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잘못된 걸 알면서도
한지는 얼마 전, 몰래 교외에 갔을 때 보았던 정요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정요처럼 청려하고 온화하던 사람이 야위어서 뼈만 남아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요는 오히려 한지를 위로하며 자신을 걱정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부드러운 강인함은, 한지가 다른 여인에게서 본 적이 없는 품성이었다.
한지는 헤어질 때 정요가 바친 시를 떠올렸다.
‘섬운농교, 비성전한, 은한초초암도. (*纖云弄巧, 飛星傳恨, 銀漢迢迢暗度 : 가느다란 구름은 하늘에서 변덕스럽게 흐르고, 유성은 그리움과 원한을 전하니, 오늘 밤 아득히 먼 은하를 몰래 건너네.)
금풍옥로일상봉, 편성각인간무수 (*金風玉露一相逢, 便勝却人間無數: 가을바람이 부는 백로의 칠석에 만나니, 속세의 서로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소원한 부부들보다 못할 게 없다네.)
유정사수, 가기여몽, 인고작교귀로 (*柔情似水, 佳期如夢, 忍顧鵲橋歸路: 함께 그리움을 하소연하고, 둘의 다정함은 물결처럼 부드럽네. 짧은 만남은 꿈과도 같아서, 헤어질 땐 차마 오작교를 돌아볼 수가 없구나.)
양정약시구장시, 우기재조조모모…… (*兩情若是久長時, 又豈在朝朝暮暮: 두 사람의 마음이 죽을 때까지 변하지만 않는다면, 밤낮을 함께하지 못한들 어떠하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구절에, 한지는 처음으로 자신을 향한 정요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었고, 다시금 정요의 재능에 놀라게 되었다.
‘정요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평판이 나빠지는 게 뭐라고. 내가 위국공부를 계승한 뒤 열심히 노력하면 누가 이 일을 붙잡고 늘어질 수 있겠어?’
한지는 빠르게 결심을 내렸다. 그는 몸을 숙여 반반을 끌어당겨 세우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반반, 홑몸이 아니니 바닥에 있지 말거라.”
한지는 반반을 자신의 뒤로 숨기고는, 단 노부인과 도 씨에게 예를 갖췄다.
“조모님, 어머니, 이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안 된다!”
단 노부인과 도 씨가 동시에 외쳤다.
그러자 한지가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조모님, 반반이 이 손자의 시중을 든 뒤, 매사에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한 번도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배 속의 아이를 없애는 것은 너무 잔인합니다. 이 아이는 손자의 아들이자, 조모님의 증손주 아닙니까.”
단 노부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를 없애는 건 확실히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규율을 어길 순 없어. 지야, 알지 않느냐. 우리 위국공부에 그런 속 썩일 일이 없는 이유가 네 조부님이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고 스스로를 단속한 덕분 아니더냐. 서자와 서녀가 많은 다른 집안 중 평안한 집안이 몇이나 되느냐? 만약 서자가 장자가 된다면, 화를 초래하는 근원이 될 게다. 그러니 이 아이는 절대 살려둘 수 없다.”
“어머니―”
한지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도 씨를 쳐다봤다.
도 씨는 단 노부인보다 더욱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모든 건 노부인의 말씀을 따르겠다.”
그러자 한지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렇다면, 제 불효를 탓하지 마십시오. 반반, 가자!”
한지가 반반을 끌고 뒤돌아 걸어가자, 단 노부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어서 세자를 막지 않고 뭐하느냐!”
도 씨가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지야, 네가 반반을 데리고 이 문밖으로 나간다면, 이 어미가 죽는 꼴을 보게 될 게다!”
한지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도 씨를 쳐다보다가, 비참한 모습으로 반반의 손을 놓으며 실성한 듯 말했다.
“조모님께서도 제게 강요하시고, 어머니께서도 제게 강요하시는군요. 좋아, 좋습니다. 전부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고는 반반을 쳐다보지도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지의 정신 나간 듯한 모습에 단 노부인과 도 씨는 깜짝 놀랐고, 반반은 그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급히 그를 쫓아나갔다.
엿듣고 있다가 딱 걸린 용흔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세손, 어서 한지를 쫓아가거라, 무슨 일이라도 날까 두렵구나!”
도 씨가 새파란 안색으로 말했다.
