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사효의 고민
정미와 사철이 떠난 후에도 연회는 계속되었다.
술을 몇 잔 걸친 탓인지, 몇몇 사람들은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한추몽이 한추정을 잡아당기며 귀에 속삭였다.
“추정, 사가에서 정미 언니를 며느리로 맞으려는 것 같지?”
한추정은 아직 어렸기에 한추몽의 말을 듣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래?”
한추몽은 갑자기 흥미가 사라져, 늘 투명인간 같은 둘째 언니 한추로를 한번 보고, 다시 늘 거만을 떠는 한추화를 한 번 쳐다봤다. 같이 열심히 수다를 떨 사람을 찾지 못하자, 그녀는 눈을 굴리더니 정동에게로 다가갔다.
정동은 말없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정동은 한추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한추몽은 나보다도 못해. 나는 한씨 아래 이름을 올렸으니, 반쯤은 적녀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한추몽은 서녀 주제에 위국공부에 적녀가 한추화 하나밖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서녀보다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잖아.
그것뿐만 아니라고. 제일 짜증 나는 건 한추몽의 입이야. 걸핏하면 함부로 지껄여대니, 자기한테 좋은 게 없더라도 남을 해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하잖아. 나도 가끔 정미를 괴롭히긴 하지만, 정미와는 날 때부터 대립해왔는걸. 내 어머니는 정미의 어머니 때문에 본처에서 첩실로 되어버렸으니, 내가 정미를 좋게 볼 수가 없다고.
하지만 한추몽은 정미와 사촌 자매고, 별 관계가 없으면서도 늘 정미를 음해하니,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거야.‘
자신은 한추몽과 다른 사람이라 여긴 정동은 조용히 옆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한추몽은 정동의 생각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정동과 정미는 천적이니, 자신이 정미의 험담을 하면 정동은 그저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한추몽은 다시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정동을 찌르기까지 했다.
“정동, 정미 언니랑 사철 오라버니는 언제부터 이렇게 친해진 거야?”
정동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한추몽은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정미 언니가 능력이 좋네. 예전엔 지 오라버니와 사이가 좋다가, 지금은 사철 오라버니와 사이가 좋잖아. 오늘도 봐. 사철 오라버니의 소성년식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미 언니를 불렀잖아. 이게 무슨 뜻이겠어?
설마 사가에서 정미 언니를 며느리로 맞으려는 건가? 쯧쯧, 예뻐진 것만 봐선 안 될 텐데. 정미 언니의 품행은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사가의 부인께선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네.”
정동이 눈을 부라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허 부인도 아니고.”
한추몽은 잠시 당황하다가 화가 치밀어올라 차갑게 말했다.
“뭐가 그리 의기양양한데? 고모님 아래 이름을 올렸다고 잘난 줄 알아? 네가 진짜 적녀라고 해도, 그리 높은 가문도 아니면서!”
정동은 정미와 달랐다. 막말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 눈에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추몽 언니, 그 말은 틀렸어. 시야를 넓게 해봐. 수도에서 어느 집의 적녀가 내 회인백부의 적녀 신분보다 귀중하다는 거야?”
이 말에 한추몽은 잠시 멍해졌다가 비웃었다.
“너 지금 터무니없는 잠꼬대 하는 거 아냐?”
정동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추몽 언니가 잘 모르는 거겠지. 우리 회인백부의 적녀는 태자비의 적임자인걸. 이건 백 년 전부터 정해진 거잖아.”
한추몽은 말문이 막혔다.
정아가 나중에 황후의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태자비였기에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정동은 한추몽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 성공하자 일어나서 정철의 곁으로 가 앉았다.
하지만 이 기쁨도 잠시, 정동의 마음이 아파왔다.
‘사가에서 정말 정미를 마음에 둔 거야? 그럼 난 어떡하지?’
* * *
정미는 사철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살이 또 빠진 것 같네.”
“오늘 추화 언니도 그렇게 말했어요.”
“사실 살이 찌든 빠지든, 건강이 제일 중요한 거지만.”
사철은 아무 뜻 없이 한마디 던지고는 웃으며 말했다.
