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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184화 (184/375)

184화. 가관(加冠)

그저 친한 친우들만 부르는 소성년식과는 달리, 가관식은 성대하고 시끌벅적할수록 좋았다.

정철의 가관식 날, 회인백부는 온통 새 단장을 하여 대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 중 신분이 가장 귀한 사람은 덕소 장공주와 그의 부군이자 정철의 은사인 고 선생이었다.

정미 등 아직 시집가지 않은 여인도 가관식에 참가할 수는 있었지만, 눈에 띄지 않는 뒷자리에 앉아야 했다.

정미도 외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주변은 족인(族人)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마침 당숙모 곽 씨에게 붙잡혔기에 아주 짜증이 났다.

“미야, 오늘은 오라버니의 좋은 날인데, 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니?”

정미는 찻잔을 꽉 쥐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오라버니의 가관식이잖아요. 제가 얼마나 기쁜데요.”

곽 씨가 말을 이었다.

“그럼 미가 철이 든 게로구나. 이리 침착하다니. 영이는 한참 모자라.”

옆에 있던 정영이 이를 듣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제 어디가 침착하지 못한데요?”

그러고는 정미에게 도발하듯 그녀를 흘끗 흘겨봤다.

“그래, 그래. 너도 철들었다. 너도 이렇게나 컸는데, 네가 좋은 집에 가기만 하면 하늘에 감사할 일이지.”

정미가 은근히 눈살을 찌푸리자, 역시나 곽 씨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

“네 혼사는 정해졌니?”

정미는 곽 씨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자리에서 불쾌한 기색을 하며 자리를 뜰 순 없었기에 간결하게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아직 제가 어리다고 하셔서요.”

“그것도 그렇지. 미가 우리 영이보다 몇 개월은 어리니까. 하지만 네 둘째 오라버니는 가관 뒤엔 스무 살이 다 되는데, 아직도 혼사를 정하지 않은 게냐?”

정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가 어떤 처를 들이든, 당숙모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야? 왜 이 이야기를 놓지 않는 건지.’

“어머니께서 어찌 오라버니의 혼사를 제게 말씀하시겠어요.”

곽 씨가 더 물으려고 하자, 정영이 막았다.

“어머니, 물어 봤자예요. 열셋째 오라버니의 혼사를 정미와 상의할 리 없잖아요.”

정미는 화가 났다.

‘혼사, 혼사, 이놈의 혼사 얘기! 이 두 모녀는 왜 이렇게 짜증 나는 거야. 입만 열면 둘째 오라버니의 혼사 얘기만 하고!’

정미가 결국 참지 못하고 되받았다.

“그래요, 둘째 오라버니의 혼사는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계획하시는 거지, 다른 사람이 어찌 끼어들 수 있겠어요.”

그 말에 정영의 말문이 막혔고, 곽 씨는 더욱 멋쩍어했다.

이때 마침 손님들 사이에 소란이 일어났는데, 다름 아닌 남안왕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남안왕은 사람들에게 빼곡히 둘러싸여 들어오고 있었고, 길을 안내하는 시종이 공손하게 그를 덕소 장공주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남안왕의 옆에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 하나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 여인은 늘씬한 몸매에 아름답고 긴 눈썹을 가지고 있었다. 눈빛에서는 농염한 위풍이 묻어나왔다. 풍채와 부귀가 흘러넘치는 남안왕과 함께 걸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술렁였다.

“저 두 사람은 누구지.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장공주 쪽으로 갔잖아. 황가의 친척이나 국척(*國戚: 임금의 친척)일지도 모르지.”

앞쪽에 앉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예를 갖추자 더 많은 사람들이 수군댔다.

“쩝, 이 집 공자도 아주 대단하구만. 가관식에 장공주는 물론이고, 왕야와 대공주(大公主)까지 오다니, 이런 성대한 가관식은 한 번도 본 적 없어.”

“이것도 백부의 능력이지. 백부엔 태자비마마가 계시잖아. 태자비의 동생이 가관식을 하는데, 황가에서 사람이 안 올 리가 있나.”

“어찌 되었든 간에, 가관식에 이렇게 체면이 서다니. 이번 생은 잘 살았군.”

곽 씨는 득의만만해져 고개를 돌려 정영에게 말했다.

“봐라, 네 오라버니가 능력이 있다 했지.”

정미는 입을 삐죽이다가 갑자기 누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용흔이 있었다.

