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사효(謝曉)의 초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뜻밖에도 정동이 벌떡 일어나 빠르게 두 걸음 걸어 정미 앞으로 다가갔고 몸을 숙여 그 옥 사자를 주운 뒤 한지에게 건넸다.
“지 오라버니, 이렇게 좋은 옥 사자가 망가지면 너무 아깝잖아요. 잘 가지고 계세요.”
한지는 감격한 듯 정동을 한 번 쳐다보았다.
“고마워.”
정동은 입꼬리를 휘며 웃었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은 뒤 아까의 화제를 이어서 이야기했다.
“둘째 언니는 많이 아파서 언제 돌아올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
이 말은 한지에게 들려주려는 것이었다.
‘정요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백부에 다시 돌아오지도 못한다는 걸 알면 마음을 접겠지. 위국공 세자가 정미에게 마음이 움직이면, 노위국공과 위국공 노부인은 정미를 아주 아끼니, 정미가 울면서 빌면 시랑 집안과의 혼사를 취소해주실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내 기회가 더 커지는 거지.’
정동이 감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대량의 풍조는 아주 많이 개방적이었기 때문이다. 혼사를 무르는 것은 남녀 모두에게 영향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생을 망치는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자식을 아끼는 집안이라면, 자식이 혼사를 죽음으로 피하려고 하거나 상대방이 좋은 짝이 아닌 것 같을 때 퇴혼하는 것도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한지는 정동의 말을 듣고 감히 추태를 부리진 않았지만 주먹을 아주 세게 쥐었다.
‘정요가 그렇게까지 아프다고? 마지막으로 정요를 만난 건 운선산에서였지. 분명 그때는 기력이 좋아 보였는데. 그래서 그날 온종일 같이 놀았잖아. 그래, 그날 조 아가씨도 있었지. 정요가 그 모습을 봤으니 말은 안 해도 마음은 괴로웠을 거야. 게다가 산은 춥잖아. 돌아가서 아파 쓰러져도 고모님과 정미는 정요에게 냉담하니까, 날이 갈수록 병세가 안 좋아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여기까지 생각하자 한지는 마음이 아파왔다.
‘안 되겠어. 반드시 정요와 한 번 만나야겠어. 최소한 정요가 나를 기다리며 버틸 수 있도록 격려와 희망을 주어야겠다고!’
한지는 결심을 내렸고 사철의 소성년식이 시작된 뒤로도 마음은 딴 데로 가 있었다.
그는 조용히 식을 둘러보다가, 모두가 소성년식에 집중한 것을 보고는 몰래 나가서 정미를 찾았다.
‘여자아이들은 소성년식을 볼 수 없으니까.’
한지는 한 바퀴를 돌아보았고, 어렵사리 작은 화원에서 정미를 발견했다. 하지만 정미는 계속 한추화와 함께 있어, 한지는 도저히 다가가서 물어볼 수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눈을 돌렸다. 그러자 정동이 혼자서 화원 구석의 그네를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지는 눈을 반짝이더니 정동에게 다가갔다.
“지 오라버니?”
정동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네에서 내려왔다.
한지는 사촌 여동생인 정동에게 늘 미온적인 태도였지만, 지금은 정요가 마음에 걸려 그리 많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뻔뻔하게 말문을 열었다.
“정동, 네게 물을 게 있어.”
“물을 게 있으면 물어요. 내가 아는 거면 다 말해줄게요.”
한지는 마음이 풀려 정동에 대한 호감이 적지 않게 들며 생각했다.
‘사촌 여동생들 중에 정미만 성정이 안 좋구나.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나중에 다른 사람의 골칫거리일 뿐.’
“나는 그냥, 정요가 어느 마을로 보내졌나 해서.”
정동의 눈이 반짝이며 대답하려고 한 순간, 갑자기 잘 차려입은 여종이 화원에 와 정미에게 예를 갖췄다.
“아가씨, 저희 노부인께서 모셔오라 하십니다.”
사가는 좁았기에 화원도 작고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 여종이 또렷이 말하니, 멀든 가까이에 있든 화원에 있던 모든 사람의 귀에 들렸다.
