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생각
“설 형님, 왜 저를 빤히 쳐다보시는 거예요?”
설융은 경복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셋째 아가씨는 제가 본 의원 중 가장 대단한 신의이십니다. 어쩐지 선인들께서 ‘불위양상(*不爲良相: 어진 재상이 되지 않으면), 편위양의(*便爲良醫: 훌륭한 의사가 되리라)’라는 말을 하시더라니, 방금 아가씨께선 맹 나리 한 사람을 구했지만, 사실은 그의 집안을 구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정미가 눈을 부라렸다.
“별거 아닌데요. 저보다 대단한 의원은 아주 많아요.”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정미는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설융 이 멍청한 서생도 가끔은 말을 잘하는구나.’
“셋째 아가씨!”
그때 설융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정미는 어리둥절했다.
“왜 그러세요?”
“만약 제가 3년 뒤에도 합격하지 못하면, 아가씨를 스승으로 삼아 의술을 배울 수 있을까요?”
정미의 눈이 휘둥그레지다가, 한 마디를 남기고 뒤돌아 나가버렸다.
“제게 빚진 은이나 갚고 말하세요.”
* * *
최근 정미는 제생당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오후에 덕소 장공주부에서 승마와 궁술을 배운 뒤에도 다시 제생당에 돌아왔고,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했다.
하지만 시험 전날이 되자, 결국 참지 못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 식사를 한 후, 비서거에 등불을 켜자 방 안이 환해졌다.
정미는 등 아래에서 치아로 실을 끊고는 새하얀 덧신을 수없이 어루만졌다.
화미가 방긋 웃었다.
“아가씨, 이 덧신은 둘째 공자님께 드리는 거지요? 바느질이 저번보다 더 촘촘해지셨어요.”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정말이에요. 이렇게 촘촘한 바느질이라니. 가선까지 두르셨으니 신었을 때 분명 편할 거예요. 둘째 공자께서 아가씨가 만든 덧신을 신으시면, 분명 장원에 급제하실 겁니다.”
“그래?”
정미는 계속 망설였다. 이 덧신을 선물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정철이 자신을 미워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 덧신을 줬을 때 차가운 눈빛을 받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화미의 말을 들으니 또 마음이 흔들렸다.
‘저번에 내가 만든 덧신이 좋다고 했는걸. 오라버니가 편하게 신을 수 있고, 시험을 잘 볼 수만 있다면, 또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가치가 있겠지.’
“그럼…… 주러 가자.”
화미가 맑게 웃었다.
“예, 소인이 등을 들어드릴게요.”
화미는 환안보다 세심했기에 최근 정미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둘째 공자와 대화를 나누고 오면 좋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 필요 없어.”
정미가 덧신을 화미에게 건넸다.
“네가 둘째 오라버니한테 갖다 주면 돼.”
“아가씨―”
정미가 급히 핑계를 댔다.
“내가 가면 참지 못하고 오라버니와 잡담을 나누려 할 테니까, 복습하는 데 방해가 될 거야. 그러니까 네가 덧신을 가져다주고 얼른 돌아와.”
그 말에 설득당한 화미는 덧신을 건네받고 손수건으로 꼼꼼히 감싼 뒤, 등을 들고 장청원으로 향했다.
* * *
장청원에선 대나무 그림자가 흔들렸고, 등불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철은 서책을 책상에 두고도 저도 모르게 창밖을 쳐다보다가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 안절부절못한 마음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었기에 절로 자신이 미워졌다.
‘차가운 말로 미미와 거리를 둔 건 나면서, 왜 이런 기대감을 가지는 거야?’
정철은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 거리감을 깨트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오라버니고,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이미 무거운 죄다. 만약 미미가 제멋대로 굴게 두어 잘못된 길로 이끈다면, 더욱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짓게 될 거야.’
정철이 멍하니 생각에 잠긴 사이, 문밖에서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째 오라버니, 들어가도 돼?”
정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둘째 오라버니?”
문밖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철은 차분함을 되찾고 담담하게 말했다.
“넷째 여동생이구나. 들어와.”
문이 열리고 정동이 걸어들어왔다.
