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갔다가 다시 돌아오다
다음 날, 정미는 제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마차에서 내린 뒤 제생당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몇몇 부인이 정미를 막아서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진료와 약을 지으려면 줄을 서야 하는데, 어찌 규칙을 지키지 않으세요?”
정미는 당황했다.
그러자 환안이 대신하여 부인들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줄을 서라고요?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요.”
“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다르지요. 우린 다 작은 신의님을 보러 온 거예요.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줄을 서야 하지 않겠어요?”
환안이 정미를 슬쩍 쳐다보고는 어리둥절해했다.
“최근에 그 작은…… 신의님은 안 오지 않았나요?”
눈에 띄게 배가 부른 부인이 대답했다.
“어젠 안 오셨지만, 오늘은 오실지도 모르지요. 오늘 안 오시면 내일도 있는걸요.”
환안은 멍해졌다.
“그럼 괜히 줄을 선 것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작은 신의님을 만나지 못해도, 제생당의 의원에게 진료를 보고 약을 지을 수 있지요. 어쨌든 문제가 있으면 신의님이 나서주실 거니까요.”
‘그런 거였구나!’
환안은 숭배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정미는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때 의관의 머슴들 중 눈치 빠른 하나가 사람들 속에서 정미를 알아보고 급히 맞이하며 깍듯하게 말했다.
“셋째 아가씨, 오셨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정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환안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 어떤 부인이 머슴을 붙잡으며 물었다.
“왜 새치기를 하는 거예요? 설마 저 아가씨가 부잣집 아가씨라서 다른 대우를 하는 거예요?”
머슴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상황을 구경하던 다른 부인이 허벅지를 내리치며 말했다.
“아니다, 이 셋째 아가씨가 바로 작은 신의님이신가 봐!”
이 말에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모두들 후다닥 정미를 둘러쌌다.
머슴은 대경실색하며 혹시나 정미가 밟힐까 봐 급히 그녀를 데리고 안에 들어갔다.
안에 들어온 정미는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인기가 많아졌지?’
“이게 무슨 일인 것이냐?”
머슴은 정미를 신처럼 여기고 있었기에 급히 설명했다.
“셋째 아가씨는 모르시지요. 아가씨께서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죽을 뻔한 부인을 구하신 뒤로, 우리 의관에 와서 진료를 보려는 부인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의관에 새 얼굴이 많지요? 일손이 부족해서 새로 불러들인 사람들입니다. 오늘 소인이 아가씨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새로 온 사람들이 아가씨를 못 알아봤을 겁니다.”
환안이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렸다.
“그 말은, 우리 아가씨가 감사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아이고, 어찌 감히요.”
머슴은 이리 말하면서도 자신이 셋째 아가씨를 모셔 들어온 것에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환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이 우리 아가씨를 부르지만 않았어도, 그 사람들이 우리 아가씨가 신의인 걸 알 리 있었겠어요? 하마터면 못 나올 뻔했다고요.”
정미가 이마를 짚었다.
“그만해, 환안. 너는 한 번 더 나갔다 와야 해.”
“예?”
환안은 어리둥절했다.
정미는 발을 치마 안으로 움츠리며 힘없이 말했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어.”
환안은 순간 멍해졌다.
“신발이요?”
“괜찮아, 네가 어서 가서 주워오면 돼.”
정미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오늘 일어난 뜻밖의 일로 당황했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니 그래도 기뻤다.
그 사람들이 그저 바람을 탄 것이든, 정말 정미의 의술을 믿은 것이든, 정미는 마침내 자신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환안 아가씨, 제가 함께 가드리지요.”
머슴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입구에 다다랐을 때, 면식이 없는 머슴 하나와 마주쳤다. 환완과 함께 있던 머슴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여기 서 있는 거야?”
그러자 그 낯선 머슴이 뒤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공자께서 본인은 셋째 아가씨의 사촌 오라버니고, 약속대로 약을 가지러 왔다고 하셔서.”
머슴은 환안을 쳐다봤다.
환안은 사철이 찾아온 것에 놀라, 신발을 주우러 가야 하는 것을 까먹고 말았다.
“아가씨께선 안에 계세요. 소인을 따라오세요.”
