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혼사를 타협하다
정철이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한 씨는 태자비의 초대를 받았다.
태자비의 몸은 날로 무거워졌고, 한 씨는 그녀를 걱정하면서도 혹시나 의심을 살까 최근 입궁하지 않았다. 그러다 태자비의 초대를 받자 급히 정미를 데리고 궁으로 향했다.
“어머니―”
태자비 정아가 커다랗게 솟은 배를 받치며 일어나 맞이했다.
한 씨가 얼른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며 꾸짖었다.
“몸이 이리 무거우신데 어찌 일어나십니까.”
정아가 미소 지었다.
“어머니와 정미를 보니 반가워서 그러지요.”
정미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사실 회임 후반에는 매일 조금씩 걸어야 해요. 그래야 출산 때 도움이 되거든요.”
한 씨는 이미 정미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기에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아는 것도 많구나!”
세 모녀는 방으로 들어가 궁녀들을 내보낸 뒤 잠시 잡담을 나누었고,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정아가 본론을 꺼냈다.
“어머니, 둘째 오라버니의 혼사는 가닥을 잡으셨나요?”
뜻밖의 질문에 한 씨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자 정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경림연 이후로 대공주께서 둘째 오라버니를 마음에 들어하셨다고 들었어요…….”
한 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철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요.”
정아는 정미를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런 일을 어찌 어머니께 말할 수 있겠어요.”
원래라면 정미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번에 자매끼리의 밀담을 나눈 후, 정아는 더 이상 정미를 어린아이처럼 대하지 않았다.
정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
“어머니, 제 말은 만약 적당한 아가씨가 있다면, 조금 일찍 혼사를 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단 말이에요.”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나리와 상의해보도록 하지요.”
정아는 조금 안심이 되어 정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미, 따로 할 말이 있어. 잠시 따라오렴.”
정아는 정미를 데리고 밀실로 들어가 물었다.
“정미, 내 상태가 어때 보이니?”
정미는 아까 궁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정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안심하세요. 각 방면 모두 괜찮으시니, 틀림없이 무사히 출산하실 거예요.”
“그럼…….”
정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럼 내 배 속의 아이는 저번에 네가 말했던 것처럼―”
정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아의 긴장한 표정은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알겠어.”
정미가 정아의 손을 잡았다.
“큰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황손께서 언니의 배 속에 있을 땐 저도 어쩔 수 없지만, 태어난 뒤 제가 천천히 돌보면 분명 다 나을 수 있을 거예요.”
정아가 정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럼 부탁할게. 정미, 이 일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선 안 돼. 어머니와 둘째 오라버니한테도.”
정아는 정미가 이 경고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까 봐 염려되어 더욱 강조하여 말했다.
“만약 누설되면, 내 처지가 더 힘들어질 거야.”
그녀는 태자비이고, 낳을 황손이 치아(*痴兒: 정신지체아)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골칫거리였다.
‘만약 황손이 치아로 변한 이유가 내가 함부로 약을 먹은 것 때문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정아는 감히 결말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걱정 마세요.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정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 정미를 데리고 나갔고, 화장함에서 최고급 장신구 몇 개를 꺼내 정미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아쉬워하며 두 모녀를 떠나보냈다.
* * *
집으로 돌아온 뒤, 한 씨는 곧바로 사람을 보내 둘째 나리를 모셔오게 했다.
정미는 한 씨가 둘째 나리를 부른 이유를 눈치챘기에 핑계를 대고 억지로 그곳에 남았다.
한 씨는 정미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최근 딸과 많이 친해졌다고만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꽤 좋아졌고, 곧 둘째 나리가 올 때가 된 것 같아 정미를 뒷방으로 보내 간식을 먹고 있으라 했고, 한 씨는 바깥방에 앉아 기다렸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정미는 입구로 살금살금 다가가 몰래 엿들었다. 한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이건 제가 알아본 몇몇 가문의 여식들입니다. 그중 하나는 장(章) 재상 가문의 막내딸입니다. 성정이 온화하고 재주와 용모가 출중하다는군요. 또 하나는 신임 예부 좌시랑의 딸입니다.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은 아이에, 열여섯 살이랍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충정후(忠定侯)의 적장녀인데, 이 아가씨는 저도 몇 번 만나보았습니다. 쾌활한 아이인데, 용모가 조금 평범한 편이긴 합니다. 세 집안 모두 철이가 합격한 후 의사를 넌지시 드러내었고, 이 세 사람이 아니면 서 대인댁의 아가씨도 있지요.”
정미는 들을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손수건을 세게 쥐어뜯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아가씨들이 둘째 오라버니에게 시집오겠다고 나타난 거야?’
이때 둘째 나리가 입을 열자, 정미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귀를 기울였다.
“장 재상의 막내딸은 적합하지 않소. 아직 급계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장 재상은 정통(正統)을 주관하는 대신 중 하나였고, 젊은 시절 창경제가 황후를 연금한 뒤 봉인(鳳印)을 화 귀비에게 넘겨 관리하게 했을 때 꽤 불만이 있었다. 최근 태자의 나이가 들면서 때를 기다리기 시작하긴 했지만, 만일 화 귀비가 여전히 그를 미워한다면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장 재상의 앞날이 어찌 될진 모르는 일이었다.
한 씨가 장 재상의 막내딸을 앞세운 이유는 둘째 나리가 생각한 것과 비슷했다. 한 씨는 시집오기 전 풍 황후와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풍 황후를 지지해주었던 장 재상에게 호감이 있던 것이었다.
“열넷도 어린 나이는 아니지요. 다음 해면 급계를 할 텐데요.”
둘째 나리가 냉소했다.
