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침묵
정철이 심사숙고하여 떠보듯 물었다.
“미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내 여동생은 겨우 열네 살인데!’
잘 아는 것에 대해 얘기하자, 정미가 방긋 웃었다.
“잊은 거야? 나는 부의잖아. 여태 가장 많이 배운 게 바로 태산과라고.”
그러고는 깊게 한숨 쉬었다.
“상황이 확실히 어렵긴 해. 진상을 어른들께 알려드리면, 그 아이는 죽을 거고, 알려드리지 않으면 조 언니가 불쌍해지니까.”
정미는 알고 있었다. 훈귀세가의 관념이라면, 통방의 배 속에 있는 아이 따위는 동정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태산과에 대해 배우며 아혜가 가르쳐준 태아의 성장단계, 그리고 직접 작은 생명을 받았던 일을 떠올리자, 정미는 배 속의 태아를 아무 생명이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없었다.
정미의 복잡한 표정을 보며 정철이 말했다.
“한지가 아이를 지키고 싶은 이유는, 조가와 퇴혼하기 위함인 것 같아.”
“왜 그렇게 하는 건데?”
정미는 깜짝 놀랐다가 충격이 가신 후 뭔가 깨달았다.
“알겠다. 정요 때문이구나!”
그러자 정미는 한지를 망나니라 욕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사랑에 감탄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침묵했다.
마차는 삐걱대며 앞으로 나아갔다. 정미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우리 그냥 신경 쓰지 말자. 지 오라버니 마음대로 하게 두자. 만약 조가에서 정말 퇴혼을 한다면, 조 언니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라곤 할 수 없고, 그 아이도 목숨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좋아.”
정철이 옅게 웃었다. 그는 원래부터 다른 집안의 일에는 조금도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저 미미가 기쁘면 그에겐 될 일이었다.
정미는 또다시 긴장되었다.
“오라버니, 그래도 여전히 찝찝해. 사람을 교외에 보내서 정요가 어떤지 봐주면 안 돼? 한지가 퇴혼한 후 정말 정요와 혼인하면 어떡해? 정요가 외가 가족들을 해치게 둘 순 없어!”
“걱정 마, 내가 팔근을 보내볼게.”
정미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마음속 의혹이 풀리자, 정미는 갑자기 조금 어색함을 느꼈다.
정미는 몰래 눈을 들고 정철을 힐끔 쳐다봤다.
5월의 햇빛은 딱 좋았고, 얇은 창발에 가려져도 빛이 들어와 정철의 얼굴을 비췄다. 정미는 정철의 얼굴에 있는 얇고 사랑스러운 솜털까지도 볼 수 있었다.
정미는 입술을 핥으며, 마차가 이대로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미는 정철을 쳐다보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눈을 떼는 것을 잊고 말았다.
정미의 시선을 느낀 정철은 온몸이 긴장했고, 가까스로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였지만, 가슴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 녀석, 또 허튼짓하는 건 아니겠지? 또 내게 입맞춤을 하면 어쩌지? 호되게 꾸짖어야 할까, 아니면 인내심을 갖고 지도해줘야 할까?’
정철은 마음을 정하지 못했고 손에서는 땀이 났다.
“둘째 오라버니―”
정미가 갑자기 다가왔다.
정철은 무의식적으로 옆으로 피하다가 머리를 마차 벽에 세게 부딪혔다.
정미가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 괜찮아?”
소녀의 몸이 앞으로 기울자, 하얗고 가느다란 목 아래로 쇄골과 봉긋한 가슴이 보였다.
정철은 곧바로 멍해졌다.
“오라버니, 아프게 부딪혔어? 조심 좀 하지―”
정철은 눈이 불에 덴 듯 급히 시선을 피하며 정미를 밀어냈다.
“난 괜찮아.”
정미는 밀쳐져 몸을 비틀거렸다. 그녀는 정철을 빤히 한 번 쳐다보다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은 정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쏟아지는 빗속에 버려진 강아지처럼 망연하고 슬퍼 보였다.
정철은 위로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억지로 눈을 감았다.
결국 두 사람은 그렇게 회인백부에 도착했고, 마차에서 내려 조용히 헤어졌다.
* * *
한지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조 시랑 집안에 빠르게 전해졌다.
그래서 다음날 조경명이 다시 위국공부에 찾아왔다.
