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82화 (182/375)

182화. 갈수록 어렵다

‘좁은 어깨와 얇은 허리, 아래에는 단단한 엉덩이가 튀어나와 있고, 그리고 기다랗게 뻗은 다리…….’

정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제 겨우 4월인데, 오라버니는 왜 밖에서 목욕을 하는 거람!’

정미는 아무 핑계를 떠올려 당황한 마음을 숨기려 했고, 발걸음을 떼 몰래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발아래에 뿌리라도 내린 것만 같아 마음속으로 한참 갈등하다가 결국 다시 고개를 내밀어보았다.

남녀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특정 시기에 ‘그런’ 호기심이 일기 마련이었다.

정미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엔 땀이 흥건했다. 하지만 눈빛은 귀신에 홀린 듯 등지고 있는 사람에게 꽂혔다.

‘이렇게 보니, 오라버니는 키가 좀 큰 것 외엔 나랑 별 차이 없는 것 같네. 아니, 그래도 좀 달라.’

달빛 아래 하얗게 빛나는 정철의 피부는 정미의 흰 피부와는 달랐다. 마치 차가운 옥처럼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튼튼하고 단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등에 생기는 매끈한 선은 힘을 불끈 솟게 했다.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핥았다.

“누구냐?”

정철은 빠르게 손을 들어 나뭇가지에 걸쳤던 겉옷을 몸에 걸쳤고,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물바가지를 무기처럼 들었다. 그러고는 몸도 돌리지 않고 정미가 있는 방향으로 물바가지를 던져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기에, 정미가 정신을 차렸을 땐 물바가지가 이미 자신의 눈앞에 와있었다. 정미는 그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물바가지는 어깨에 맞고 떨어졌다.

비명소리가 울렸다.

정철은 온몸이 경직되었다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비명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정철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물바가지에 맞아 머리가 어지러워 비틀거리던 정미가 그의 품에 안겼다.

“미미, 네가 왜 여깄어!”

정철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정미는 두 손으로 정철의 겉옷을 꽉 붙잡고 실낱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아파―”

정철은 화를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정미를 가로로 안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갔다.

안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겉옷만 걸치고 있었기에,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썰렁하게 느껴졌고, 혹시나 보이면 안 되는 게 품속의 사람에게 보일까 더욱 두려워진 정철은 속으로 확신했다.

‘이건 내 평생 걸을 길 중 가장 힘든 길이 될 거야!’

겨우 방으로 들어갔을 때, 차마 닦지도 못했던 찬물은 이미 식은땀으로 변해있었다. 정철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미를 평상 위에 놓고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어딜 맞았어?”

“어깨.”

정미가 가련하게 대답했다.

어깨라는 걸 들은 정철은 그나마 안심했고, 긴장이 풀리자 지금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눈 깜짝할 새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정철이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다시 정미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안색은 더욱 좋지 않아 보였다.

정미는 그런 오라버니의 표정은 처음 보았기에 몸을 움츠렸다. 정철이 갑자기 손을 뻗어오자 그녀는 곧바로 얼굴을 가렸다.

“오라버니, 때리지 마. 이, 일부러 그런 게 아냐―”

한참 뒤, 머리 위에서 정철의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어깨를 보려는 거야.”

정미는 그제야 무안한 듯 손을 떼고 조심스럽게 오라버니를 살폈다.

“오라버니, 나한테 화 안 났어?”

정철은 이마의 핏줄이 솟는 느낌이었다.

‘화났냐고? 내가 또 화를 안 냈다간, 앞으로 미미가 다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하지만 화를 내더라도 우선 다쳤는지 봐야지.’

정철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담담하게 말했다.

“우선 네가 다쳤는지 볼 거야.”

정철의 힘은 약하지 않았기에, 어깨를 맞았다고 해도 파랗게 멍이 들 수도 있었다. 때문에 정철은 우선 화낼 수 없었다.

“응.”

정미는 이렇게 넘어가는 줄 알고 정철이 손대기도 전에 얌전히 옷을 내리고 뽀얗고 둥근 어깨를 드러냈다.

