌다.
* * *
날이 저물고, 저녁노을이 흐르는 구름을 붉게 물들이며 비서거를 비추었다.
정미가 조용히 화미에게 물었다.
“어머니께서 정말로 사주단자를 되돌려보냈어?”
화미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에요. 소인이 몰래 이연원 문밖의 나무 뒤에서 기다렸는데, 계 할멈이 나가는 걸 직접 봤어요.”
“그럼 됐어.”
정미는 창밖의 파초들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그런데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도 전에, 정철이 갑자기 비서거를 찾아왔다.
“둘째 오라버니.”
정미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 정철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정철은 정미의 옆에 앉아 따뜻하게 물었다.
“발은 다 나았어?”
정미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았어. 그저 조금 부딪혀서 까진 것뿐이라 부수를 쓰니까 다 나았어.”
“그럼 다행이다.”
“둘째 공자님, 차 드세요.”
그때 화미가 찻잔을 들고 왔다.
정철이 고개를 끄덕이고 찻잔을 건네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 모두 물러나 있거라.”
환안과 화미가 정미를 쳐다보자,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들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하늘은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었고, 붉은 노을이 하늘을 뒤덮어 창밖의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 방 안은 아직 등불을 켜지 않아 약간 어둡게 느껴졌다.
정철이 정미를 빤히 쳐다보자, 정미는 마음이 불편해 몸을 옆으로 빼며 물었다.
“오라버니, 왜 쳐다봐?”
한참 뒤, 정철이 말문을 열었다.
“미미가 정말 많이 큰 것 같아서.”
정미는 정철이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여인은 열다섯이면 급계를 하고, 사내는 스무 살에 가관을 하니까. 내년이면 나도 성년이라고. 원래 다 컸어.”
“그래, 미미도 내년이면 성년이지.”
정철이 창밖을 한 번 쳐다보았다. 붉은 노을이 그의 눈동자에 담겼고, 그는 이내 흔들리는 말투로 말했다.
“서가 아가씨와의 혼사는…… 네가 몰래 손을 쓴 거지?”
정미의 입가에 걸려있던 웃음기가 사라졌고 두 눈을 크게 뜬 채 정철을 바라봤다.
부인할 수 있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정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절대 거짓말할 수 없는 단 한 사람, 그건 바로 둘째 오라버니였다.
잠시 후, 하늘은 거의 다 어두워졌다. 정철은 잠자코 정미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철의 표정은 이미 잘 보이지 않았기에, 정미는 마침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응.”
정철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오라버니?”
정미가 당황하며 덩달아 일어났다.
“미미,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둘째 오라버니.”
정미가 손을 뻗어 정철의 옷깃을 붙잡았다.
“서가 아가씨는, 그녀는, 그녀는 좋은 짝이 아니냐!”
정철은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다가, 정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내며 말했다. 정미가 처음 들어보는 차가운 말투였다.
“미미,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설마 단편적인 말만 듣고 한 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거니? 한발 양보해서, 서가 아가씨가 좋은 짝이 아니라고 해도, 그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가 걱정할 일이야.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아가씨가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미의 두 눈이 커졌다. 정철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글자 하나하나가 예리한 칼날처럼 자신을 베어버릴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오라버니, 나는―”
정미가 뭐라 설명하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무력하게 느껴졌다.
‘오라버니의 질책은 틀리지 않았어. 이건 떳떳하지 못한 일이야. 서가 아가씨가 좋은 짝이 아니고, 오라버니와 어울리지 않다고 말한 건 그저 핑계일 뿐이었어. 결국 난 오라버니가 혼인하는 게 싫고, 올케언니가 생기는 게 싫은 거라고!’
정미는 해명할 의사조차 사라졌다. 그 모습에 정철은 실망한 듯 한숨을 쉬고 더욱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미미, 오라버니는 네가 옳은 길에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배운 능력을 부정적인 곳에 쓰지 말고. 그러다가 언젠간 네 자신을 해치게 될 거야!”
말을 마치고는 정철은 고개를 한 번도 돌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오라버니―”
정미는 힘없이 정철을 불렀다. 그러나 결국, 매일 밤 그녀를 잠에 뒤척이게 하는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정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손을 거두고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아가씨, 등불을 켤까요?”
환안이 문밖에 서서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환안이 들어와 등갓을 벗기고 등불을 켜자 방 안이 곧바로 환해졌다.
불을 피운 환안이 뒤돌아섰을 때, 정미의 표정을 보고는 깜짝 놀라 물었다.
“아가씨, 왜 우세요?”
정미가 아무렇게나 얼굴을 닦자 손에 축축한 눈물이 묻어나왔다.
“모르겠어. 뭐 더러운 게 눈에 들어갔나 봐.”
“아가씨, 둘째 공자님과 다투셨어요?”
“아니야, 오라버니는 늘 내게 잘해주잖아. 우리가 왜 싸워.”
하지만 환안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걱정이 가득하여 정미를 쳐다보다가 제의했다.
“아가씨, 만약 마음이 힘드시면 차라리 뭘 좀 드세요. 맛있는 걸 먹으면 괴로움을 잊을 수 있으니까요.”
……반 시진 후, 환안이 찐빵을 꽉 쥔 채 정미가 먹지 못하게 했다.
