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90화 (190/375)

190화. 간파

하지만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한지가 혼수상태로 깨어나지 못한 지 벌써 사흘이 흘러버렸다.

집안사람 모두가 반반이 회임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세자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아무도 반반의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한지가 깨어나지 못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모두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고, 다들 만약 세자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반반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향을 피워줄 수 있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며칠 동안 병문안을 오는 사람은 끊이질 않았고, 위국공부는 반반이 회임했단 소식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한지의 병세가 결말이 날 때까지 기다려보고 다시 처분할 셈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위국공 세자의 통방이 회임했다는 소식은 조금씩 퍼져나가게 되었다.

얼마 후, 조 시랑의 집안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찾아온 사람은 조청공의 셋째 오라버니 조경명이었고, 적지 않은 선물을 든 채 예의 바르게 들어와서 물었다.

“세자께서 낙마하셨다고 들어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저를 보내 살펴보라 하셨습니다. 지금은 좀 어떻습니까?”

조경명은 조 시랑 부부를 대신해 온 것이었기에 도 씨가 그를 데리고 한지를 보러 갔다.

떠나갈 때쯤, 조경명이 말했다.

“도 부인, 너무 걱정 마세요. 세자께선 분명 깨어나실 겁니다. 며칠 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조 공자, 고맙네. 나 대신 영존(*令尊: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과 영당(*令堂: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께 안부를 전해주게.”

조경명을 배웅한 뒤, 도 씨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려 위국공에게 말했다.

“조가에서 지의 통방에 대해 물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 마디도 묻지 않을 줄은 몰랐군요.”

도 씨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한숨 쉬며 말했다.

“아마도 조가에서 지를 안타깝게 여겨 반반의 일을 묵인해주신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 관대한 집안이군요.”

위국공은 젊은 시절 전쟁터에서 손목을 다쳤고, 그 이후 일 년 내내 술만 마셨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 수척해 보이더라도, 기력은 괜찮은 편이었다. 도 씨의 말을 듣자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부인, 정말 그 아이를 살려둘 생각이오?”

도 씨가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눌렀다.

“그렇지 않으면요? 저도 서자인 장손을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지가 이 꼴이 되었는데,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중에 최소한 분향해줄 사람은 있어야지요.”

“그건 타당하지 않소. 아들에게 정말 큰일이 난다고 해도, 그건 하늘의 뜻이오. 하지만 통방이 먼저 자식을 낳는 일은, 그런 규율은 위국공부에 한 번도 없었소.”

“규율이요? 규율도 인정을 벗어날 순 없지요. 나리, 만약 지가…… 그렇게 된다면, 저희에겐 그 손자밖에 없습니다.”

“그럼 평이나 흘이 쪽에서 양자로 들이면 되잖소.”

위국공이 낮게 말했다.

“나리!”

도 씨가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찌 그리 모질게 대하실 수 있습니까. 친손자는 버리고, 다른 사람의 아들을 양자로 들인다니요? 그 시절 나리께서 늘 전쟁터에 나가계시지만 않았어도, 제가 아들을 한지 하나만 낳을 일이 있었겠습니까? 나중에 부상을 당해 돌아오시고, 저희 둘 다 몸이 좋지 않아져 낳고 싶어도 못 낳게 되지 않았습니까. 엉엉엉, 내 신세야―”

도 씨가 처량하게 울자, 위국공은 마음이 심란해져 깊게 한숨 쉬었다.

“울지 마시오. 알겠소, 당신 마음대로 처리하시오.”

바로 이때, 한 여종이 달려와 외쳤다.

“국공야(*国公爷: 국공부의 주인을 부르는 경칭), 마님, 세자께서, 세자께서―”

도 씨가 벌떡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위국공이 도 씨를 끌어안았다.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라. 세자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게냐?”

그러자 여종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자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나리, 들으셨습니까, 지가 깨어났답니다. 우리 지가 깨어났어요!”

