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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181화 (181/375)

181화. 목욕

비서거는 벌써 등불을 켠 채였고, 입구에서도 창가에 흐릿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정철은 정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그 그림자를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문을 지키는 청가가 그를 발견할 때까지 가만히 서서 그 그림자를 쳐다봤다.

“둘째 공자님, 오셨습니까.”

정철이 딱딱한 표정으로 물었다.

“셋째 아가씨는 식사를 하였느냐?”

“아직입니다. 둘째 공자님, 응접실에 가 앉아 계세요. 소인이 아가씨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청가는 안으로 달려 들어가 입구에서 외쳤다.

“아가씨, 둘째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정철은 창사에 비친 그 사람의 그림자가 산만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 그림자는 두어 번 정도 종종거리며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정철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방금까지 주저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어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미는 백부로 돌아온 뒤부터 계속 기분이 가라앉아있었고, 밤에 있을 부적 공부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아무 화본이나 꺼내 창가에 앉아 넘겨보며 마음을 추스르던 중이었다.

뜻밖에도 그 화본의 이야기는 아주 독특했다. 한 여인이 의남매인 오라버니를 은애하게 되는 이야기였고, 정미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마침 둘째 오라버니가 왔다는 보고를 들었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미가 막 책을 숨겼을 때, 정철이 걸어들어왔다.

“오라버니.”

정미는 아주 긴장한 표정으로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인사를 건넸다.

“방금 어머니께 다녀왔는데, 같이 식사하면 좋을 것 같아서.”

정철은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정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

정미는 대충 대답했다.

정미는 늘 둘째 오라버니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니 그가 조 언니에게 선물을 준 일이 절로 떠올랐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음식이 상에 차려지고, 정미는 깨작깨작 먹으며 누가 봐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모습을 보였다.

“미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아니야, 맛있어.”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정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정철은 정미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아보았다.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눈동자로 맞은편의 소녀를 쳐다봤다.

“미미, 고민거리가 있으면 오라버니에게 말해줘. 예전에 네가 그랬잖아. 아무리 큰 고민거리라도 오라버니에게 말하면 사라진다고.”

정미는 눈을 슬쩍 들어 정철을 쳐다보았다.

“만약 오라버니와 관련이 있는 거면?”

정철은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그는 정미의 이런 태도를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미소 지은 채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오라버니가 무슨 잘못을 한 거라면, 사과할게.”

정미는 눈을 들고 환안과 다른 시종들에게 말했다.

“우선 물러나거라. 둘째 오라버니한테 할 말이 있으니, 명령하기 전엔 아무도 들어오지 마.”

시종들이 물러나고 두 남매만 남자 방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정철은 혹시나 재촉하면 정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봐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도록 두었다.

촛농이 탁탁하고 터지는 소리가 나자, 정미는 갑자기 정철을 쳐다보고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오라버니, 조 언니를 좋아하는 거지?”

정철은 깜짝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미는 그 표정에 더욱 화가 나 그의 손등을 세게 꼬집고는 성냈다.

“나한테 마음을 들켜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거야?”

정철이 여전히 멍하니 있자 정미는 정색하며 말했다.

“오라버니, 조 언니는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이미 지 오라버니와 정혼했다고. 오라버니가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이미 방법이 없어. 앞으론 그런 예의 없는 행동은 하지 않길 바라.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정철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여동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꾸중하는 걸 들으며 실소했다.

“미미,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

정철은 손을 뻗어 정미의 이마를 쓰다듬으려 했다.

하지만 정미는 고개를 돌려 피하고는 정철의 손을 붙잡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라버니, 어물쩍 넘기지 마. 난 오라버니 마음 다 알아.”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아는데?”

정철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입꼬리에는 비웃음이 옅게 묻어나왔다.

정미는 그 입꼬리에 더욱 화가 나 턱을 치켜들고 딱딱하게 말했다.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조 언니를 마주쳤을 때, 오라버니가 첫눈에 반했다는 걸 알아. 분명 언니가 정혼한 걸 알면서도 잊지 못해서 혼사를 언급하는 것조차 거절했잖아.”