“아가씨, 더 드시면 안 돼요. 벌써 네 개나 드셨다고요!”
정미는 맑은 개울물에 적신 듯한 촉촉한 눈으로 가련하게 환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아직도 괴로운걸. 하나 더 먹게 해줘.”
“정말 하나만 드실 거죠?”
정미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환안은 내키지 않는 듯 손을 내렸다.
“그래요, 그럼 더 드시면 안 돼요.”
‘저도 아주 많아봐야 다섯 개밖에 못 먹는다고요, 아가씨!’
하지만 정미는 환안의 경고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고, 단숨에 두 개를 더 먹고는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가씨, 괜찮아지셨어요? 아직도 힘드세요?”
정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 힘들어.”
‘이젠 속이 불편해졌어!’
이 생각이 스치자마자 정미는 병풍 뒤로 달려가 미친 듯이 구토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화미가 급히 방 안으로 달려왔고, 깜짝 놀라 정미의 등을 두드려주며 환안에게 물었다.
“아가씨가 왜 이러셔?”
“아가씨께서 찐빵을 여섯 개나 드셨어…….”
환안은 자신이 일으킨 화라고 생각해 손가락을 꼬며 말했다.
화미가 화가 나 그녀를 노려봤다.
“내가 정말 널 어떻게 해야 할까!”
겨우 정미를 침상에 눕힌 뒤, 화미는 환안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가씨께서 네게 말해주셨어?”
환안이 고개를 저었어.
“아니, 그런데 매번 둘째 공자께서 다녀가실 때마다 아가씨의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
화미는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어둠 속을 바라보며 중얼댔다.
“맞아, 나도 점점 이해할 수가 없네.”
환안이 뭔가 떠오른 듯 발걸음을 떼자, 화미가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어디 가?”
“방울은 매단 사람이 풀어야지. 아가씨께서 둘째 공자님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으신 거면, 내가 가서 둘째 공자님께 아가씨의 기분을 달래주시라고 할게.”
화미는 입을 뻐끔거리며 환안에게 괜한 짓을 한다고 말하려 했지만,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다시 삼키고는 조용히 손을 놓아주었다.
환안은 화미에게 웃어 보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정철은 장원에 급제한 뒤론 장청원에서 나와 자신의 거처인 정일헌(靜逸軒)에서 지냈다.
환안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등불을 드는 것을 깜빡했고, 울퉁불퉁한 길을 힘들게 지나 정일헌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환안, 네가 웬일이야?”
팔근은 사람을 잘못 본 줄 알고 눈을 깜빡였다.
“둘째 공자님 계시지?”
“계시지. 서재에서 책을 보고 계셔. 무슨 일인데?”
“우리 아가씨께서 둘째 공자님을 찾으셔서.”
팔근은 듣자마자 환안을 데리고 들어갔고 서재 문 앞에서 외쳤다.
“공자님, 환안이 왔습니다. 셋째 아가씨께서 공자님을 찾으신다 합니다.”
잠시 후, 서재의 문이 열렸다. 정철이 입구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환안에게 물었다.
“셋째 아가씨께 무슨 일이 있느냐?”
환안은 늘 정철을 조금 어려워했기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눈 딱 감고 말했다.
“아가씨의 몸이 좋지 않습니다. 둘째 공자님, 저희 아가씨를 보러 와주세요.”
정철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나섰다가 다시 발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몸이 좋지 않으면 의원을 불러야지.”
환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고, 한참 뒤에야 말을 토해냈다.
“하,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공자님 때문에 아프신 거라고요!”
팔근의 의아한 눈빛에 정철은 조금 난처해져 목소리가 더욱 차갑고 엄해졌다.
“셋째 여동생이 도대체 왜? 어디가 아픈 것이냐?”
환안은 솔직한 시종이었기에 정철이 묻자 사실대로 얘기했다.
“공자께서 나가신 뒤에, 아가씨께서 찐빵을 여섯 개나 드시고는 토하셨어요…….”
“찐빵?”
팔근이 참지 못하고 묻자, 환안이 손짓으로 크기를 흉내 내며 말했다.
“이만큼 큰 거요.”
팔근이 혀를 차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것 참, 그렇게 큰 찐빵을 여섯 개나 먹으면, 나도 토하겠다!”
정철은 팔근을 한 번 훑어보고 환안에게 말했다.
“그저 많이 먹어서 그런 거라면, 그 애가 잘 쉴 수 있게 너희들이 잘 모시면 될 것 아니냐. 앞으로 잘 돌봐드리거라.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너희 모두 모실 자격이 없을 것이다.”
“둘째 공자님, 정말 저희 아가씨를 보러 가지 않으실 거예요?”
정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 아가씨가 나를 부른 것이냐?”
정철의 위압감에 환안은 감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요, 아가씨는 울다 잠드셨습니다. 소인이 아가씨의 마음이 괴로우실까 봐, 둘째 공자님을 찾으러 온 거예요.”
정철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팔근, 환안을 배웅해주거라.”
“공자님―”
팔근은 오늘 정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셋째 아가씨의 일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모습을 보자, 저절로 그를 한 번 부르게 되었다.
정철이 냉담한 눈빛으로 팔근을 쳐다봤다.
그제야 팔근은 감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환안에게 손을 뻗었다.
“환안,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