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사단(事端)
정미는 조용히 입꼬리를 휘며 당당하게 정철의 팔짱을 꼈다.
“오라버니, 도대체 뭘 사러 온 건데?”
정철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있어.”
정미가 그곳을 쳐다보자, 베잠방이(*베로 지은 짧은 남자용 홑바지) 차림을 한 노인이 담벼락 밑에 기대어 있었고 앞에는 사냥한 짐승들이 놓여 있었다.
정미는 정철을 따라 그곳으로 향했다. 사냥한 짐승들은 종류마다 수량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종류가 아주 다양했다.
반쯤 죽은 꿩은 얇은 줄로 발이 묶인 채 아무렇게나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고, 활기가 전혀 없는 산토끼들은 우리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외에 비둘기, 메추라기 등도 있었다.
정미가 조용히 정철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라버니, 홍소(紅燒) 메추라기가 아주 맛있는데.”
정철은 순간 몸이 굳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노백, 메추라기 한 쌍 포장해주시오.”
“좋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정철이 손을 뻗어 노인 옆에 있는 우리를 가리켰다.
“이 기러기 한 쌍도 주시오.”
노인이 웃었다.
“그럴 줄 알았지요. 공자들께서 이런 곳에 오는 이유는 분명 이것 때문일 테니까요. 잘 보세요. 이 기러기들은 잡은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서 아직 기력이 좋습니다.”
정미는 그제야 그 기러기들은 다른 짐승들과 취급이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기력이 좋은 건 물론이고, 기러기들을 가둔 우리도 다른 것들보다 정교해 보였다. 기다란 목에는 붉은 끈도 묶여있었다.
정미는 뭔가 의심스러워져 일부러 웃으며 물었다.
“오라버니, 오늘은 홍소 메추라기로도 충분한걸. 기러기는 살 필요 없지 않아?”
그러자 정철이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잘못 생각하셨습니다. 이 기러기들은 식용이 아니랍니다.”
정미의 어리둥절한 눈빛에, 노인은 기러기를 담은 우리를 정철에게 건네며 놀리듯 말했다.
“제가 추측한 게 맞다면, 아가씨께 곧 올케가 생기지요? 이 기러기는 말입니다, 바로 아가씨의 예비 올케 집안에 선물하는 거랍니다. 아가씨의 오라버니처럼 이렇게 직접 시장에 와서 기러기를 사는 부군이라면, 분명 아가씨의 올케언니를 각별히 여기시는 분이겠지요. 나중에 제 딸에게도 이런 복이 있으면 좋겠네요.”
정미는 의아해하며 정철을 쳐다봤다.
정철은 무표정으로 서둘러 돈을 내고 정미를 데리고 시장을 나왔다.
정미는 마침내 기러기의 용도를 알아냈다.
보통 납채례(*혼인할 때에, 신랑 집에서 중매자를 통해 혼인을 하고자 청하면 신부 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의례)를 할 때 주는 선물은 살아있는 기러기 한 쌍이었다.
‘이 기러기는 오라버니가 서가로 가 혼담을 꺼내기 위한 것이구나!’
정미는 생각할수록 가슴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금 기러기 한 쌍만 보내면 되잖아. 왜 일부러 시장에 와서 살아있는 기러기를 찾은 거야?”
정철이 담담하게 말했다.
“살아있는 기러기가 더 성의 있어 보이니까.”
정미는 화가 나 몰래 이를 갈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오라버니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설마 서가 아가씨가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인 거야?”
정철은 정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니까 더 이러는 거지. 오라버니가 그 아가씨와 혼인하기로 된 이상, 더 잘해줘야지.”
정철의 말은 차분했지만, 그 말은 큰 망치처럼 정미의 마음을 내리쳤다.
정미는 가슴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만 같았다.
정미는 둘째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그리고 둘째 오라버니가 앞으로 잘 대해줄 여인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자신은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여동생이었다.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절망적인 일이 있을까?’
정미는 괴로운 마음에 발길질을 한 번 했으나, 공교롭게도 날카로운 돌에 부딪혀버렸다. 발끝에 갑자기 심한 통증이 몰려오자 정미는 허리를 숙이고 낮게 숨을 내쉬었다.
줄곧 차분하던 정철의 표정이 변하며 몸을 숙이고 물었다.
“왜 그래?”
정미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발이 아파.”
정철은 손을 뻗어 정미의 치맛자락을 들쳐 확인하려다가 도중에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정미는 속으로 가벼운 한숨을 쉬고는 직접 치맛자락을 들치고 가엾게 말했다.