“조모님과 어머니도 오늘 정미를 아주 반가워하셨어.”
“이모할머님과 다른 분들이 계속 저번 일을 마음에 두셔서 그래요. 사실 그저 사소한 수고였는데―”
사철이 정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작게 말했다.
“나도 반가웠어.”
그 말에 정미는 멍해졌다.
소녀의 성장은, 때론 순간적으로 일어나곤 한다.
정미는 남녀의 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예전에 한지를 좋아했을 땐 좋아한 이유마저도 우스웠다. 하지만 정철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뒤론 갑자기 민감해졌다.
‘설마 사철 오라버니가…… 나를? 아니, 그럴 리 없지.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몇 번이나 만났다고. 이렇게 쉽게 사람을 좋아하게 될 수 있겠어?’
정미가 곤혹스러워하자, 사철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번에 정미가 와서 조모님을 구했을 때, 우리 가족에게 행운을 가져왔잖아. 이번에 내 소성년식에도 정미가 왔으니, 또 행운이 있을 거라 믿어.”
이 변명은 정미의 의심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미는 반보 정도 뒤에서 걷고 있었고, 사철의 귀밑에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것을 보고는 또 확신이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빠르게 사효의 거처에 도착했다.
사효는 단선(*團扇: 둥근 모양의 부채)을 들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말했다.
“정미 언니, 왔구나.”
정미는 원래도 호기심이 일었는데, 사효의 모습을 보고 더 궁금해졌다.
“사효 너―”
“오해하지마, 난 그저 정미 언니가 보고 싶었던 거니까.”
사효가 급히 말했다.
조모의 일 때문에 사효는 정미가 신비하게 느껴졌고 원래도 계속 정미를 만나고 싶었지만, 정미는 그렇게나 아름다운데 자신의 얼굴은 이 꼴이 되었으니 단선을 치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미는 사효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사효, 최근 아래턱에 여드름이 많이 나지 않았어?”
사효는 손에 든 단선을 곧바로 무릎 위로 내리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안 거야?”
그러고는 사철을 매섭게 노려봤다.
“큰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정미 언니에게 알려준 거지?”
사철은 여동생이 외모를 신경 쓰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래턱에 난 여드름을 보지 않고 다정하게 시선을 옮기며 웃었다.
“나는 정미에게 말한 적 없어.”
“그럼 정미 언니가 어떻게 안 건데?”
사효는 화가 나면서도 부끄러웠다.
정미가 웃었다.
“잊었어? 나는 부의잖아.”
이 말에 사효뿐만 아니라, 사철도 의아해하며 정미를 쳐다봤다.
“부의는 많은 증상을 얼굴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어. 방금 사효가 단선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긴 했지만, 코 위쪽은 드러나 있었잖아. 그래서 알 수 있었지.”
사효가 멍하니 듣다가 한참 뒤에야 정미의 옷깃을 잡으며 부드럽게 부탁했다.
“착한 사촌 언니, 알아볼 수 있다면 분명 이 짜증 나는 여드름을 없애줄 방법도 알고 있겠지?”
정미는 사효의 아래턱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말했다.
“사실 너 같은 상황은 음식을 담백하게 먹으면 날이 갈수록 점점 좋아질 거야.”
사효가 다급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안 돼, 그건 오래 걸리잖아. 계속 방에 숨어서 아무도 만나지 않을 순 없어. 언니, 제발 방법 좀 생각해줘, 응?”
“그럼…… 한번 시도해볼게.”
말을 마친 정미는 사철을 쳐다봤다.
“사철 오라버니는 얼른 돌아가세요. 부적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니까.”
“그럼 부탁할게, 정미.”
사철은 정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사효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는 그제야 떠나갔다.
사철이 돌아가자, 사효는 더욱 거리낌 없이 정미의 팔짱을 끼고 물었다.
“정미 언니, 부적은 어떻게 만들어?”
“조용한 방 하나를 찾아줘. 아무도 들어와 방해하지 않으면 돼.”