어깨는 파랗게 멍들어있었고 심지어 핏물이 조금 배어 나오고 있었다. 새하얀 어깨에 푸른 멍이 드니 더욱 선명하고 아파 보였다.

정철이 벌떡 일어났다.

“연고 가져올게.”

정미의 입술이 꿈틀댔다. 그녀는 정철을 붙잡으려 하다가 다시 꾹 참았다.

‘오라버니가 화를 내지 않은 건 내가 다쳤기 때문이겠지? 내가 지혈생기부를 써서 상처를 금방 회복하면, 오라버니가 다시 화낼지도 몰라.’

정미는 자신의 기지를 속으로 뿌듯해했고 정철이 돌아와 그녀에게 약을 발라주는 걸 가만히 받기만 했다.

“으―”

따끔거리는 상처에 차가운 연고를 바르자, 정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너무 세게 발랐어? 그럼 조금 더 살살할게.”

정철은 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정미가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괜찮아. 오라버니가 발라주는 약은 하나도 안 아파.”

“가만히 있어.”

정철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정미의 상처를 쳐다보며 손끝으로 연녹색의 투명한 연고를 부드럽게 발랐다. 그런데 반쯤 발랐을 때, 그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정미가 어리둥절한 듯 그를 쳐다보자, 정철이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말했다.

“미미, 네게 지혈생기부라고, 상처에 바르면 곧바로 낫는 부수가 있는 거로 기억하는데?”

정미는 속으로 ‘쳇’하고 혀를 차고는 시치미를 뗐다.

“아, 맞다. 방금 너무 아파서 순간 잊어버렸네.”

정철은 어두운 표정으로 손을 거두었다.

“어서 발라!”

‘둘째 오라버니는 기억력이 너무 좋다니까.’

정미는 조용히 허리춤의 염낭에서 작은 도자기병을 꺼내 정철에게 건넸다.

정철은 두말없이 건네받고 병뚜껑을 열어 부수를 정미의 어깨에 쏟아부었다.

어깨의 멍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건들면 터질 것 같은 하얀 피부만 남았다.

정철은 어두운 얼굴로 정미의 옷을 잘 올려준 후,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말해, 왜 이 시간에 장청원에 온 거야? 뭘 봤어?”

정미는 제 입술을 핥았다. 머릿속에 달빛 아래의 미남이 목욕하는 그림이 스쳐 지나갔다.

정미는 정철의 몸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끼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못 봤어. 방금 왔는데 아무도 없더라고. 그런데 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니 궁금해서 가본 거야. 벽모퉁이로 갔을 때 갑자기 물바가지가 날아와서 내 어깨에 맞은 거라고. 오라버니, 씻고 있었던 거야? 그렇다고 쳐도 왜 함부로 물건을 던져?”

정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론 찾아왔을 때 꼭 말을 해. 실수로 널 다치게 할 수도 있잖아.”

“알겠어.”

정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정철의 목에 꽂혔다. 정철의 목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정미가 꾸짖었다.

“오라버니, 겨우 4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왜 밖에서 목욕을 해? 추워서 목도 빨개졌잖아.”

말을 마치자마자, 정철의 목에 있던 붉은 기가 빠르게 퍼져 두 뺨을 붉혔다.

정미의 의아한 눈빛에 정철은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어 손을 뻗어 정미를 잡아당겼다.

“됐어. 시간이 늦었으니 미미는 어서 돌아가.”

정미는 어깨에 지혈생기부를 쓰긴 했지만, 지혈생기부는 피부 외상만 치료할 수 있는 것이었고, 어깨에 물바가지를 맞아 지금은 반쪽 몸이 약간 저린 상태였다. 정철이 이렇게 잡아당기자 곧바로 통증이 느껴진 정미는 ‘아야’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평소였다면 정철도 이렇게 거칠게 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의 마음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정철은 그제야 정미의 몸 상태를 간과했음을 떠올렸고, 정미가 넘어지는 걸 보고 급히 손을 뻗어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정미가 넘어지면서 발로 정철의 뒷무릎을 걷어차고 말았다.