“오라버니, 발에 피가 나.”
피는 이미 자수 신발에서 배어 나와 발끝을 자욱하게 적셨다.
정철은 더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 허리를 숙여 정미를 업었다. 왼손엔 거의 죽어가는 메추라기를 들고, 오른손엔 기력이 넘치는 기러기를 들고 조용히 회인백부로 향했다.
정미는 정철의 등에 엎드려 입을 오므리고 웃다가 눈을 들어 기러기들을 흘겨봤다. 왠지 그 기러기가 아주 눈에 거슬렸고, 기러기들에게 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두 기러기 중 하나가 우리 밖으로 머리를 꺼내 도발하듯 정미를 노려봤다.
정미는 아무 말 없이 다친 발로 재빨리 그 기러기를 차버렸고 그제야 화가 조금 풀렸다.
정미의 움직임을 느낀 정철이 물었다.
“왜 그래?”
“아니야. 방금 기러기가 날 쪼려고 해서.”
정철은 급히 기러기를 담은 우리를 앞쪽으로 놓았다.
정미는 정철의 귓가에 대고 떠보듯 말했다.
“오라버니, 아니면 우리 이 기러기를 먹어버리자.”
한참 뒤, 정철의 굳은 몸이 풀리며 목소리를 내리깔고 경고했다.
“미미, 장난치지 마!”
결국 정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힘없이 백부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무 뒤에 숨은 정미는 정철이 새 옷을 입은 채 기러기를 들고 나가는 걸 직접 보고는 화가 나 나무줄기를 때렸다.
‘저 옷은 내가 사준 거라고. 저걸 입고 혼담을 꺼내러 갈 줄 알았다면 사주지 않았을 텐데!’
* * *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정가와 서가는 사주단자를 교환했고, 규율에 따라 한 씨는 여인 측의 사주단자를 조왕신상 앞에 놓고 찻잔을 깨끗이 닦았다. 3일 뒤 집안에 아무 일만 없다면 정혼하기로 정하면 되었다.
하지만 이튿날이 되자마자 회인백부에 사고가 터졌다.
노백야(*老伯爺: 백부의 전前 주인을 가리키는 말)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개에게 물린 것이다. 심지어 그 개는 들개도 아니고 회인백 세자 정명이 기르는 개였다.
노백야는 개의 주인이 누구든 상관없이 적장손을 데리고 나와 다치지 않은 발로 손자를 몇 번이나 걷어찼고, 대담하게 노백야를 물었던 개는 개고기가 되어 식탁에 올려졌다.
맏며느리 유 씨는 화가 나 몇 번이나 몰래 눈물을 훔쳤지만, 시아버지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에 정가의 큰나리에게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다.
큰나리도 자신의 아버지가 못마땅했으므로 문안 인사를 올릴 때 맹 노부인에게 완곡하게 말을 꺼냈다.
맹 노부인은 원래 노백야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에, 이는 쉽게 다툼으로 번졌다.
셋째 날, 놀라운 소식이 백부에 퍼졌다.
‘둘째 아가씨가 죽었다!’
둘째 나리가 몹시 분노하며 한 씨를 책문했다.
“철이의 혼사가 정해진 후 이 소식을 퍼뜨리기로 하지 않았소. 이게 무슨 일이오?”
“어린 여종 하나가 입을 가볍게 놀려 퍼진 겁니다. 나리, 화를 가라앉히세요. 이미 그 여종을 내쫓았으니.”
한 씨는 아침 일찍 찾아와 무심코 말이 새어나갔다며 용서를 구하는 정미를 떠올렸고 그저 조용히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딸이 그런 거라 자백할 순 없었다.
이때, 설란이 급히 들어왔다.
“나리, 부인, 큰일 났습니다. 노부인께서 쓰러지셨어요.”
* * *
둘째 나리와 한 씨가 염송당에 도착했을 때, 염송당에서 거처가 더 가까운 큰나리 부부도 이미 도착해있었다. 셋째 나리는 맹 노부인의 머리를 안마했고, 방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둘째 나리 부부가 들어오자, 맹 노부인이 셋째 나리의 손을 밀어내며 물었다.
“정미는?”
“정미는…… 아침 일찍 나갔습니다…….”
맹 노부인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 절박한 말투로 말했다.
“그 계집, 제생당으로 간 게지? 어서, 어서 불러오거라!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으니!”
셋째 나리가 급히 말했다.