정동은 순간 한지의 물음에 대답할 기분이 사라졌고 빠른 걸음으로 정미의 옆으로 갔다.
정미는 깜짝 놀랐다.
“이모할머님께서 나를?”
“예.”
정미가 발걸음을 떼자, 정동이 말했다.
“셋째 언니, 아직 사철 오라버니의 소성년식이 끝나지 않았어. 가도 되는 거야?”
정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여종을 쳐다봤다. 그러자 여종이 웃으며 말했다.
“곧 있으면 끝납니다. 사촌 아가씨께서 저번에 저희 노부인을 구해주셨으니, 노부인과 다른 어르신들이 계속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하셨답니다. 그러니 어서 소인을 따라와 주세요.”
정미가 여종을 따라 멀리 떠나자, 한지가 참지 못하고 정동에게 물었다.
“정미가 어찌 이모할머님을 구한 거야?”
정동은 망연한 표정이었다.
“나도 몰라요.”
요 몇 달 동안 정미는 백부에 머무르는 일이 적었기에 얼굴도 자주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 일을 알 리가 없었다.
한추화가 입을 열었다.
“조모님께 들었어. 이모할머님의 병세가 중해서 조모님께서 소식을 듣고 고모님과 정미를 데리고 사가에 왔는데, 태의마저도 이모할머님이 간질 발작이라 여겼지만, 정미는 소갈증 때문이라는 걸 알아봤다고. 그래서 제때 이모할머님을 구할 수 있었대. 맞다, 조모님께도 소갈증이 있는데 이것도 정미가 알아본 거야.”
이 말에 정동은 눈을 크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한지도 놀라워했다.
“조모님께서 소갈증을 앓고 계신다는 건 얼마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일들이 있었는지는 몰랐네요.”
한추화가 그를 한 번 흘겨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너는 요즘 계속 밖으로 나도니까, 당연히 아는 게 적겠지.”
이 말에 한지는 귀밑까지 빨개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추화는 다른 사람 앞에서 한지의 체면을 더 구기고 싶지 않았기에 더 이상 뭐라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한숨을 쉬었다.
‘한지는 정말 못났구나. 요즘 계속 혼이 나간 모습에다가, 예전의 진중함은 전혀 보이지 않아. 어른들도 말씀은 안 하셨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정요와 관련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어. 다행히 정요가 수도에서 나가 요양하러 갔으니, 한지도 여기서 마음을 접었으면 좋겠네.’
한추화는 정요에게 무슨 일이 나길 원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미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몇 년 동안 정미의 평판은 점점 나빠지고 정요의 명성은 점점 드높아지는 걸 보자 확실히 정요에게 호감이 들지 않았다.
한추화는 영리했고 눈치가 아주 빨랐다.
정요는 매번 국공부에 올 때마다 규율을 잘 지켰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게 행동해 아무도 그녀의 결점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정미와 아주 친하게 지내고 있고, 진심으로 정미에게 잘 대해줬다면, 정미의 명성이 어찌 갈수록 악화될 수 있었겠는가?
이 부분만으로도 한추화는 정요를 좋아할 수 없었고, 그저 한지가 앞으로 이를 깨닫길 바랄 뿐이었다.
* * *
정미는 여종을 따라 대청에 들어갔다. 문에 들어가자마자 대청 안의 사람들이 모두 정미를 쳐다봤고, 그 순간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느낌이 들었다.
정미가 가장 먼저 눈으로 찾은 사람은, 언제나 정철이었다.
정미는 오라버니의 눈빛 속에서 흐뭇한 기색과 다른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자세히 볼 겨를없이 정철이 바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정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눈을 들었다. 그러자 사철이 따뜻한 웃음을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정미는 어리둥절했다. 문득 사철과 정철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 자신의 눈이 이상한 거라 생각해 눈을 깜빡였다.