사효는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함에 조금 실망했지만, 얼굴의 여드름을 없앨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시 기분이 좋아져 급히 정미를 자신의 서재로 들여보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는 건 그저 피부 문제의 일종이었기에 미백부를 약간만 변형시키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정미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최근 점점 체력이 좋지 않아졌고, 모두들 나를 보고 살이 빠졌다고 하는 걸 보면, 그건 분명 정혈로 부적을 만드는 것 때문일 거야. 그리고 다른 부의들은 부적을 만들 때 주사를 쓰지, 자신의 선혈은 전혀 쓰지 않잖아.
아혜가 가르쳐 준 선혈을 이용하는 방법이 효과가 더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선혈을 쓰지 않으면 효력이 없어지는 건지는 몰라. 그러니까 오늘 한번 시도해봐야겠어. 만약 안 되면, 며칠 뒤 정혈이 섞인 부수를 사효에게 주면 돼.’
반주향(*半炷香: 약 15분) 후, 정미가 서재에서 나왔다.
사효가 정미를 맞이하며 그녀의 손에 든 물잔을 쳐다봤다.
“정미 언니, 이게 바로 여드름을 없앨 수 있는 부수인 거야?”
정혈을 넣지 않은 부수였기 때문에, 정미는 그리 당당하게 말할 순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런데 이런 부수는 처음 만들어봐서 아직 효과가 어떨진 잘 몰라. 일단 3일 연속으로 마셔보고, 효과가 없으면 내게 서신을 보내줘.”
“3일?”
사효가 눈을 깜빡였다.
“그럼 매일 백부에 가서 가져와야 하는 거야?”
“내일부터 난 매일 아침 제생당에 가야 해. 거기로 사람을 보내면 돼.”
사효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좋아, 내일 사람을 거기로 보낼게. 이거 바로 마시면 돼?”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효는 급히 물잔을 건네받고 들이키더니, 곧장 화장경 앞으로 달려가 자신을 살펴보았다.
정미가 웃었다.
“그렇게 효과가 빠를 리 없잖아.”
사효는 얼굴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급해서 그래. 이 여드름들 때문에 매일 방 안에 숨어만 있었다고. 정말 답답해 죽겠어.”
정미는 사효의 말에 왠지 모르게 양심이 찔렸지만, 이건 최소한 생명에 지장이 있는 병증이 아니었으므로 이내 마음을 놓았다.
* * *
사가에서 떠날 때, 사철은 대문에 서서 모두의 마차가 떠나는 걸 지켜봤다.
정동은 아쉬운 듯 창발을 내려놓고 정미에게 물었다.
“셋째 언니, 사효 언니는 왜 언니만 따로 만난 거야?”
정미는 정동을 한 번 흘겨보고 담담하게 말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내가 진료를 봐줄 수 있는지 물어본 거야.”
정동이 피식 웃었다.
“그럼 의원을 부르면 되잖아.”
정미가 대꾸하지 않자, 정동은 화가 나 이를 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떠보았다.
“셋째 언니, 오늘 지 오라버니가 둘째 언니는 어디 갔는지 물어봤었어.”
정미는 그제야 눈을 들었다.
“그래서, 알려줬어?”
정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자, 정동은 속으로 기뻐했다.
‘역시 지 오라버니를 아직 잊지 못했구나.’
“잘 모른다고 했지.”
정동은 거짓말을 했다.
사철을 알게 된 뒤, 정동은 정미와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았다. 만약 정미가 자신이 한지에게 정요가 어딨는지 알려줬다는 걸 알면 분명 화를 낼 터였다.
“그래.”
정미의 표정이 풀렸다.
정요가 멀리 쫓겨났으니, 이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정미는 더 이상 한지 때문에 풍파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셋째 언니.”
정동이 다가왔다.
“내가 보기엔, 지 오라버니도 그냥 별 의미 없이 물은 것 같아. 마음에 담아두지 마.”
정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정동, 계속 헛소리를 하면 화낼 거야.”
정동은 성내며 다시 돌아가 앉았고 입을 삐죽이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정미는 겉과 속이 다른 밉상이라니까.’
정미는 아예 눈을 감고 정동을 쳐다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