“어머니, 정미는 오늘 제생당에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우선 주물러드릴게요.”
“넌 필요 없다!”
맹 노부인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듯 침상 기둥을 두드리며 외쳤다.
“어서, 어서 정미를 찾아와!”
한 씨가 멍하니 있자, 둘째 나리가 화가 나 그녀를 밀었다.
“어서 사람을 보내지 않고 뭐하시오. 어미가 되어서 정미가 어딜 자주 가는지도 모르는 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한 씨는 속으로 아픈 소리를 내며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정미를 기다리는 시간은 맹 노부인에겐 아주 길게 느껴졌고, 성질이 갈수록 거칠어져 나중엔 머리를 벽에 부딪히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 일그러진 표정은 방 안의 사람들이 감히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게 했고, 방 안엔 날카로운 목소리만 맴돌았다.
“정미는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게야? 그 망할 계집, 돌아오면 가죽을 도려내야겠다! 그래, 정요는, 정요도 괜찮다!”
맹 노부인이 둘째 나리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이미 정신이 맑지 않아 보였다.
“어서, 어서 쇄옥거로 가서 정요를 불러오거라!”
둘째 나리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잊으셨습니까. 정요는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맹 노부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점점 기억이 떠올랐는지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정미는 찾지 못하고, 정요는 죽고, 이 불효자들…… 내가 이렇게 아파 죽는 걸 두 눈 뜨고 보기만 할 셈이냐?”
아무도 노부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마침 이때 아복이 급히 달려 들어왔다.
“오셨습니다, 셋째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아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미는 이미 문발을 헤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맹 노부인은 정미를 보자마자 지푸라기를 잡은 듯, 방금의 성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절박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야, 어서 오거라. 어서, 아파 죽겠구나.”
정미는 급히 맹 노부인의 곁으로 걸어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고 침착한 말투로 말했다.
“조모님, 진정하세요.”
희고 매끈한 손은 차갑고 보송했다. 이렇게 살살 쓰다듬으니 맹 노부인의 초조한 기분이 정말로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곤 정미를 쳐다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이게 바로 부의의 능력인가? 아주 신기하구나.’
“조모님, 조급해하실수록 더 아프실 거예요. 조금만 참고 계시면 제가 약을 지어올게요.”
정미는 맹 노부인을 잠시 안정시키고 칸막이 방에 들어갔다. 한 시진 후, 그녀는 옅은 붉은색의 물 한잔을 가지고 다시 나왔다.
정미가 맹 노부인의 곁으로 다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맹 노부인은 재빠르게 물잔을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어머니, 천천히 드세요.”
둘째 나리가 말했다.
맹 노부인은 단숨에 붉은색 물 한잔을 다 마시고 나서야 잔을 정미에게 건네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모님, 좀 어떠세요?”
맹 노부인이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말했다.
“많이 좋아진 것 같구나.”
“그럼 다행이에요.”
정미가 빙긋 웃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조모님, 분명 며칠 전 제가 드린 부수를 드셨잖아요. 그런데 어찌 오늘 머리가 이렇게 아프신 거예요?”
맹 노부인이 손을 내저었다.
“나는 또 네가 준 부수가 효과가 없는 줄 알았구나. 멀쩡하다가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건진 나도 모르겠다. 펄쩍펄쩍 뛰며 아픈 게, 두꺼운 은침으로 머리를 찌르는 것 같았어. 도저히 참을 수 없더구나.”
그러고는 정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미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네가 알아 내주어야 한다. 갑자기 또 이렇게 아프면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겠구나.”
정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조모님, 제때 부수를 복용하기만 하면 이렇게 갑자기 머리가 아플 일은 없어요. 혹시…… 무슨 충격이라도 받으셨나요?”
“충격?”
맹 노부인은 어리둥절했다.
“조모님, 둘째 언니의 일로 너무 상심하신 거 아닐까요?”
맹 노부인은 잠시 당황했다.
둘째 손녀의 죽음이라면 확실히 조금 괴롭긴 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은 한 줌의 불꽃처럼 두통이 시작되자마자 재가 되어 사라졌고, 정요가 누군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정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저마다 권했다.
“노부인, 건강이 더욱 중요합니다. 마음을 넓게 가지세요.”
맹 노부인은 들을수록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요의 죽음이 그녀에게 끼친 영향은 아주 작은 물보라 정도였고, 절대 파도를 일으킬 수 없었다. 이는 맹 노부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 두통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앞으로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기에, 노부인은 속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