정미는 얘기하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고,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조 언니는 지 오라버니의 정혼녀야.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잖아. 왜 굳이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려는 거야? 어쨌든, 나는 오라버니가 조 언니를 좋아하는 걸 허락할 수 없어!”

정미는 자신이 무지막지하게 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더 좋은 핑곗거리가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질투와 가슴 아픔 때문이라는 건, 절대 정철에게 말할 수 없었다.

정미는 조 언니가 둘째 오라버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음에 질투했고, 자신과 둘째 오라버니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 가슴 아파했다.

정철은 정미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고, 심지어 두 사람이 아는 조 아가씨가 서로 다른 사람일까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해괴한 오해가 생길 리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미의 꽉 깨문 입술에서 배어 나오는 붉은색을 보자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으며 급히 말했다.

“깨물지 마, 피 나―”

정철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

정미가 돌연 정철의 손가락을 깨물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며 잠시 멍해졌다.

‘실수로 오라버니의 손가락을 깨물었는데 어떡하지?’

정미는 계속 그대로 물고 있으면서, 입을 놓아야 할지 계속 물고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마음에 걸리는 게 없었다면 어떤 선택이든 아주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정미는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었기에, 어떤 선택이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한편 손가락을 물린 사람도 마음이 찔렸다.

정철은 조용히 생각했다.

‘내가 먼저 손가락을 빼야 하나, 아니면 미미가 아무렇지 않은 듯 놓는 것을 기다려야 하나?’

정철은 그 이후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두 남매는 그 동작 그대로 멈춰서 서로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시간이 흐르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가 더욱 뚜렷해졌다.

정미는 조금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음 방금 입을 놓을 걸, 어떡하지?’

정철도 마찬가지로 후회하고 있었다.

‘정미가 계속 입을 놓지 않을 줄 알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을 빼냈을 텐데…….’

이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반어가 우아한 자태로 걸어오며 두 사람의 발치에 드러누워 고개를 들고 조용히 두 사람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정미는 갑자기 입을 놓으며 가볍게 기침하고는 말했다.

“반어가 요즘 계속 핥는 걸 좋아해서, 나도 옮았나 봐.”

정철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양이의 습성이 원래 그래. 앞으로 반어가 핥으면 꼭 손을 씻어.”

정미는 두 뺨이 붉어진 채 정철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당황스러워하며 말했다.

“손 씻으러 갈게―”

정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달아났고, 남은 정철은 귀밑이 뜨거워지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어는 갑자기 두어 번 울어대더니 빠르게 뛰어올라 정철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혀를 내밀어 그의 손바닥을 한 번 핥더니 고개를 갸우뚱대며 그를 쳐다봤다.

‘이 고양이가 지금 도발하는 건가?’

순간 정철은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렸다.

잠시 후 정미가 손을 씻은 뒤 병풍을 돌아 들어왔다.

정미는 애써 방금의 일을 모른 척하며 빙긋 웃고 말했다.

“오라버니, 반어가 왜 오라버니의 품에 있어?”

그러자 반어가 정철의 품에서 뛰어내려 진지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떠나가 버렸다.

정미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방금은 반어가 아니었으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야.’

정철도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다시 방금의 화제를 꺼냈다.

“미미, 방금 내가 조 아가씨께 선물을 줬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야? 알아듣지 못했어.”

이미 여기까지 얘기한 이상, 정미는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었고 정색하며 말했다.

“날 속일 생각하지 마. 오늘 찻집에서 다 들었어.”

“들었다고?”

정철은 아주 빠르게 이게 무슨 일인지 알아차려 손가락을 뻗어 정미의 이마를 살짝 두드렸다. 화가 나면서도 웃겼다.

“무슨 일인가 했네. 그게 아니라, 찻집에서 그 조 형도 너처럼 오해를 한 거였어.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일은 미미를 탓해야 하는걸.”

“나를 탓한다고?”

정철은 일부러 정미와 조금 떨어져 자리에 앉았다.

