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83화 (183/375)

183화. 일이 발생하다

다음 날은 날씨가 좋았다. 아침 햇살이 창 너머를 따뜻하게 비추었다.

정미는 맑은 물로 세수를 한 뒤,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을 눈에 올렸다.

“아가씨, 그냥 오늘은 제생당에 가지 마시고 더 주무세요.”

환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제생당에 가는 건 내 일이야.”

정미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눈이 조금 부어있지 않았다면, 어젯밤 내내 울었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씨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갔을 땐 눈도 거의 다 가라앉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조금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최소한 한 씨는 이를 알아채지 못해서 정미에게 당부했다.

“점심엔 돌아와서 식사를 하렴. 갈수록 살이 빠지는구나.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 아니니?”

정미는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평소보다 적게 먹지도 않아요. 키가 컸나 보죠.”

한 씨는 정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키가 큰다고 해도 이렇게 살이 빠져선 안 돼. 내가 네 나이 땐 너보다 키가 빨리 컸는데도 말라보이지 않았다고.”

한 씨는 갑자기 감회가 새로운 듯 중얼거렸다.

“눈 깜짝할 새 이렇게 컸구나.”

‘그 해’도 춘시가 있는 해였다. 그때 한 씨는 눈앞의 소녀보다 두 살도 많지 않은 나이였고, 온 마음을 그 사람에게 빼앗겨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한 씨는 눈살을 찌푸리며 정미를 쳐다보았다.

“미야, 무슨 고민거리가 있는 것 아니니?”

“없어요!”

정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자, 한 씨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정미는 마음을 가다듬고 담담하게 말했다.

“부적을 배우는 데 체력을 너무 많이 써서 살이 빠졌나 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자 한 씨가 안심하며 웃었다.

“쉬어가면서 해야 한다. 몸을 해쳐선 안 돼. 앞으로 날씨도 점점 따뜻해지니, 둘째 오라버니와 자주 놀러 나가렴.”

정미는 소매 속의 손을 꽉 쥐고 억지로 웃었다.

“오라버니도 오라버니의 일로 바쁜걸요. 나들이를 가고 싶으면 추화 언니나 조 언니와 약속을 잡을게요. 어머니께서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돼요.”

문안 인사를 올린 후, 정미는 도망치듯 회인백부에서 나와 제생당으로 갔다. 그녀는 그제야 조금 안정되었다.

‘상심과 막연함은 잠시 한 쪽에 밀어두어야 해. 부의 공부는 절대 지체되어선 안 되니까…….’

정미는 잡념을 제쳐두고 진료를 보러 온 두 부인을 응대했다.

진료를 한참 보던 중 사철이 왔다.

“사철 오라버니, 사효의 얼굴은 오늘 어때?”

사철이 홀가분한 웃음을 지었다.

“정미의 예측이 맞았어. 오늘 아침에 보니 얼굴의 여드름이 대부분 없어졌더라고.”

정미는 절로 미소 지었다.

원래는 그저 주사로 부적을 만드는 것도 효과가 있을지 시도해보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니, 정혈을 사용하지 않으면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긴 하지만 그래도 쓸모는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 결론을 얻자, 정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다.

‘아혜는 내게 한 번도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어. 내게 부적을 가르쳐준 뒤로 선혈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만 여러 번 강조했지. 주사로 만든 부적의 효과가 좋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마음이 있는 걸까?’

이 의혹이 들자, 정미는 부술 연구에 더욱 신경을 썼고 덕소 장공주부에 갈 때 빼고는 대부분 제생당에 틀어박혀 바깥일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제생당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난 뒤에야 정미는 큰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 * *

설융은 몸을 숙이고 평상 위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리 아래의 옷은 온통 짙은 갈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정미는 지혈생기부를 셋째 숙부님께 건네고는 급히 나왔고, 바깥에 서 있는 팔근의 곁으로 걸어가서 물었다.

“네가 사람을 데리고 온 것이냐?”

팔근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인이 마침 이 거인 나리를 마주쳐서 겸사겸사 데리고 왔습니다.”

“무슨 일이야? 설마 또 누굴 건든 것이냐?”