“아, 네, 기다리세요. 제가 꼭 한지를 데리고 돌아오겠습니다.”
한지는 곧바로 마구간으로 향했고, 말을 탄 채 위국공부를 나섰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흔이 한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한지, 뭐 하는 짓이야. 통방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창피하지도 않나?”
한지는 아까의 실성한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네가 뭘 알아?”
용흔은 화가 났다.
“난 네 그 엉망진창인 일은 궁금하지도 않아. 그냥 날 따라오기만 하면 돼. 네가 조모님과 숙모님을 크게 놀래켰다고!”
“용흔.”
한지의 말투가 갑자기 따뜻해졌다. 눈빛에서는 간절함이 묻어나왔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같이 놀았던 정을 생각해서,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용흔이 무의식적으로 반문하자, 한지는 몸을 용흔쪽으로 기울여 작게 몇 마디 전했다.
용흔의 눈이 커지더니 단호히 거절했다.
“안 돼. 네가 어떻게 그렇게 어른들을 속일 수 있어. 다들 놀라 쓰러지실 거야. 난 공범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용흔, 내게 진짜 사고가 나는 것도 아니고, 어른들이 걱정은 하시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야. 하지만 내겐 지금 목숨을 걸지 않으면 다신 기회가 없어. 그러니까 네게 부탁해도 될까?”
한지는 처음으로 용흔 앞에서 제 자신을 낮추었다.
용흔은 굳었던 표정이 풀렸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한지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용흔,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기분을 알아?”
용흔은 멈칫했다.
한지가 손을 뻗어 용흔의 어깨를 짚었다.
“네가 날 도와주면, 나도 너와 정미를 도와줄게. 어때? 넌 정미를 좋아하잖아.”
용흔이 한지의 손을 뿌리쳤다.
“아니, 내가 정미를 좋아하고 정미와 혼인하고 싶다고 해도, 내가 알아서 방법을 찾을 일이지 남의 간섭은 필요 없어!”
한지가 비웃었다.
“용흔, 어려서부터 버릇없이 자라서 그런지, 이 세상 모든 게 네가 원하면 다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용흔은 잔뜩 성이 나서 그를 노려봤다. 대답은 안 했지만, 표정으로 이미 한지의 말을 증명한 셈이었다.
한지는 용흔을 흘겨보다가 멀리 쳐다보며 탄식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어떤 사람들, 어떤 일들은 네 신분이 아무리 존귀하더라도 가질 수 없고, 해낼 수 없어. 너, 그동안 우리 조모님과 고모님이 화서를 아주 신경 쓰고 계신 건 알고 있니?”
용흔이 입을 삐죽였다.
“그게 뭐 어때서. 걘 그저 약골일 뿐인걸.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이모님이 정미를 시집보내지 않을 거라고!”
한지가 용흔을 빤히 쳐다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응, 그래서 최근 고모님께서는 사철이 마음에 들었나 보더라.”
“사철?”
“회성 사가의 적장손 말이야. 지금은 수도에 살고 있고, 내 조모님의 친여동생의 손자야. 최근 사가와 회인백부의 왕래가 잦아졌고, 양쪽 어른들도 서로 마음에 든 모양이야. 정미가 급계를 하자마자 정혼을 할지도 모르지.”
한지는 계속 용흔의 안색을 살피다가 입꼬리를 휘었다.
“그때가 되면, 네게 무슨 방법이 있을까?”
용흔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지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용흔, 설마 정말로 떼를 쓰면 정미와 혼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도 그렇게 정요와 혼인하고 싶어 했는데, 지금 상황이 어떤지 한 번 봐.”
용흔은 여전히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너도 이 상황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건데?”
한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최소한, 네 어머니께서 정미를 경왕부로 시집들이고 싶지 않아 하시는 이유는 알고 있지.”
“뭔데?”
용흔의 표정이 크게 변했다.
“날 한 번 도와주면 알려줄게.”
용흔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한 번만이야. 다음은 없어!”
‘결국 한지가 오명을 짊어지고 퇴혼을 바라고, 정요와 혼인하고 싶어 하는 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니까.’
* * *
대략 반 시진 후, 용흔이 한지를 부축한 채 위국공부로 돌아왔다.
하인이 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고를 올렸다.
“큰일 났습니다. 세자께서 낙마하셨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도 씨는 숨을 들이켜더니 곧바로 쓰러졌다.