문 입구에서 들어오는 소녀는 아주 아름다웠다. 마치 봄볕으로 재단한 치마를 두른 것처럼, 가까이 다가올수록 농염한 늦봄이 함께 오는 것 같았다. 정미가 눈을 깜빡이자 그 봄볕은 화려함 속에서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그 순간, 사철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얼마나 행운인가. 소성년식을 방금 끝냈으니, 내게는 한 여인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이지. 그리고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소녀가 어른들의 축복을 받으며 내 가슴속으로 들어오는구나.’
정철은 사철의 입가에 떠오른 따뜻한 웃음기와 그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이는 정미를 쳐다봤다.
정철은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정말 나쁠 수가 없는 일이야. 축복 외에는 다른 마음을 가져선 안 되겠어.’
“미야, 어서 할미 곁에 앉거라.”
사 노부인이 정미에게 손을 흔들었다.
정미는 들어올 때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민감하게 알아챘지만,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사 노부인에게 기대며 나긋하게 말했다.
“이모할머니, 안색이 아주 좋아 보이세요.”
사 노부인이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지다가 웃었다.
“그래? 작은 신의께서 그리 말하시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정미는 사 노부인이 자신을 놀리자 불평했다.
“이모할머니―”
대청 안의 사람들 모두가 웃었다.
다행히 정미는 수줍어하는 성정이 아니었고, 의술 방면에선 아혜에게 점점 감화되고 있었기에 함부로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도 차분하고 느긋한 모습이었다.
사 노부인과 허 씨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총애나 모욕을 받아도 당황하지 않다니, 소녀의 나이로는 아주 드문 일이야.’
사 노부인은 정미를 데리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사철에게 말했다.
“얘야, 미와 사촌 형제들을 데리고 나가 잘 접대해주거라.”
“예.”
사철이 일어났다. 그는 정미와 가까이 있었기에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정미, 나가자.”
정철과 한평 등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 * *
아랫사람들의 식사 장소는 동쪽 과원(*跨院: 중국식 가옥에서 안채 곁에 있는 뜰)에 있었는데, 사람도 많고 날씨도 좋아 아예 마당에 자리를 마련했다.
정동은 사철이 정미에겐 꽤나 신경 쓰면서 자신에겐 거리를 두는 것을 보고는 몰래 이를 갈다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철 오라버니, 정미 언니 말로는 ‘사효’라고 하는 사촌 언니가 있다던데, 오늘 왜 보이지 않는 거예요?”
사철은 다소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 나오지 않았어.”
정동은 영리했기에 오늘 사가 사람들의 태도를 돌이켜보자 곧장 사효에게 별일이 없다고 단정하고는 말했다.
“그럼 찾아가 봐야지. 그렇지, 정미 언니?”
정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언제 정동에게 사효 얘기를 했다고? 요즘 정동이 갈수록 이상해지더니, 우리 사이가 손잡고 병문안을 갈 정도로 좋아졌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정미가 침묵하자, 사철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 그 녀석은 몸이 좋지 않으면 안색도 나빠 보인다고 생각해서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거든.”
사철이 이리 말하자, 정동은 고집부릴 수 없었고 그에게 달콤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럼 알겠어요. 아직 사효 언니를 만나보지 못해서 아쉽네요.”
“앞으로 분명 기회가 있을 거야.”
사철이 미소지었다.
정동은 그 웃음에 가슴이 뛰어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사철이 고개를 돌려 정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정미에게 말하지 못했구나. 사효가 거듭 당부했는데, 정미에게 식사를 마치면 보러 와달라 했어.”
정동은 순간 웃음기를 거두며 몰래 손수건을 꽉 쥐었다.
‘방금 사람을 만나기 싫어한다고 했으면서, 정미는 만나겠다고? 좋아. 난 앞으로 사효를 싫어하기로 결정했어!’
정미는 식사를 거의 다 마쳤기에, 사철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금 가볼게요. 번거롭겠지만 사철 오라버니가 길 안내를 해줄 여종을 불러주세요.”
“내가 데리고 가줄게.”
사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인사했다.
“정미를 사효에게 데려다준 뒤 바로 돌아와서 계속 술을 마실 테니 꼭 기다려줘.”
“알겠어, 얼른 가봐.”
모두가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