정미는 설융이 정말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를 볼 때마다 부상이 더 심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팔근이 잠시 망설이자, 정미가 차갑게 말했다.

“다친 부위를 보니, 곤장을 맞은 것 같더군. 이런 경우는 보통 사형(*私刑: 국가 또는 공공의 권력이나 법률에 의하지 않고 사인(私人)이나 사적 단체가 함부로 하는 제재)이 아니야. 팔근, 만약 저 사람이 형법을 위반했다면, 네가 여기로 데려왔을 때 그 뒷일은 생각한 것이냐?”

팔근이 급히 대답했다.

“셋째 아가씨, 오해 마세요. 사실은…….”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어쨌든 이 일도 이미 소문이 퍼졌으니, 소인이 쓸데없는 얘길 하는 건 아니겠지요.”

팔근의 생생한 설명에, 정미는 일의 경위를 대강 이해하게 되었다.

설융은 이틀 전 등문고(*登聞鼓: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에 달았던 북)를 울렸고, 이번에 급제한 능광현의 최자겸을 신고했다. 향시와 회시에 대리시험으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이전부터 이와 같은 폭로가 있을 것을 두려워했던 최자겸은 회시 전날 밤거리의 건달을 고용해 설융의 오른손을 다치게 했었고, 그럼에도 설융이 회시를 보러 오자 한밤중에 강도를 보내 그의 여동생을 능욕하게 했다. 그 후 설융의 여동생은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동시에 같은 현 출신인 정조화(鄭兆和)가 신발 깔창 아래 쪽지를 숨겼다고 모함했고, 정조화는 분노하며 벽에 부딪혀 자살하고 말았다.

정미는 얘기를 한참 곱씹고 나서야 물었다.

“그럼 설융은 어쩌다 다친 것이냐?”

“등문고를 울릴 때 맞은 것입니다.”

팔근은 방문 입구를 한 번 쳐다보았다. 눈빛에 동정심이 묻어나왔다.

“소인이 공자께서 하신 말씀을 들은 적 있습니다. 이건 우리 당조의 규칙인데, 등문고를 울리면 곧바로 황상에게까지 알릴 수 있지만,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등문고를 울린 사람은 우선 곤장 서른 대를 맞아야 한다고요. 만약 공명(功名)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선 그 공명을 없앤 후 얘기를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설 나리도 지금은 거인 신분이 아니지요. 아니, 수재(*秀才: 과거 시험 중 첫 관문을 통과한 급제자)조차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설융은 정말 운이 없군. 그럼 이틀 전에 등문고를 울려 맞은 거라면, 왜 지금에서야 의관에 온 거지?”

팔근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소인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셋째 아가씨. 소인이 감히 설 나리를 저희 의관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도 성가신 일이 없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은 큰 사건이고, 요 이틀 동안 이미 소문이 다 퍼져 이번 시험을 주관하는 예부시랑(礼部侍郎)부터 능광현 현령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옥에 들어갔고요. 소인이 듣기로는, 사건이 종결되고 나면 이번 춘시는 무효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던데요.”

정미는 가슴이 철렁하여 주위를 둘러보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자 조용히 말했다.

“팔근, 설융을 제생당에 데리고 온 건 둘째 오라버니의 뜻이지?”

“예?”

팔근은 눈을 깜빡이며 시치미를 뗐다.

정미는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고 작게 말했다.

“됐다, 안 물으마. 하여튼 최자겸이 벌을 받는 게 가장 좋은 결과겠구나.”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마음속에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융이 최자겸을 신고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에 둘째 오라버니의 도움이 없었을 리 없어.’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나가기 일보 직전인 우둔한 거자가 그런 증거를 어떻게 얻을 수 있었겠는가.

‘어쩐지 최근 팔근이 보이지 않더라니, 오라버니가 일을 시킨 거였구나.’

정미는 정철을 떠올리자 마음이 달달해졌다.

‘역시, 오라버니는 늘 계획이 있다니까. 설융과 마주쳤을 때부터 차근차근 모든 걸 계획해놓았을 거야. 심지어 그때 다시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도 예상했겠지. 아쉽게도 예전이었다면 내 고민거리도 그렇게 해결해주었겠지만, 앞으론 나를 사갈(*蛇蝎: 뱀과 전갈.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처럼 피해 다닐 거야.’

