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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188화 (188/375)

188화. 확정

위국공부로 간 뒤, 한 씨와 위국공부 가족들은 잠시 앉아있다가 모두 경왕부로 향했고, 위국공부는 곧바로 썰렁해졌다.

노위국공과 단 노부인은 사이가 좋았지만, 각자 자신만의 흥미가 있었다. 정미가 단 노부인을 부축하며 말했다.

“외조모님, 오늘 날씨가 좋으니까 저랑 화원에서 산책해요.”

단 노부인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화원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단 노부인이 갑자기 저 멀리 담 모퉁이에 있는 복숭아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야, 아직 기억하고 있느냐. 어릴 때 저기 오래된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네가 자주 올라서 복숭아를 따곤 했단다.”

정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히 기억하지요. 나중엔 외조모님도 올라오셨었잖아요. 그러다 그 오래된 복숭아나무가 쓰러져버려서…….”

정미는 말하다가 잠시 멈칫하더니, 멍하니 먼 곳에서 걸어오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스무 살 안팎의 꽃다운 나이로 보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으며 또랑또랑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옷차림은 국공부의 여종들보다 고급으로 보였지만, 주인들의 옷차림은 아니었다.

“미야, 뭘 보는 게냐?”

정미가 손을 뻗어 가리켰다.

“외조모님, 저 사람은 누군가요? 옷차림을 보니 주인 같진 않은데, 머리는 올려져 있네요. 관리인의 며느리인가요?”

단 노부인의 시력은 예전 같지 않았기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쳐다본 후에야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정미에게 솔직히 말하기엔 어려워 모호하게 말했다.

“저 앤 네 지 오라버니를 모시는 여종이란다.”

정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기에 단 노부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지 오라버니는 아직 혼인하지 않았잖아요?”

단 노부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손을 뻗어 정미를 가볍게 때렸다.

“요 녀석이, 뭣 하러 그런 걸 묻느냐. 아직 혼인하지는 않았지만, 소성년식을 치른 뒤로 모셔줄 사람이 있어야지.”

정미가 단 노부인의 손을 피하며 말했다.

“때리지 마세요. 그저 이상해서 여쭌 거라고요. 예전에 어머니께서 통방은 주인에게 적자가 생긴 이후에야 회임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단 노부인의 표정이 굳더니, 정미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미야, 네 말은…… 방금 저기 걸어간 여인이 아이를 가졌단 말이냐?”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3개월 정도 되었어요.”

단 노부인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쁜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야, 조금 피곤하구나. 이만 돌아가자.”

“네.”

방으로 돌아온 뒤, 단 노부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기애애하게 정미와 점심식사를 했고 사람을 보내 정미를 배웅했다.

정미가 떠난 뒤, 단 노부인은 곧바로 여종인 양신에게 한지의 통방 반반을 불러오라 명했다.

“노부인, 데려왔습니다.”

단 노부인은 병풍에 비스듬히 기대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고, 양신의 말을 듣고도 곧바로 눈을 뜨지 않았다.

한참 뒤, 단 노부인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뜨고는 손을 드리우고 공손히 서 있는 반반을 쳐다보았다.

“노부인을 뵙습니다.”

반반은 태연자약하게 예를 갖췄다. 보통 여종들이 노부인을 봤을 때의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단 노부인이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맏며느리는 영리한 아이인데, 왜 이렇게 요염한 여종을 한지를 모시게 한 거지?’

단 노부인은 반반을 상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미경에게 분부했다.

“양 의원을 모셔오거라.”

반반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쳤다.

곁눈으로 반반을 지켜보고 있던 단 노부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애의 반응을 보니, 정미가 잘못 본 게 아니구나.’

양 의원은 국공부에서 지내는 의원이었고, 일찍이 칸막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미경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단 노부인이 반반을 가리켰다.

“양 의원, 이 여종의 맥을 짚어보게.”

반반은 그제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노부인―”

단 노부인이 날카롭게 노려보자, 반반은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양 의원은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뻗으세요.”

반반이 부들부들 떨며 손을 뻗었고, 눈물을 흘리며 양 의원을 쳐다보았다.

양 의원은 반반의 손목을 짚어보더니, 잠시 후 내려놓고 단 노부인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노부인, 이 여종은 회임하였습니다. 대략 3개월쯤 되었군요.”

진료를 마친 양 의원이 나가자, 단 노부인은 곧바로 양신에게 말했다.

“정원(正院)으로 가서 국공 부인이 돌아오면 즉시 여기로 오라 했다고 알려라.”

양신이 나가고, 단 노부인은 그제야 반반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작은 걸상을 하나 가져다주거라.”

여종이 걸상을 가져다주자, 반반은 차마 앉지도 못한 채 무릎을 쿵 꿇고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노부인,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소인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단 노부인이 눈썹을 치켜떴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럼 어찌 배 속에 3개월이나 된 아이가 있는 게냐?”

단 노부인은 몹시 분노했다.

장손이 아직 혼인도 하기 전에 통방이 회임하다니, 이는 하늘만큼 부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가 이미 3개월이나 되었으니, 어찌 무자비하게 낙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아이를 남겨둘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르면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반반이 연거푸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노부인, 소인은 정말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매번 제때 피자탕(*避子湯: 피임약)을 마셨고, 소인이 회임을 한 것 같다고 느꼈을 땐 이미 두 달이 된 이후였습니다.”

반반이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들자,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보였다.

“노부인, 소인은 이 아이가 제 배 속에서 조용히 두 달 동안 버텼다는 생각만 하면, 도저히 죽일 수 없습니다. 세자의 아들이자, 노부인의 증손자 아닙니까.”

노부인은 가슴이 아파 와 눈을 감았고 피곤한 말투로 말했다.