기척이 들리자, 정미는 환안이 벌써 신발을 주워온 줄 알고 아주 기뻐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다름 아닌 사철이 보이자 멍해졌고, 뻗었던 발을 급히 치마 속으로 움츠렸다.
“아가씨, 사촌 공자께서 약을 가지러 오셨대요.”
정미는 환안을 흘끗 노려보고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신발은?’
그제야 환안은 대경실색하여 급히 말했다.
“사촌 공자님, 우, 우선 앉아 계세요. 소인은 가서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환안은 재빠르게 달려나갔다. 방 안엔 정미와 사철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사철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미, 내가 너무 일찍 온 거지?”
정미는 ‘알면 됐어요!’라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사철은 작은 패왕이 아니었기에 그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환안 그 망할 계집, 신발을 주워오기도 전에 사람을 들이다니. 나중에 혼내줘야겠어!’
정미는 무표정으로 딱딱하게 말했다.
“사철 오라버니는 사효 대신 부수를 가지러 온 거죠? 그럼 잠시 기다려야 해요. 저도 방금 왔거든요.”
“급하지 않으니 괜찮아.”
사철이 상냥하게 웃었다.
‘오라버니가 안 급해도 나는 급하거든요!’
정미는 눈을 부라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허리를 더욱 꼿꼿이 펴고 앉았다.
“그럼 우선 잠시 나가 있어 주세요. 부적을 만들 땐 아무도 방해하면 안 되거든요.”
“알겠어.”
사철이 일어나 두 걸음 걸어갔을 때, 갑자기 다시 뒤돌아섰다.
“정미―”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정미가 갑자기 똑바로 앉으며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사철의 입꼬리가 휘었다.
눈앞의 소녀가 일부러 차분한 모습을 꾸며내는 것을 보자, 사철은 왠지 모르게 정미가 가련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참지 못하고 그 차분함을 깨트려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사철은 소매 속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건넸다.
“방금 밖에서 이걸 주웠는데―”
그것은 손바닥만 한 자수 신발이었다. 담황색 신에 가로로 나뭇가지가 수놓아져 있었고, 위에는 물총새 한 쌍이 멋지고 정교하게 수놓인 채였다.
사철의 예상대로, 소녀의 두 뺨이 곧바로 붉어졌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도 마음속으로 자신의 행동에 의아해했다.
예전이었다면 사철은 아가씨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많은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며, 최소한 신발을 직접 건네주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소녀에겐 어떤 방법도 쓰고 싶지 않았다.
사철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소녀와의 거리감을 허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공유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어제 사촌 형제들을 초대했을 때, 정미가 다른 형제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본 사철은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정미와 사철 사이에는 서로를 알지 못했던 긴 세월의 공백이 있었다.
사철은 몸을 숙여 정미 곁에 신발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발이 차면 안 돼. 얼른 신어.”
그러고는 세심하게 뒤돌아섰다.
정미는 입술을 깨문 채 조용히 사철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뒷모습만 보면 사철은 정철과 아주 닮아 있었다. 그리고 하필 정철과 닮은 탓에, 정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정미는 허리를 숙여 신발을 주웠지만, 곧바로 신지 않고 손을 휘저었다. 신발을 저 뒷모습에 내려치고 싶었다.
그러나 참고 참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신발을 잃어버리고 사철이 주워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창피한 일인데, 만약 사철에게 던져버리면, 앞으로 사가의 문에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정미는 얼른 신발을 신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사철 오라버니, 이제 뒤돌아도 돼요.”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었나 본데, 절대 안 되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창피한 짓은 아주 많이 했거든. 흥!’
사철은 그제야 뒤돌아섰고, 무표정한 정미의 얼굴을 보고는 억울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 정미는 다른 아가씨와 반응이 다르지? 내가 괜히 일을 망친 건가?’
사철이 생각에 잠긴 사이, 정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철 오라버니, 우선 나가 계세요. 부수를 다 만들면 부를 테니.”
“알겠어, 그럼 밖에서 기다리마.”
사철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손에는 이미 땀이 나고 있었고 감히 정미를 더 놀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
소년은 늘 이랬다. 평소에 아무리 침착하고 신중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소녀를 만나면 그 소녀 때문에 울고 웃으며 노심초사하기 마련이었다.