이 생각이 들자, 마음속 달달함은 모두 아픔으로 변해버렸고, 정미는 팔근도 더는 볼 수 없어 치맛자락을 들고 급히 자리를 떴다.

* * *

정미의 추측한 대로 이 사건은 신속하게 해결되었다.

최자겸은 즉각 참수형에 처해졌고, 능광현의 현령과 현승 등 관련자들은 추후에 참형에 처하기로 했다. 이번 시험을 주관한 예부시랑 방문영(方文英)은 3급이 강등되었으며, 이 일에 관련된 수십 명의 관리들에겐 각기 처벌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번 시험의 성적은 모두 폐기되었고, 4월 22일에 재시험을 보기로 결정되었다.

이 사건에 몇몇 가문들의 희비가 교차했다. 특히 사건에 연루된 관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정가의 둘째 나리는 요즘 길을 나설 때 발걸음이 아주 가벼웠고 기력도 왕성했다.

정요가 병으로 퇴혼했을 때, 그는 아버지로서 체면이 살지 않았다. 특히 최자겸이 행방에 이름 올린 뒤, 둘째 나리는 동료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웃음거리가 된 바였다. 모두들 그가 안목이 없다고, 손에 넣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진사 사위를 이렇게 잃었다고 비웃었다.

둘째 나리는 이 때문에 몹시 화가 나 있었는데, 뜻밖에도 며칠 사이에 상황이 뒤집히더니 지금은 모두가 그를 하늘의 도움을 받아 수렁에서 제때 벗어날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퇴혼했다면 이런 칭찬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까닭 없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한 것은 둘째치고, 그를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며 덕행이 없다고 욕했을 것이다.

둘째 나리는 자신이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그의 병마저도 다 나은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씨와 상의한 뒤 교외에서 정요를 다시 데려오려고 했다.

한 씨는 욕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물었다.

“나리,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둘째 나리는 기분이 좋아 눈빛이 많이 따뜻해져 있었다.

“예전엔 정요가 좋은 혼사를 망치고 많은 일들을 저지른 탓에 화가 났는데, 지금 다시 보니 운이었던 것 같소.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에서야 퇴혼을 했을 텐데 말이오. 교외 마을을 지키던 사람이 서신을 보내왔는데, 정요의 병은 천연두가 아니고 그저 발진이 난 것이라 하오. 지금은 이미 거의 다 나았다더군.”

한 씨는 화가 나서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결국 나리께선 지금 정요가 나리의 행운이라고 말씀하시는 건가?’

그녀는 그제야 정철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 천한 것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다면, 지금에서야 최자겸과 퇴혼했겠지. 그리고 퇴혼한 뒤, 나리가 만약 그 천한 것을 보물처럼 아낀다고 하더라도 한 번 퇴혼한 서녀가 좋은 집안에 시집가기는 어렵지 않았겠어?’

한 씨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역시 철이구나. 아무 말 없이 나와 정미를 위해 생각해주다니. 역시 이 아이를 양자로 들인 건 내가 한 일 중 가장 옳은 결정이었어.’

마음이 편안해져서인지, 늘 직설적이었던 한 씨도 좋은 생각이 떠올라 침착하게 말했다.

“나리, 정요는 백부에 있을 때 계속 아팠고, 나중엔 천연두에 걸린 거라 오해하기까지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백부에서 나간 뒤론 며칠 만에 괜찮아지고, 백부에는 경사가 끊이질 않았지요. 정요가 그곳에 계속 남아있으면, 백부에 복을 쌓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둘째 나리가 정요를 데리고 오려고 한 것은 그저 기쁜 와중에 갑자기 마음속에 실낱같은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연민은 아주 자그마한 것이었기에 한 씨의 말을 듣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거기서 잘 쉬도록 두지. 당신이 그쪽에 사람을 보내 음식과 물건을 좀 보내시오.”

“걱정 마세요, 나리.”

한 씨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 *

그렇게 며칠 지나지 않아, 정철의 가관식(*加冠式: 성년식인 관례를 치르며 관(冠)을 처음 쓰는 의식)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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