“정미, 나랑 저기 가서 앉자.”

하지만 정미는 용흔의 손을 쳐냈다.

“안 가요!”

“가자, 너랑 상의할 일이 있으니.”

정미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용흔의 모습을 보니, 그 사동이 용흔에게 환안과 춘화를 쟁탈한 일을 알리지 않았나 보구나. 그렇다면 그냥 용흔을 따라가서 거기 앉으면 되겠어. 그럼 당숙모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테니.’

결국 정미는 일어나 용흔을 따라갔다.

용흔의 자리는 원래 앞쪽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미를 그쪽으로 데리고 가지 않고 더 외진 자리를 골라 앉고는 산사고(*山楂糕: 산사자의 씨를 제거한 후 가루로 만들어 설탕과 전분을 넣어 끓여서 굳힌 간식)를 하나 건넸다.

‘아무 이유 없이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사람은 분명 사기꾼 아님 도둑인데…….’

정미는 산사고를 손에 쥐고 한입 베어 물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용흔이 가까이 다가와 활짝 웃었다.

“정미, 네 여종이 뺏어간 그 춘화 말이다. 나한테 빌려줘.”

그 말에 정미는 한참 동안 굳어버렸다.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손을 들어 한입 베어 물었던 산사고를 용흔의 얼굴에 던진 뒤 고개를 돌려 달아났다.

용흔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손을 뻗어 얼굴을 닦았고, 저도 모르게 얼굴에 묻은 산사고 가루를 핥아먹고는 생각했다.

‘엄청 시네. 못난 계집이 그래서 나한테 던진 건 아니겠지? 이 못난 계집은 왜 성질이 갈수록 고약해지는 거람. 안 되겠어. 이러다가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제 사내를 때리는 여인은 안 되지.’

작은 패왕은 스스로 자신을 정미의 사내에 대입했고, 생각할수록 화가 나 어두운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찾으러 가야겠어. 찾고 나서 자빠트린 뒤 엉덩이를 두어 번 때려줘야겠다고!’

한편, 사람들은 정미의 부재를 신경 쓰지 않았고 저 앞에 멀리 있던 정철만 멀리서 흘겨보더니, 문 어귀에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연두색 뒷모습을 보고 힘없이 웃었다.

‘미미는 내 가관식도 보기 싫은 건가? 확실히 그날 밤 미미의 체면을 구겼나 보구나.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정미를 더 멀리 밀어내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어. ’

정철은 눈을 내리깔았다가, 그녀를 쫓아가는 어떤 사내의 뒷모습에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뒷모습도 정철에겐 익숙했다. 경왕세손 용흔이었다.

“철아.”

정철이 정신이 들어 둘째 나리를 쳐다봤다.

둘째 나리가 의기양양하게 정철의 어깨를 토닥이며 모처럼 아버지의 자애로움을 드러냈다.

“가서 잔을 받자자꾸나.”

정철이 한 상씩 잔을 돌리고 마시며 남안왕 쪽에 가서 한잔 들이켰을 때, 대공주가 술주전자를 들고 활짝 웃었다.

“둘째 공자, 오늘은 네가 가관하는 날이니, 본공주가 한 잔 따라주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직접 정철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정철은 급히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공손하게 말했다.

“황송합니다. 직접 따라 마시겠습니다.”

대공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둘째 공자는 내 고모부의 제자이고, 내 올케의 오라버니이지. 따지자면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이리 서먹하게 구는가.”

정철은 더 이상 사양할 수 없어 대공주가 잔을 가득 따르게 두었다.

옆에 있던 한 씨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대공주의 신분이 존귀하긴 했지만, 어쨌든 과부로 살고 있기에 원칙대로라면 이런 곳에 와선 안 되는 것이었다.

한 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큰일이다. 대공주가 면수(*面首: 귀부인들의 노리개 노릇을 하던 준수한 남자)를 기른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일이야. 수도에 모르는 집안이 없지. 대공주가 설마, 내 아들이 마음에 든 건 아니겠지?’

한 씨는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유심히 보아도 대공주의 눈빛이 이글거리며 정철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가도 그녀는 곁눈질로 다른 사람을 훑어보고는 곧바로 냉엄하고 고귀한 모습을 되찾았다.

한 씨는 속으로 몇 번이나 큰일이라고 외치고는 계속 잔을 돌려야 된다는 핑계를 대고 급히 정철을 끌고 갔다.