정동은 장청원에 자주 오지 않았기에 다소 어색해하면서도 정철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오라버니, 내일이 시험이니 내가 직접 덧신을 만들었어. 앞길이 순조롭기를 바랄게.”
정철은 정동에게 늘 다정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태도는 온화했다. 그는 정동의 덧신을 건네받고는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정동은 작게 한숨을 돌린 뒤, 몰래 손수건을 매만지며 물었다.
“오라버니, 셋째 언니는 뭘 줬어?”
정철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신발이나 덧신 같은 것들이지.”
정동은 짜증이 난 듯 손수건을 잡아당겼다.
정미도 덧신을 선물했다면, 정철은 분명 정미가 준 것을 신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동은 눈을 한 번 굴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두 달 전의 시험 날에도 셋째 언니가 만든 덧신을 신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정미의 덧신을 신고 정미를 지키려다가 시험을 놓치게 되었으니, 탐탁지 않겠지?’
정철은 눈치가 빨랐기에 정동의 생각을 알아채고 옅게 웃었다.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신발이랑 백모님께서 만들어주신 신발 밑창도 신고 갔었지.”
정동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늦었다. 일찍 돌아가렴.”
정철이 이리 말하자 정동은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었다.
정동은 장청원의 입구를 나왔을 때, 화미와 마주쳤다.
“넷째 아가씨를 뵙습니다.”
화미가 두 손을 모으고 인사하자, 정동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화미?”
“예, 소인입니다.”
“왜 여기 왔어?”
화미가 대답했다.
“저희 아가씨께서 둘째 공자께 선물을 전해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아, 그래?”
정동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여종은 정직하지 않구나. 분명 둘째 오라버니가 방금 정미에게 이미 선물을 받았다고 말했거늘, 또 선물을 보내왔다고? 설마 정미가 선물을 전해준다는 핑계로 둘째 오라버니를 꼬시려는 거 아냐?’
정동은 이 생각이 들자, 화미를 날카롭게 한 번 쏘아보고는 떠나갔다.
화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정동의 뒷모습에 몰래 눈을 부라리고는 다시 장청원으로 들어갔다.
팔근이 보이지 않아, 화미는 곧바로 문 앞으로 가 외쳤다.
“둘째 공자님, 화미입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소인에게 선물을 전해주라고 명하셨어요.”
곧바로 문이 열렸다.
달빛 아래, 화미는 눈앞의 둘째 공자가 달님처럼 아름답게 느껴져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화미가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정철은 화미를 방 안에 들이지 않고 한참을 침묵하다가 물었다.
“셋째 아가씨가 무얼 보냈느냐?”
“덧신입니다.”
화미는 몰래 한숨을 돌리며 급히 손수건으로 포장한 덧신을 건넸다.
정철이 그것을 건네받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너희 아가씨는…… 요즘 어떠하더냐?”
화미가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화미의 기억 속 아가씨와 둘째 공자는 아주 친했고, 아가씨는 어떤 일이든 둘째 공자님께 말하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둘째 공자가 이런 말을 물으니 이상하다고 느꼈다.
정철은 정미 앞이 아니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담담하게 말했다.
“최근 매일 시험 준비만 하느라, 너희 아가씨를 보지 못했다.”
화미는 그제야 이해했다.
아가씨와 둘째 공자는 평소에도 아주 친했으니, 화미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가씨께선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셔요.”
“음, 그럼 식사는 잘하고 있느냐? 잠은 잘 자고 있고?”
“식사는 괜찮은데, 최근 저희가 밤에 곁을 못 지키게 하셔서, 잘 주무시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자주 멍하니 계신 걸로 봐선, 고민거리가 있으신 것 같아요.”
화미가 가볍게 한숨 쉬었다.
“둘째 공자님, 늘 저희 아가씨를 아껴주셨으니, 시험이 끝나면 아가씨를 좀 위로해주세요. 소인은 이러다 아가씨가 앓아누우실까 두려워요.”
정철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만 돌아가거라.”
“예,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잠깐.”
정철이 화미를 불러세웠다.