도 씨가 위국공의 손을 꽉 잡으며 기쁨에 차 외쳤다.

위국공은 도 씨보다 훨씬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급해 마시오. 어서 보러 갑시다.”

* * *

한지의 방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잠시 기쁨이 지난 후 방 안엔 침묵이 맴돌고 한지의 말소리만 들려왔다.

“사탕을 먹고 싶어요. 어머니, 어머니, 어디 계세요? 사탕을 먹고 싶어요.”

도 씨가 한지를 품에 안고 울며 물었다.

“오 태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세자가 왜 이 꼴이 된 거지요?”

오 태의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마도 세자의 머릿속에 혈괴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깨어나긴 했지만, 정신이 맑지 않나 봅니다.”

“그럼 좋아질 수 있는 겁니까?”

오 태의는 잠시 망설이더니 솔직히 말했다.

“그건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소관이 이런 진료를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머리를 다치고 깨어난 뒤 빠르게 회복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평생을 실성한 채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 태의가 떠나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한지의 방에 남아있었고, 분위기는 아주 엄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여종이 들어오더니 한 씨가 정미 남매를 데리고 왔다고 보고했다.

한 씨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희색이 만면하여 물었다.

“어머니, 한지가 깨어났다면서요?”

한지가 낙마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뒤, 한 씨는 매일 위국공부에 찾아왔다. 그녀는 오늘 위국공부에 오자마자 한지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당연히 크게 기뻐했다.

“깨어나긴 했다.”

단 노부인이 한지를 한 번 쳐다봤다.

한 씨가 노부인을 따라 한지를 쳐다보더니, 깜짝 놀라 몇 걸음 다가갔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고모, 고모.”

한지가 방긋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은 찬란했지만, 어딘가 어리숙해 보였다.

한 씨는 가슴이 철렁하여 도 씨를 쳐다봤다. 그러자 도 씨는 훌쩍이며 말했다.

“지가 깨어난 후, 정신이 어릴 때에 멈춰있는 것 같습니다…….”

한 씨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지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갑자기 일어나 정미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미야, 어서 네 사촌 오라버니를 봐주거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도 씨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 안 모두의 시선이 한 씨 모녀에게 집중되었다.

한 씨가 설명했다.

“정미가 부의 공부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 담미심규에 걸린 거인도 치료했다고 들었습니다. 한지의 상황은 태의도 방법이 없다 하니, 정미가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의 의심스럽거나 놀랍다는 눈빛을 받은 정미는 여전히 침착했다.

“외조모님, 조급해 마세요. 일단 제가 지 오라버니를 한번 살펴보고 말해 봐요.”

부의 진료의 첫 단계는 바로 망진이었다.

정미는 한지 앞에 서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한지는 눈앞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르는 듯 시시때때로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고, 방 안의 분위기는 갈수록 긴장감이 넘쳤다.

정미는 마침내 시선을 거두고 의아한 표정으로 모두를 쳐다봤다.

“미야, 알아냈니?”

한 씨가 물었다.

정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망진 상으론…… 머리에 큰 문제는 없어요. 정신이 맑지 않을 리 없는데―”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미의 뒤에 선 한지가 두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정미, 정미, 가지 마. 나랑 술래잡기하자―”

도 씨가 대경실색하여 한지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혹시나 한지가 또 다칠까 두려워 섣불리 떼어내진 못했다.

“지야, 어서 놓거라!”

구석에서 투명 인간처럼 서 있던 정동이 이를 보고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정말 창피하겠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위국공 세자의 품에 안기다니.’