정철은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고, 두 사람은 위아래로 포개져 평상 위로 넘어졌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 사이 거리는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방금 목욕한 뒤의 청량한 숨결이 정미를 뒤덮었다.

정미는 그 숨결에 미혹되어 고개를 들었고 곧장 제 앵두 같은 입술로 지척에 있는 입술을 머금었다.

심지어 날로 차가워지고 말라가던 몸이 이 달콤하고 따뜻한 입술에 생기를 되찾은 느낌이 들어 편안해지기까지 했다.

갑자기 부드러운 무언가가 그녀의 이 사이에 들어오며 부드럽게 뒤엉켰다.

그 순간 정미는 속세의 것이 아닌 미묘함을 느껴 넋이 나갔다.

조용한 방 안에 약간의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그때 정미의 몸이 갑자기 가벼워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정철은 그녀를 등지고 창가에 서 있었다.

정미는 그제야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갑자기 표정이 변하더니 아무 말 없이 일어나 평상에서 내려오려 했고, 한 걸음씩 정철의 뒤로 다가가 큰 사고를 친 아이처럼 불쌍하게 ‘둘째 오라버니’하고 불렀다.

정철이 뒤돌아섰다. 얼굴은 투명할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있었고 조금의 웃음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정미를 쳐다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방금 왜 불렀어?”

정철이 이렇게 차가운 말투로 정미에게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정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꾹 다물다가 말했다.

“둘째 오라버니.”

정철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쌀쌀맞게 말했다.

“방금도 또 호기심 때문인 것이냐?”

정미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신이 아무리 제멋대로 굴고 무슨 심한 짓을 하더라도, 정철은 늘 자신의 손을 잡아줄 거라 믿었다.

이렇게 차가운 말투로 자신에게 말하는 날이 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난…….”

정미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

감히 자신의 욕망과 눈앞의 사람을 좋아해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함께 할 수 없고,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으니, 정미는 그저 둘째 오라버니의 관용만 믿고 가끔 이성을 내던지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정철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처음으로 눈앞의 소녀에게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로운 칼처럼 정미의 마음을 베었다.

“정미, 내가 네 오라버니라는 걸 기억해. 아무리 호기심이 들더라도, 앞으론 자중하도록 해라!”

그렇게 정철은 뒤돌아 떠났다. 그 자리에 남은 정미는 차가운 동굴에 홀로 떨어진 듯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철이 다시 돌아오자 정미의 눈이 반짝였다.

“오라버니―”

하지만 정철은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가 장청원인 걸 잊었어. 가자, 비서거로 데려다줄 테니.”

정철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너도 다 컸어. 우리가 남매긴 하지만, 결국엔 사내와 여인이야. 앞으로 마음대로 장청원에 오지 마.”

정미는 멍하니 듣다가,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머금고 정철을 쳐다봤다. 그러나 여전히 차가운 그의 얼굴이 보이자 가슴이 무너졌다. 정미는 감정이 폭발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알겠어. 그리고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 바로 돌아갈게.”

정미는 말을 마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나갔고 눈 깜짝할 새 어둠 사이로 사라졌다.

정철은 손을 떨며 조용히 정미를 따라갔다.

정미는 정철이 자신을 따라오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빠르게 달리다가 돌에 걸려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정철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녀를 받아내려고 했지만, 반쯤 내밀다가 꾹 참고 다시 거두었다.

정미는 고통도 잊은 채 일어나서 다시 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거에 도착했다.

처소에 들어서자마자 청가가 그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청가가 급히 정미에게 다가갔다. 잠시 후, 처소 안에서는 정미를 발견한 환안과 화미의 비명도 들려왔다.

밤은 점점 깊어졌고, 방 안의 울음소리는 어렴풋이 바깥까지 들려왔다. 환안과 다른 시종들은 방에서 쫓겨나 복도에서 빙빙 돌아다녔다. 아무도 자러 갈 생각이 없었다.

건물 뒤 창밖에 서 있는 정철도 잘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작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창밖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하늘이 밝아져 올 때쯤에야 조용히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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