한지를 살핀 뒤, 조경명은 저번처럼 일찍 떠나가지 않고 예의 바르게 도 씨에게 물었다.
“도 부인, 세자의 통방이 3개월 된 아이를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귀댁에서 어찌 처리할 계획이십니까?”
저번에 왔을 땐 위국공 세자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었기에 당연히 통방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었다.
만약 위국공 세자에게 변고가 생긴다면 그의 여동생도 위국공부에 시집가지 않게 될 것이니, 위국공부에서 통방을 어찌 처리할지는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깨어나게 된다면, 당연히 규율에 따라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위국공 세자가 바보가 된 채 깨어난 것이다.
그렇기에 조경명은 통방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당연히 세자가 좋아진 뒤에 생각해 볼 것이네.”
조경명이 꼿꼿이 서서 물었다.
“도 부인의 말씀은, 만약 세자가 계속 이 상태에 머무른다면, 그 아이를 낳게 할 거란 뜻입니까?”
도 씨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조 공자, 영존과 영당께선 교양 있고 사리에 밝으신 분들이시지 않나. 같은 부모 입장에서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주셨으면 하네. 나와 위국공에겐 이 아들 하나밖에 없어. 만약 한지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이대로 대가 끊기게 둘 순 없네.”
“알겠습니다. 도 부인의 말씀을 부모님께 전달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부 가모님께서도 제게 전달하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보게나.”
조경명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 조가는 낙정하석(*落穽下石: '함정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해롭게 함을 이르는 말)한 집안이 아니니, 세자가 깨어났다면 어떤 상황이든 예정대로 제 여동생을 시집보내겠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귀댁에서 세자의 통방에게서 서장자를 낳게 하신다면, 저희 조가의 딸은 그 적모가 될 수 없습니다.”
조경명은 이 말을 남기고 작별을 고했다.
도 씨는 화가 나 속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조가의 뜻을 위국공에게 전한 뒤에도 입장은 여전했다. 한지가 완전히 낫기 전에는 절대 반반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버릴 수 없었다.
위국공은 젊은 시절 전쟁터에 나가 있었기에, 자신의 아내에게 늘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아내의 몸이 허약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때문에 도 씨가 입장을 굽히지 않자, 도 씨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 * *
어느새 반년이 지나갔고, 조가에선 결국 더 이상 참지 않고 위국공부와 깔끔하게 혼약을 깼다.
위국공부는 고귀한 가문이었기에, 세자가 다친 뒤 조가와 퇴혼한 일은 수도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조청공은 계속 기계를 연구하는 일에 몰두해있었기에, 가장 마지막으로 이 일을 알게 되었다.
“셋째 오라버니의 말은, 내 혼사를 취소했다는 거야?”
조경명은 차마 여동생의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취소했어. 다 위국공 세자가 망나니인 탓이야. 그러니 너무 힘들어 마. 아버지 어머니께서 분명 더 좋은 집안을 찾아주실 거야.”
“응.”
조청공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히려 조경명을 위로했다.
“아버지 어머니께 천천히 찾으셔도 된다고 전해줘. 최대한 인품이 좋고, 참견이 적은 사람으로. 난 하나도 급하지 않으니까.”
조경명은 멍해졌다.
‘이 여동생을 어쩌면 좋지?’
하지만 조청공이 괴로워하는 것 같진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웃으며 말했다.
“넌 모르지. 아버지 어머니께서 위국공부에 시간을 좀 주고 어떻게 하는지 보자고 하셔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쪽에서 정말 그 통방을 처리해버릴까 봐.”
“왜?”
조청공은 도무지 위국공부의 전 정혼녀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호기심이 가득하여 물었다.
조경명이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그 통방을 처리해버리면, 네가 시집가야 하잖아. 난 내 여동생을 바보에게 시집보내고 싶지 않다고. 아니, 위국공 세자가 낫는다고 해도 안 돼. 혼인하기도 전에 통방이 회임하게 하다니, 좋은 자가 아닐 게 분명해. 만약 네가 정말 그 자식에게 시집가게 되면 얼마나 속앓이를 해야 할지 모른다고. 차라리 진짜 바보에게 시집가는 게 나을지도 몰라!”
조경명은 말할수록 혼사가 깨진 것에 기분이 좋아져 손뼉을 치고는 말했다.