둘째 나리의 동방(*同榜: 같은 회차에 과거에 함께 급제한 사람) 친우인 서 나리의 자리로 갔을 때, 한 씨는 왕 씨의 곁에 기대어있는 서가복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 아가씨는 성정이 좀 자유분방하긴 하지만, 면수를 키우는 대공주보단 낫지!’

“정가 둘째 오라버니, 이건 제가 직접 만든 선물이에요. 가관을 축하드립니다.”

서가복은 보통 아가씨들처럼 수줍어하지 않고 시원스럽게 선물을 건넸다.

정철이 그것을 건네받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서가 아가씨.”

한 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왕 씨가 떠보듯 말했다.

“가복, 어서 둘째 공자께 한 잔 드리지 않고.”

서가복이 술잔을 들고 술을 권해도 한 씨가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왕 씨는 속으로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생겼다.

정철이 자리를 옮겼을 때, 왕 씨가 조용히 서가복에게 말했다.

“오늘 한 부인이 너를 대하는 태도가 꽤 좋구나.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겠어.”

서가복은 희색이 만면하여 재빨리 먼 곳의 대공주를 한 번 흘겨보고는 작게 웃었다.

“당연하지요. 제가 아무리 별로라도, 면수는 키우지 않으니까요.”

“가복!”

왕 씨가 젓가락으로 서가복의 손등을 한 번 치고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 계집, 못하는 말이 없구나. 누가 그 말을 들으면 어쩌려고!”

“그럴 일 없어요.”

서가복은 혀를 내두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 * *

정미는 대청을 나섰다. 그녀는 용흔과 아주 멀리 떨어지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둘째 오라버니의 가관식을 놓치기엔 아쉬웠다. 그래서 몰래 뒤쪽으로 돌아간 뒤 병풍 너머로 안을 들여다봤다.

정미는 대공주가 오라버니에게 은근히 추파를 던지고, 서가복이 달콤하게 웃는 걸 보며 손수건을 꽉 쥐었다. 시선으로는 계속 정철의 모습을 쫓았다.

‘오라버니 이 바보. 저 사람들이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부드럽게 웃어주다니.’

그때,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정미의 어깨를 한 번 쳤다.

정미는 휙 뒤돌아선 뒤, 용흔이 보이자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번엔 용흔이 한발 앞서 한 손으로는 정미를 끌어당겼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입을 막은 채 밖으로 나갔다.

정미가 몇 번 ‘읍읍’하고 소리를 지르자, 용흔이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

“못난 계집, 한 번만 더 소리를 냈다간 모두의 앞에서 네 치마를 벗길 것이야!”

정미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화가 나 온몸이 떨렸지만, 감히 지금 용흔에게 맞설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잘 아는 사이였고, 만날 때마다 말다툼을 하거나 싸우곤 했다. 정미는 작은 패왕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는 한다면 무슨 짓이든 하는 자였기에, 정말 치마를 벗겨버린다면 정미는 아주 큰 창피를 당할 것이었다.

용흔은 정미를 외지고 아무도 없는 담 모퉁이까지 끌고 가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정미가 그를 걷어찼다.

“용흔, 이 망나니 같은 게!”

용흔이 화가 나 펄쩍 뛰었다.

“못난 계집, 누가 망나니라는 게냐. 갑자기 사람 얼굴에 간식을 던진 게 누군데? 맡아봐, 맡아보라고. 내 얼굴에 아직도 산사자 냄새가 난단 말이다!”

용흔이 얼굴을 정미에게 아주 가까이 갔다댔다.

정미가 눈을 부라렸다.

“그거 참 쌤통이네요!”

‘이렇게 못된 사람은 본 적도 없어. 환안이 춘화를 빼앗아간 게 뭐 어때서 내게 대놓고 까발리는 거야. 조금의 체면도 살려 주지 않다니. 정말 미워죽겠네!’

용흔은 몹시 분노했고, 정미가 조금도 굽히지 않자 더욱 화가 나 매섭게 말했다.

“정미, 간이 부었구나. 내 얼굴에 뭔갈 던지다니. 이러다 나중엔 내 머리끝까지 기어오르겠어!”

정미는 이 말이 뜬금없다고 느꼈고 곧바로 반박했다.

“나중은 무슨 나중. 제가 그리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뭐하러 당신을 성가시게 하겠어요.”

“어찌 성가시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나중에 내 아내가 될 텐데!”

용흔이 엉겁결에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정미가 멍해졌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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