정미는 갑자기 닥친 상황에 멍해졌고, 그 사이 정철이 여지없이 한지의 손을 떼어내 정미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정미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방금의 일을 떠올리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여전히 정철에게 붙잡혀있자, 그 익숙한 따뜻함에 정미는 안심이 되면서도 억울해 저도 모르게 정철의 팔을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오라버니―”

정미는 자신의 억울함이 한지의 포옹과는 무관했고 지금 옆에 있는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철은 이를 오해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 미미가 겁을 먹은 것 같습니다. 저는 우선 미미를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

아무도 둘을 막지 않았고, 정철은 정미를 데리고 위국공부를 떠났다.

마차에 오른 후, 정철이 정미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미미,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방 안의 사람들 모두가 한지의 정신이 맑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정철에게 매서운 말을 들은 이후, 정미는 지금처럼 오라버니를 가까이 대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정철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따뜻한 말에 코가 시큰거려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응,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아. 그저 조금 이상해서. 지 오라버니에겐 별문제가 없어 보이거든. 그런데 왜 정신이 이상해진 걸까?”

정철의 눈에 차가운 기운이 스쳤고, 이내 입꼬리를 휘며 작게 말했다.

“한지가 일부러 그런 척을 하는 것 같아.”

“그런 척이라고?”

정미가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도 진료를 볼 줄 알아?”

정철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사람만 볼 줄 알지. 아까 네가 한지의 머리에 문제가 없다고 했을 때, 한지의 눈빛이 확연히 변했었거든. 정말 바보가 된 사람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테지.”

그때, 모든 사람의 주의력은 정미에게 쏠려 있었기에 한지의 안색에 순간적으로 스쳤던 변화는 정철 외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포옹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혼란스럽게 했고, 아무도 정미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정철은 이 두 가지로 한지가 지금 일부러 미친 척을 하는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정미는 당연히 정철의 말을 믿었고 중얼대며 말했다.

“어쩐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하지만 지 오라버니가 왜 미친 척을 하는 거야?”

정철은 잠시 멍해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지가 미친 척을 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미에게 말하기 적절한 것은 아니었다.

“안 되겠어. 돌아가서 외조모님께 알려드려야겠어. 한지가 꾀병을 부리다니, 외조모님과 어르신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계시는데!”

정미가 일어나 마차에서 나가려고 하자, 정철이 그녀를 붙잡았다.

“오라버니?”

정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철은 급히 정미의 손을 놓고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

“미미, 우선 앉아.”

처음의 충격이 지나자, 정미는 이미 침착해진 상태였다. 게다가 정철과 이리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건 그녀가 늘 바라던 일이었기에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얌전히 정철의 곁에 앉아서 살짝 고개를 들고 말했다.

“오라버니, 무슨 생각이야? 외조모님과 다른 어른들께 알리지 않으려는 거야?”

정철은 슬쩍 옆으로 몸을 움직이며 가볍게 기침했다.

“그저 이 일을 신경 써야 할지 그냥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 한지도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오라버니, 그냥 알려줘. 지 오라버니가 왜 꾀병을 부리는 건데?”

정미가 정철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정철은 살짝 손을 빼내고 정미의 간절한 눈빛에 결국 대답해주었다.

“듣기로는, 한지의 통방이 아이를 가졌다고 하더라고. 한지가 그러는 이유는 그 아이를 지키고 싶어서인 것 같아.”

정미는 잠시 멍해졌다.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이게 내가 외조모님께 한 말들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니.’

배 속에 삼 개월 된 아이가 있는 여인이 떠오르자, 정미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 오라버니는 정말 어리석네. 외조모님과 어른들이 통방이 아이를 낳는 걸 허락할 리 없다는 걸 분명 알면서도, 통방에게 아이를 갖게 하다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 그 아이는 이미 사람의 모습이 되었는데 지금 죽이면 너무 불쌍하잖아. 하지만 만약 낳는다고 하면, 조 언니는 또 어떡해?”

정미는 말할수록 화가 났다.

“오라버니는 모르지. 삼 개월 된 태아는 이미 손도 있고 발도 있어. 손가락도 빨 줄 안다고―”

그러나 정철의 이상한 눈빛에, 정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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