“어쨌든, 이렇게 된 게 제일 좋은 일이야. 청공아, 오라버니가 백미재에서 밥 사줄게. 이 일을 축하하자고.”
조청공이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집에서 축하하는 건 괜찮은데, 백미재에 갈 필요까진 없어. 아버지 어머니께서 아시면 또 셋째 오라버니를 꾸짖으실걸.”
* * *
조가 남매의 기분은 후련해졌지만, 회인백부 안, 정미는 마음이 무거웠다.
팔근이 얼마 전 전해온 소식으로, 정요가 실종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이미 둘째 나리와 한 씨에게 전해졌고, 둘째 나리는 대로하며 심복 하인을 몇 명 보내 정요를 찾게 했다. 그리고 두 남매에게 다신 이 일에 참견하지 말라 했다.
이런 상황에 정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불안한 마음으로 정요가 어딘가에서 조용히 죽어 다신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길 바랄 뿐이었다.
눈 깜짝할 새 5월 말이 되었고, 행방(*杏榜: 과거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문)이 발표되었다. 정철은 수석 합격자에 올라 회인백부 전체에 기쁨이 넘쳐흘렀다.
한 씨는 정철이 썼던 붓과 벼루를 위국공부에 선물했다. 한지에게 주어 좋은 기운을 받게 하라는 의미였다.
이상하게도 한지가 선물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병이 다 나아버렸다.
이렇게 되니 위국공부의 환희도 회인백부 못지않았고, 늘 한 씨와 사이가 좋지 않던 도 씨마저 한 씨를 보자마자 감격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유달리 풍성한 답례를 보내왔다.
6월 초, 창경제가 직접 전시(*殿試: 과거 제도 중 최고의 시험으로, 궁전의 대전에서 거행하며 황제가 친히 주지함)를 주최했다.
정철은 회인백부에서 자랐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용안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철의 글은 아름다웠으며 재능이 준걸한 청년이었다. 날로 늙고 쇠약해지는 창경제가 그를 싫어할 리 없었다. 그러나 제일갑(第一甲)을 흠정할 때는 곤란함을 겪었다.
관례대로라면 일갑은 세 사람이었고, 젊고 준수한 사람을 탐화로 정했다. 이번에 고른 세 사람 중 정가의 공자는 용모와 기개가 출류발췌했고, 나머지 두 사람 중 하나는 사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쉰이 넘은 나이여서, 전혀 탐화랑의 칭호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니 정가의 공자를 탐화로 정하는 것이 누가 봐도 가장 적합했다.
그러나―
창경제는 몰래 곁눈질로 정철을 힐끗 쳐다보고 또다시 힐끗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는 이 젊은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정철을 이 지위에 남겨둘 생각을 하니 왠지 달갑지 않았다.
“황상―”
태감 전(田) 공공이 조용히 황제를 불렀다. 얼굴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속으론 몰래 투덜거렸다.
‘황상께서는 왜 곤란한 모습을 하고 계시는 거람?’
한낱 태감이 황제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전 공공은 황상을 부른 뒤 감히 더 자세히 추측할 수 없었다.
창경제는 전 공공의 부름에 자신의 추태를 자각했고, 가볍게 기침하고는 일갑의 석차를 정했다.
황제가 큰 소리로 전여(*傳臚: 중국에서, 과거 때 전시 후에 진사(進士)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던 일)하자, 문무백관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젊고 재능이 뛰어난 회인백부의 둘째 공자가 있음에도, 황상은 사십에 가까운 나이의 사내를 탐화랑으로 지목했다.
전시의 석차는 황상의 주관이었고, 일갑에 합격한 세 사람의 글솜씨와 재능은 늘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때문에 연령, 외모, 서법 등이 석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번에 황상이 장원의 자리를 회인백부의 둘째 공자에게 준 이유는 그 둘째 공자의 재능이 나머지 두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거나, 둘째 공자가 황제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리라.
관리 사회에 들어온 자들 중 어리석은 자는 많이 없었다. 금방(金榜)이 궁전의 담에 붙자마자 회인백부에 축하를 하러 오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장원 행진을 하고, 경림연(*瓊林宴: 옛날, 황제가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위해 베푼 연회)에 초대받는 등, 정철은 호화롭고 바쁜 나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