단 노부인은 겨우 숨을 가다듬은 후,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어서 태의를 모시고, 노위국공과 다른 사람들도 불러오거라!”
얼마 지나지 않아, 한지가 있는 방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도 씨가 훌쩍이며 울었다.
“어쩌다 낙마한 것이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걸…….”
단 노부인은 심란한 마음에 사람들 앞에서 도 씨에게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러 우느냐, 모든 건 태의가 온 뒤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거라. 흔아, 자세히 말해 보거라, 이 애가 어쩌다 낙마하게 된 것이냐. 말이 빠르게 달리고 있었느냐?”
용흔은 비열하고 횡포했지만, 굳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지가 던진 미끼에 그저 뻔뻔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지가 말을 타고 나갔고, 제가 바로 뒤를 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절 상대하지 않았지요. 실성한 모습처럼 보였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말의 속도는…… 그리 빠른 건 아니었지만, 떨어질 때 머리를 부딪친 것 같았습니다.”
‘머리를 부딪쳤다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굳었다.
팔이나 다리가 부러졌다면 치료할 수 있었지만, 머리를 부딪쳤다면 가장 위험한 상황이었다.
노위국공과 단 노부인, 현임 위국공은 평소 감정을 잘 억제하는 편이었지만, 적장손의 생사가 불분명해지자 마음이 아주 무거워졌다.
방 안의 분위기가 차갑고 무거워져,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태의는? 태의가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겁니까?”
도 씨가 위국공의 손을 꽉 붙잡고 물었다.
“태의께서 오셨습니다, 오셨어요.”
그때 한평이 태의를 데리고 급히 들어왔다.
위국공부에서 모신 태의는 오(吳) 태의였다. 태의서에서 타박상과 낙상으로 유명한 자였다.
오 태의는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병상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방 안에 사람이 많으면 진료하기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자 단 노부인은 급히 위국공 부부만 남기고,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 기다리게 했다.
오 태의는 자세히 한지의 부상을 검사하다가 눈꺼풀을 뒤집어보더니 그제야 다시 일어났다.
“오 태의, 세자는 어떠한가?”
단 노부인이 침착하게 묻자, 오 태의가 도 씨를 한 번 쳐다봤다.
‘위국공 부인은 허약하기로 유명하니, 만약 견디지 못하면 더욱 큰일이 될 것이다.’
도 씨가 입술을 떨며 말했다.
“태의, 솔직히 말해주세요. 우리가 세자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그래야 방법을 찾아보지요…….”
도 씨가 흐느껴 울자, 위국공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단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애 말이 맞네. 오 태의, 솔직히 말해주게나.”
오 태의는 그제야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세자의 전신엔 찰과상만 조금 있고,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참 동안 깨어나질 않고, 방금 소관이 은침으로 검사해보아도 반응이 없더군요. 말에서 떨어질 때 머리를 다쳐서 머리 안에 어혈이 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도 씨가 곧바로 물었다.
“그건…….”
오 태의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단언하기 힘듭니다.”
“오 태의, 그게 무슨 뜻인가?”
단 노부인은 겉으론 침착해 보였으나, 소매 안에 숨겨진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오 태의가 포권하며 말했다.
“노부인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사람의 머리 부위는 가장 복잡한 곳이지요. 머리를 다치면 신의라고 하더라도 단언하기 힘듭니다. 세자의 머리 안 어혈이 천천히 흡수된다면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흡수되지 않는다면…….”
모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오 태의는 가볍게 한숨 쉬고는 말을 이었다.
“계속 혼수상태일 수 있습니다. 생기를 다 소진하게 되면―”
오 태의의 말을 다 끝나기도 전에 도 씨의 몸이 비틀거리더니 이내 위국공의 품에 쓰러졌다.
단 노부인이 창백한 안색으로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오 태의, 고맙네. 수고스럽겠지만 가서 약을 지어주게나.”
오 태의가 방에서 나가자, 단 노부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위국공이 연거푸 위로했다.
“우선 너무 겁먹지 마시오, 지는 좋은 아이이니, 하늘이 도울 것이오.”
“하지만 오 태의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단 노부인이 중얼거렸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이오? 난 우리 손자가 그리 쉽게 갈 거라 생각하지 않소!”
노위국공은 확고한 말투로 단 노부인에게 위로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