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일파만파
환안이 떠나자 반어만 정미의 곁에 남게 되었다. 늦봄의 아침 바람에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정미는 흙 속의 시체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동안 그곳을 빤히 쳐다보다가, 정미는 왠지 한스러웠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했으면서, 나는 왜 아직도 이렇게 겁이 많은 걸까.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이 생각이 들자, 자신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정미는 다시 삽을 들고 흙을 파기 시작했다.
환안이 정철을 데리고 급히 돌아왔을 때, 흙에 묻힌 시체는 이미 반 정도 드러나 있었다.
“미미, 그만해.”
정철은 정미가 힘껏 땅을 파는 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왔다.
정미는 잠시 멍하다가, 둘째 오라버니가 보이자 그제야 두려움이 느껴져 삽을 버리고 정철의 품에 안겨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여기 죽은 사람이 있었어…….”
정철은 굳은 몸으로 정미가 자신을 안도록 두었고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괜찮아. 오라버니가 왔잖아.”
환안은 한쪽에 서서 둘째 공자의 품속에서 우는 주인을 보다가, 다시 반쯤 드러난 시체를 재빨리 훑어보고는 어리둥절해했다.
‘아가씨는 이렇게 무서워하시면서 왜 이렇게 빨리 파신 거람. 내가 시간을 많이 지체한 것도 아닌데.’
정철의 따뜻한 말에 정미는 차분함을 되찾고 아쉬운 듯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오라버니, 저 사람의 옷을 보니까 우리 백부의 하인인 것 같아.”
정철이 정미의 어깨를 토닥였다.
“미미, 일단 환안을 데리고 돌아가. 여긴 오라버니가 처리할게.”
정미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 오라버니. 내가 먼저 이 사람을 발견했으니 남아서 무슨 상황인지 알고 싶어. 안 그럼 돌아가서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야.”
정철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고, 삽을 들고 이어서 흙을 파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완전히 흙 밖으로 드러나자, 정철은 잠시 자세히 생각해보더니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
“미미, 가서 이 일을 어머니와 백모님, 다른 어른들께 알려. 오라버니는 여기서 기다릴게.”
정미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환안을 데리고 갔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백부의 어른들이 염송당에 모였고 정미와 정철에게 상황설명을 들었다.
정미는 우선 시체를 발견한 경과를 말했고, 정철이 이어서 말했다.
“그자는 백부의 사내 하인 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지기들 중 몇 번 봤던 자이지요. 아마도 ‘순자’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방금 화원에서 살펴봤는데, 치명적인 상처가 그의 목에 있었고 상처의 모양을 보아 아마도―”
정철은 잠시 말을 멈췄다. 모두의 호기심이 일었고, 맹 노부인이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이냐?”
정철은 꼿꼿이 서서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은 더욱 믿음직스럽게 다가왔다.
“아마도 가느다랗고 긴 날카로운 물건에 찔린 것 같습니다. 화원 뒤쪽에 묻힌 거로 보아, 손자가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르신들께서 놀라실까 말하기 망설여집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더 놀랄 게 뭐 있단 말이냐. 어서 말하거라!”
맹 노부인은 살인사건이 일어났지만, 보통의 노인들보다 더 침착한 모습이었다.
아가씨일 때나 시집을 왔을 때나, 맹 노부인은 늘 한 가족을 책임져왔다. 이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손에 달렸던 목숨이 어찌 없었겠는가. 물론 자신이 거주하는 곳에서 갑자기 시체가 나온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긴 했다.
정철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어떤 여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다가 비녀 같은 날카로운 물건에 찔려 죽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철의 말에 분위기는 더욱 난처해졌다.
‘하인이 내원에 들어가 여인을 해하려다 찔려 죽다니, 그럼 예전엔 얼마나 많은 여인이 당했다는 말인가?’
“이 일은 절대 퍼져나가선 안 된다!”
짧은 침묵 뒤, 맹 노부인이 이를 갈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 일이 퍼져나가면, 백부의 모든 여인의 순결이 훼손될 것이다.’
현장의 사람들은 일이 심각한 것을 알아채고 급히 ‘예.’하고 대답했다.
맹 노부인의 시선이 정미와 정철에게 꽂혔다.
“철아, 미야, 너희도 기억해두거라.”