“돌아간 뒤 너희 아가씨가 여쭈시면, 내가 몸을 잘 챙기라 했다고 전하거라. 다른 말은 하지 말고.”
화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화미가 떠난 뒤, 정철은 방으로 돌아가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열어보았다. 새하얀 덧신이 드러났다.
정철은 저도 모르게 촘촘한 바늘땀을 쓰다듬었다. 소녀의 부드러운 손끝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철은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덧신을 잘 접어서 품에 넣었다.
* * *
정미는 안절부절못하다가, 화미가 돌아오자 어서 맞이했다.
“아가씨?”
화미가 의아해하자, 정미는 정색하며 돌아가 자리에 앉았고 무심한 척 물었다.
“왔구나. 덧신은 둘째 공자께 잘 전해주었니?”
“예, 전해드렸습니다.”
화미는 더욱 의아했다.
‘아가씨는 왜 이런 걸 여쭈시는 거지?’
“둘째 오라버니가 아무 말도 안 했어?”
정미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주먹은 꽉 쥔 채였다.
“아가씨께 몸을 잘 챙기라 전하셨어요.”
“그게 다야?”
정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화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정미는 힘이 빠져 손을 내저었다.
“됐다, 물러나거라.”
‘오라버니는 분명 화미를 통해 내게 알려준 거야. 앞으론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돌봐야 하니, 다신 찾아와서 방해하지 말라고.’
* * *
다음 날 아침, 정미는 배웅을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 몰래 나무 뒤에 숨어서 정철이 집안어른들에게 인사 올리는 걸 보았고, 아침 햇살을 맞으며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가 그 뒷모습마저도 사라지자 눈시울을 붉히며 조용히 돌아갔다.
세 차례의 시험이 끝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5월이 되어 날씨가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정철의 혼사는 아직 소식이 없었지만, 왕 씨가 서가복을 데리고 백부에 오는 횟수는 눈에 띄게 늘었다.
정미는 마음이 답답했다. 이 혼사를 막고 싶었지만, 야단법석을 떠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한 씨를 더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한 씨가 서가와 혼사를 논할 준비를 하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를 막을 수단을 쓸 생각이었다.
정미는 도저히 다른 사내와 사랑의 도피를 한 적이 있는 여인을 올케언니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미는 정철이라면 이 세상 최고의 여인과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미가 나쁜 짓을 저지를 기회를 기다리기도 전에, 5월 초닷새가 다가왔다.
관례대로라면, 이날엔 친하게 지내는 집안사람들에게 종자(*粽子: 종쯔. 대나뭇잎을 접어서 그 안에 쫀득한 찹쌀밥을 넣고 대추 또는 돼지고기 등 소를 넣어 실로 감싸 쪄낸 음식)를 선물했다. 특히 친정으로는 딸이 직접 가서 선물하고, 만약 딸의 자식들이 다 컸다면 그 자식들을 대신 보내곤 했다.
하필이면 이날은 경왕세손 용흔의 소성년식 날이기도 했기에, 한 씨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정미를 데리고 위국공부에 먼저 갔다가 친정 사람들과 함께 경왕부로 가려 했다.
하지만 정미는 죽어도 가기 싫어했다.
한 씨는 화가 나 욕을 퍼부었다.
“이 망할 계집, 요즘 계속 얼굴이 어둡더라니. 오늘은 또 무슨 말썽이냐?”
정미가 어찌 굽힐 수 있겠는가.
‘용흔 그 망나니는 내가 춘화를 봤다는 걸 비웃은 것뿐만 아니라, 나를 모욕하기까지 했으니 평생 그를 보고 싶지 않다고!’
어머니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정미는 어쩔 수 없이 핑계를 댔다.
“어머니, 저는 용흔과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오늘은 용흔의 소성년식 날이고, 손님들은 다 국척 아니면 황가의 친척일 텐데, 제가 용흔과 말다툼을 벌이면 화를 초래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가지 않을래요. 저 하나 안 간다고 그리 중요하지 않잖아요.”
한 씨는 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그래, 하지만 국공부에는 가야 한다. 우리가 모두 경왕부로 가면, 네가 외조모님을 모시고 있으면 되겠구나.”
정미는 당연히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