만약 눈앞의 좋아하는 사람이 화를 낼 때, 전혀 놀라지 않는다면 그건 충분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터였다.
사철이 방에서 나가자, 정미는 그제야 긴장이 풀려 의자의 손잡이를 내리치며 짜증을 부렸다.
“창피해 죽겠네, 엉엉―”
그때 사철이 갑자기 다시 돌아왔다.
“정미―”
정미는 깜짝 놀라 가슴이 철렁했고, 급히 무표정한 모습을 되찾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더 있어요?”
사철은 웃음을 꾹 참으며 말했다.
“응, 사효가 얼굴에 여드름이 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전해달라 했어.”
“그건 당연하죠. 저는 부의예요. 환자의 비밀을 지켜주는 건 당연한 거라고요.”
“그럼 방해하지 않고 나가볼게.”
사철은 뒤돌아나가 문을 닫았고, 응접실의 의자에서 기다리다가 방금의 상황을 떠올리곤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었다.
정미는 재빠르게 부수를 만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사철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낯짝이 두껍더라도, 조금 진정해야겠어.’
잠시 후, 밖에서 환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환안이 문을 밀고 들어온 뒤, 다시 문을 닫고 정미에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보세요!”
환안이 품에서 신발 한 켤레를 꺼내 조잘댔다.
“아가씨께서 잃어버린 신발은 아무리 다녀도 보이지 않아서, 소인이 얼른 한 켤레를 사서 돌아왔어요. 아가씨, 저 빠르죠?”
정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이 망할 계집, 왜 그렇게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람? 설마 내가 은 두 냥이라도 상으로 주길 바라는 거야?’
환안이 쭈그려 앉으며 말했다.
“아가씨, 소인이 신겨드릴게요―”
그러다가 순간 멈칫하더니, 놀란 표정으로 정미의 발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가씨, 이 신발은 어디서 났어요?”
정미가 이를 갈았다.
“어디서 날아왔다!”
“이, 이건……!”
환안은 손에 쥔 새 신발을 보다가, 다시 정미가 신고 있는 자수 신발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정미가 짜증 내며 말했다.
“이게 뭐! 오늘 네 점심 식사는 없다!”
“예?!”
환안의 표정이 멍해졌다.
정미는 뒤돌아서서 부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환안이 너무 멍청하니, 나 혼자 조용히 만들어야겠어.’
* * *
할 일이 있다면 시간은 언제나 아주 빨리 흘러 눈 깜짝할 새 하루가 지나는 법이었다.
다음 날, 사철은 또 부수를 가지러 왔다. 정미가 그에게 당부했다.
“내일 다시 올 땐 사철 오라버니가 사효의 얼굴이 어떤지 자세히 말해주세요. 사흘 연속으로 먹는 게 첫 단계니까,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봐야 해요.”
사철은 집에 돌아와 이 말을 사효에게 전했다.
여동생의 얼굴에 무언가 났으니, 세심한 사철은 여동생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 그래서 여동생의 얼굴이 어떻게 되었는지, 부수가 효과가 있는지 당연히 알지 못했다.
사철의 말을 들은 사효는 아래턱을 살짝 매만지며 괴로운 듯 말했다.
“적어진 것 같진 않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화장경 앞으로 가 얼굴을 들여다보던 사효가 대경실색했다.
“아니, 적어지지 않은 게 아니라, 더 많아졌어!”
사효의 말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사철이 급히 다가가 사효의 어깨를 토닥였다.
“거짓말 마. 뭐가 많아졌다는 거야. 오라버니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사효는 얼굴을 가린 채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진짜 많아졌어. 어젠 열두 개 정도였는데, 방금 부수를 마시자마자 지금은 열일곱 개가 되었다고.”
“오라버니한테 보여줘 봐.”
하지만 사효는 얼굴을 가린 채 사철에게 보여주지 않았고 흐느끼며 말했다.
“부수 같은 걸 함부로 믿어선 안 됐어.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의원들의 말을 믿을걸. 음식을 좀 담백하게 먹고 마음을 좋게 먹으면, 며칠이면 좋아졌을지도 모르는데. 오라버니, 나 어떡하지?”
“허튼 생각 마. 내가 바로 제생당으로 가서 정미에게 물어볼게.”
사철은 급히 제생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