“네가 조 아가씨한테 준 음악상자 때문이잖아.”

정미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정철이 설명했다.

“그 음악상자는 기진방의 인기 상품이었고, 내가 사러 갔을 땐 하나밖에 남지 않았거든. 그때 조경명도 마침 사려고 했었는데, 결국엔 내가 샀지. 나중에 조경명이 조 아가씨가 그걸 들고 있는 걸 봤는지, 내가 선물했다고 오해했더라고. 그래서 복도에서 내게 그렇게 말했던 거야.”

그러고는 정미를 곁눈질하며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을 했다.

정미는 자초지종을 깨닫고 두 뺨이 뜨거워져서는 중얼댔다.

“조 언니한테 선물한 게 아니라, 며칠 빌려준 거야…….”

갑자기 마음이 아파졌다.

‘이런 건 줄 알았으면 둘째 오라버니가 준 선물을 조 언니에게 주었을 리 없었을 텐데.’

정미가 그저 조 아가씨에게 빌려준 것뿐이라고 하자, 정철은 기분이 한결 나아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론 엉뚱한 생각하지 마.”

“응.”

정미는 눈을 들고 조심스럽게 오라버니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정철의 온화한 표정을 재차 확인했다.

“그럼, 오라버니는 정말로 조 언니를 좋아하지 않는 거지?”

“그럴 일 없어.”

“그럼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데?”

정철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미미, 오라버니도 자기만의 비밀이라는 게 있어.”

정미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질문을 한 이유를 숨기려 뻔뻔하게 말했다.

“나는 그저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뿐이라고. 알려줘, 내가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

정철은 예전처럼 정답게 여동생의 볼을 꼬집고 싶었지만, 꽃처럼 아름다운 소녀의 뺨을 보자 마음이 당황스러워 조용히 손을 내리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누굴 좋아하는진 중요하지 않아.”

정철은 여동생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가 기쁘고 평안한 게 중요하지.”

정미는 그 따뜻한 웃음에 넋이 나가 멍해졌다.

그때 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어. 돌아가 볼게.”

“장청원에 가는 거야, 아니면 오라버니의 거처로 가는 거야?”

정미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장청원.”

정철은 이 말을 남기고 뒤돌아나갔다.

정미는 그 자리에 앉아서 넋을 놓고 있었다. 머릿속에 방금 정철이 했던 말과 따뜻한 웃음이 계속 떠올랐다.

‘좋아하는 사람이 기쁘고 평안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여인이 너무 질투나. 도대체 누구인 거야? 만약 그 여인과 내가 함께 서서 누가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

정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가 내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자, 정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깐. 오라버니의 몸 안엔 정가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으니까, 결국엔 원래 내 오라버니가 아닌 거잖아. 만약, 만약 오라버니가 이 진실을 알게 되면? 그렇게 되면, 오라버니가 나를 어떻게 대하려나?’

이 생각은 미친 듯이 자라는 들풀처럼 퍼져가는 속도를 막을 수 없었고, 정미는 부적을 공부하기 힘들 정도였다.

한참 동안 버티던 정미는 결국 꽃등을 하나 들고 혼자서 조용히 장청원으로 향했다.

* * *

평소엔 팔근만 장청원을 지키고 있었으나, 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팔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요 며칠 동안 팔근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정미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고, 방문 앞에 섰을 때 건물 뒤에서 쏴쏴하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왜 이 시간에 물소리가 나지?’

정미는 의아해하며 꽃등을 입구의 계수나무에 걸어놓고 살금살금 건물 뒤로 돌아갔다.

달빛 아래, 한 사내가 등을 지고 서서 물을 길어 머리에 끼얹고 있었다.

맑은 물은 달빛이 스며든 듯 빛나며 사내의 매끈한 등을 타고 흘렀다. 물에 씻겨진 등은 차가운 옥처럼 빛나서, 정미는 숨을 죽였다.

정미는 두 손으로 벽을 꽉 붙잡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지금 목욕을 하고 있는 거야?’

정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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