“상심, 악사, 저 아이를 데리고 칸막이 방으로 가 쉬게 하거라.”

방 안이 조용해지고, 단 노부인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다가 긴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았다.

도 씨는 국공부로 돌아오자마자 여종의 말을 듣고는 급히 옷을 갈아입은 뒤 단 노부인에게로 향했다.

단 노부인의 설명을 듣자, 도 씨가 비틀거리며 말했다.

“노부인, 그 말씀이 사실입니까?”

단 노부인이 한숨 쉬었다.

“이미 양 의원이 진맥도 해보았다. 정말 회임한 지 3개월 되었다더구나.”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피자탕을 마시고 있을 텐데요?”

“나도 그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그 아이에게 피자탕을 올리는 파자를 불러와 물었는데, 매번 제때 마시게 했다고 하고.”

“그럼 하늘의 뜻이란 말입니까?”

도 씨가 중얼댔다.

단 노부인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네 뜻은, 그 아이를 살려두겠단 말이냐?”

도 씨는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꾹 참고 말했다.

“어찌 살려둘 수 있겠습니까. 격식 있는 집안에서 서자가 첫째가 되다니요. 그냥…… 그냥 그 아이가 아직 때가 아닐 때 온 걸 탓해야지요.”

단 노부인과 도 씨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 씨의 아들은 한지 하나밖에 없었고 원체 몸과 마음이 약했기에, 솔직히 그 아이를 없애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엔, 마음은 안타깝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었다.

도 씨가 이를 악물며 화냈다.

“이게 다 한지, 그 불효자 놈 때문에 이런 성가신 일이 생긴 겁니다!”

단 노부인은 도 씨를 한 번 훑어보더니 생각했다.

‘만약 네가 지에게 이렇게 여우 같은 통방을 골라주지 않았다면, 합방도 적었을 것이고, 통방이 회임하는 일도 없었겠지!’

“손자를 탓할 게 아니다. 피자탕을 먹었는데도 회임한 건,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단 노부인은 말하다 잠시 멈칫하더니 당부했다.

“이 일은 한지에게 알리지 말도록 하자꾸나. 괜히 혼란스럽지 않도록. 오늘 바로 그 아이를 처리하도록 하고, 나중에 구실을 찾아서 반반을 내쫓도록 하지.”

“예.”

그러고는 단 노부인은 양신에게 양 의원에게서 탕약을 한 그릇 받아오라 시켰다.

이때, 누군가 급히 문으로 들어왔다.

“외조모님, 정미는요?”

한지가 그 사람 뒤로 쫓아왔고, 조모와 어머니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보고는 급히 설명했다.

“조모님, 어머니, 용흔이 굳이 와서 정미를 만나야겠다고 해서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

용흔은 선명한 자포(紫袍)를 입고 있어 도도한 분위기가 났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단 노부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외조모님, 정미 여기 없습니까?”

단 노부인이 막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칸막이 방에서 갑자기 사람이 뛰쳐나왔다.

“세자, 제발 소인을 살려주세요―”

“반반, 네가 왜 여기 있느냐?”

한지가 깜짝 놀라 물었다.

반반은 멍청한 자가 아니었다. 방 안에 경왕세손이 있는 것을 보자 그녀는 감히 회임했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고, 그저 한지의 다리를 꽉 붙잡고 울었다.

도 씨가 외쳤다.

“여봐라, 어서 반반을 데리고 나가거라!”

두 여종이 다가와 반반을 끌고 가려 하자, 한지가 막아섰다.

“조모님, 어머니, 반반은 저의 시종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저도 알아야 하지요.”

도 씨는 용흔을 한 번 훑어보더니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세손, 정미는 일찍이 백부로 돌아갔다. 정미를 찾고 싶어도 여기 없으니, 차라리 한평과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다 가렴.”

“아, 외조모님, 큰숙모님,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용흔은 시원스럽게 대답하고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찾아 방 안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은 당연히 즐겁게 구경해야지.’

“조모님, 어머니, 용흔이 갔으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제게 알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못된 녀석, 다 네가 저지른 일 때문 아니냐!”

도 씨가 가슴을 부여잡고 화를 내자, 한지는 망연히 반반을 한 번 쳐다봤다.

반반은 엉엉 울고 있었고 우는 모습마저 아름답게 보였다.

“저는 반반이 평소 규율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두 분을 화나게 한 겁니까?”

“규율?”

도 씨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더니 이내 차갑게 웃었다.

“규율을 잘 지키는 통방이, 도련님이 혼인도 하기 전에 회임을 한단 말이냐?”

“예?”

한지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반반을 쳐다봤다.

“반반, 어머니의 말씀이 사실이냐? 네, 네가 정말 회임을 하였다고?”

반반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들었다.

“소인도 언제 회임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 이미 삼 개월이나 되었는데, 만약 낙태한다면 제 목숨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제발 아이를 살려주세요―”

한지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아주 당황한 채로 물었다.

“어머니, 반반 배 속의 아이를 없애실 생각이십니까?”

도 씨가 반반을 매섭게 노려보며 웃었다.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지야, 넌 위국공부의 세자다. 규율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겠지. 통방이 정처보다 빨리 아이를 낳는다면, 네 아내에게도 큰 창피가 아니겠니? 만약 이 아이를 살린다면, 여인 쪽에서 퇴혼할 가능성도 있다. 그럼 위국공부와 네 체면이 어찌 되겠느냐?”

‘퇴혼?’

한지의 가슴이 철렁하더니,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동안 계속 조 시랑 집안과의 혼사를 무를 방법을 아무리 찾아도 떠오르지 않았지. 만약 조가에서 내 통방이 회임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아이를 낳게 할 거라는 것도 알게 되면, 혹시―’

한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만약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한지도 자신의 오점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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