“어리석군. 철이는 이제 막 급제했고, 앞으로 그 아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 가문은 점점 많아질 거요. 우리가 철이의 혼사를 이리 급히 정하려 하는 것도 대공주 때문 아니오. 만약 빨리 혼인하지 못하면, 대공주께서 철이가 정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신경 쓰실 것 같소?”
“그럴 리가요…….”
“대공주는 면수까지 기르고 있는데, 못할 게 뭐 있겠소? 철이가 만약 정말 대공주와 얽혀버리면 백부는 고개도 들지 못할 거요. 철이의 앞날도 물거품이 될 것이고!”
정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면수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괴물인 것마냥 두려워하는 거지? 둘째 오라버니에겐 감히 못 물어보겠어. 면수가 공주께서 기르는 거라면, 돌아간 뒤 역사서를 좀 뒤지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정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둘째 나리가 말했다.
“신임 예부 좌시랑의 딸도 적합하지 않소. 마(马) 시랑은 방 시랑을 제치고 올라온 자요. 방 시랑이 춘시의 부정행위 때문에 3급이나 강등되긴 했지만, 조정의 뿌리가 깊어 나중에 분명 마 시랑을 음해할 거요. 철이가 마가의 딸과 혼인하면 말려들게 되지 않겠소.”
“그럼 충정후의 적장녀는―”
둘째 나리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말했듯이, 그 아이의 외모는 평범하지. 부인을 얻을 때는 현명함을 보아야 한다곤 말하지만, 철이의 외모가 아주 출중하지 않소. 나중에 두 사람이 같이 길을 걸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 아이를 철이의 어미라고 생각하면 어쩔 것이오?”
한 씨는 말문이 막혔다.
둘째 나리가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서가의 아가씨로 하지. 나와 그 아이의 아버지는 동방이고 계속 사이가 좋았소. 두 집안도 교분이 있는 편이라 할 수 있고.”
서 대인은 노령으로 퇴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주 대인 대신 광록시경(光祿寺卿)이 되었다. 그저 동급의 인사이동일 뿐이었지만, 경관의 구경(九卿)중 하나가 되었기에, 서 대인의 나이를 감안하면 나중에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었다.
최근 왕 씨가 서가복을 데리고 부지런히 왕래한 덕분에 한 씨는 쾌활하고 잘 웃는 서가복에게 호감이 꽤 생긴 상태였으므로, 둘째 나리가 이리 말하니 별수 없이 대답했다.
“그럼 나리의 말씀대로 합시다. 며칠 안에 사주단자를 교환하면 제일 좋고요. 문제가 없으면 빠른 시일 내에 정혼하도록 하지요.”
“음.”
둘째 나리는 최근 영광스러운 일을 겪었던 데다가, 한 씨가 자신과 맞서지 않자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아지자 그는 한 씨의 뽀얀 목덜미가 눈에 띄어 가슴이 뛰었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부인, 최근 피부가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소. 좋은 연지 수분을 쓴 것이오?”
그러나 지금 정미가 뒷방에 있었기에, 한 씨는 둘째 나리와 정다운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미야, 충분히 쉬었느냐. 네 아버지께서 오셨다.”
그러고는 둘째 나리에게 설명했다.
“아까 조금 어지럽다고 하길래 안에 누워있으라 했습니다.”
정미는 그제야 마음을 가다듬고 나와 둘째 나리께 인사를 올렸다.
둘째 나리도 한 씨와 시간을 보내려던 생각이 깨끗이 사라져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걸어 나가다 멈춰서서 말했다.
“맞아, 정요를 찾으라 보낸 사람이 돌아왔소. 찾지 못했다는군. 철이가 정혼한 뒤, 정요가 병사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로 하지.”
한 씨는 아주 기뻐서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기분이 가라앉아있던 정미도 둘째 나리의 말을 듣자 마음이 흔들렸고, 둘째 오라버니와 서가복의 정혼을 깨트릴 방법에 대해 떠올렸다.
그리고 정미는 혹시나 큰일을 놓칠까 봐 여종을 교대로 보내 이연원의 상황을 살피게 했고, 다음날 역시 한 씨가 이른 아침부터 정철을 불러 상의한 것을 알게 되었다.
여종의 보고를 들은 정미는 곧바로 중문 밖으로 가 기다렸고 정철이 다가오자 우연히 만난 척하며 미소 지은 채 물었다.
“오라버니, 외출하는 거야?”
정철은 잠시 멍해졌다.
최근 두 남매는 중간에 담을 쌓은 듯 소원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정미의 웃는 얼굴을 보니, 정철은 순간 어쩔 줄 몰라 했다.
“장터에 살 게 있어서.”
정미는 이렇게 정철에게 치근거리면 분명 좋아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체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철의 정조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에 두 눈을 꼭 감고 정철의 팔짱을 꼈다.
“오라버니, 같이 가자.”
* * *
정미는 정철이 자신을 번화가로 데려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정철은 백부에서 멀지 않은 소란스러운 시장으로 갔다.
채소를 파는 곳도 있었고, 과일을 파는 곳도 있었으며, 심지어 꽃을 파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뒤섞인 곳에서 짐을 이고 좋은 자리를 찾는 소상인도 보였다. 각양각색의 냄새가 뒤얽히자, 그리 좋은 향은 아니었지만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비켜주세요, 아가씨. 잠시 비켜주세요.”
정미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갑자기 정철이 그녀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바짓가랑이를 올린 중년 사내가 대바구니 두 개를 들고 지나가자, 바구니 안의 생선이 펄쩍대 정미의 치맛자락에 물을 튀겼다.
생선 비린내가 순간 풍겨오자, 정미는 치맛자락을 들고 멍하니 정철을 쳐다봤다.
정철이 실소했다.
“그러니까 오지 말라니까. 굳이 따라나서겠다더니.”
그러고는 손을 뻗어 정미를 곁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