‘철이는 괜찮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이 성정이 괴상한 손녀지. 입을 잘못 놀리면 백부의 명예가 한순간에 훼손될 게야.’
“알겠습니다.”
“됐다, 너희는 우선 물러나 보거라. 앞으로의 일은 어른들이 살펴볼 테니.”
정철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모님, 그 전에 더욱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음? 무슨 일이냐.”
맹 노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사동이 내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담의 어느 곳에 구멍이 있거나 무너진 곳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풀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손자는 곧바로 사람을 보내 조용히 담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철이의 말이 일리가 있구나.”
맹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회인백 부인 유 씨를 보며 말했다.
“이 일은 네게 맡기마. 입이 무거운 자를 골라 일이 절대 퍼져나가지 않게 하거라.”
“예.”
유 씨가 대답했다.
정철은 말해야 할 것은 모두 말했다고 생각해 정미를 살짝 잡아당기며 방에서 나왔다.
해가 막 높이 떠오르는 때였고 햇살은 따뜻했다. 하늘은 짙푸르고, 구름은 새하얗게 떠 있어, 어딜 봐도 아름다운 경치였다. 하지만 정미의 마음은 무거웠다.
‘사내가 내원에 몰래 들어와 사람을 해치려 하다니. 상상만 해도 무서워…….’
곰곰이 생각하던 사이, 누군가 정미의 손을 붙잡았다.
정미가 고개를 들어보자 정철이 따뜻하게 웃고 있었다.
“놀랐지?”
정미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하지만 화가 더 많이 나. 어떻게 그런 대담한 자가 있을 수 있지?”
정철이 웃었다.
“겁이 많은 사람이라도, 적절한 시기에 유혹을 당하면 이런 상상도 못 할 일을 저지르곤 하지. 그러니까 미미, 절대 다른 사람이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 믿으면 안 돼.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할 때, 네가 자신을 지킬 수 있거나,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끊을 수 있어야 해.”
정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나란히 걸어가던 중, 정미는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물었다.
“오라버니, 비서거로 가는 거야?”
정미는 눈가에 웃음기를 띠며 기뻐했다.
하지만 정철은 왠지 모르게 웃음을 거두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만 앉아있다 갈게.”
정미가 웃었다.
“그럼 얼른 가자. 화미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서 장우육(*酱牛肉: 소고기 조림)을 만들어 뒀거든. 지금 딱 먹기 좋을 거야.”
최근 정미는 활 연습을 하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해왔기에 고기를 충분히 먹어야 했다.
정철과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정미는 방금의 불쾌함이 모조리 풀렸다.
“화미가 만든 장우육은 큰주방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맛있어. 핏물을 몇 번이나 빼고, 말린 산사자도 몇 알 넣거든. 그래서 부드럽고 시원해.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그럼 먹어봐야겠네.”
정철이 정미의 체면을 살려주며 말했다.
* * *
비서거로 돌아온 후, 정철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을 따라 한 바퀴 걸었다. 그는 걸으면서 발을 뻗어 뭔가를 찾았고, 마침내 비서거의 뒤쪽에 멈춰 서서 무성한 풀을 헤집었다. 풀 너머 벽의 구멍을 발견하자 순간 눈빛이 굳어지더니 표정도 차가워졌다.
정미는 입을 가리고 깜짝 놀랐다.
“여기 왜 개구멍이 있지?”
정철은 몸을 일으켜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은 지 오래되었는데 이삼 년에 한 번씩 보수할 수도 없었으니, 이런 빈틈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다행히 이 구멍은 별로 안 크네.”
순자의 덩치로는 들어올 수 없는 크기였다.
그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미미가 그에게 뭔가 숨기는 게 있을까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겪은 뒤, 정철은 제 여동생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정철은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봐야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철은 안도의 한숨을 가볍게 쉬었다.
“미미, 오라버니가 이 구멍을 막아 줄 테니까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정미는 오라버니의 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거에 개구멍이 있다는 일이 어른들 귀에 들어간다면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오라버니, 순자를 찔러 죽인 사람이 누구일까?”
정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누구든지 간에, 순자는 자업자득인 거야. 미미, 이 일은 잊어. 호기심 가질 가치도 없는 일이야.”
범인이 처벌받을지 아닐지는 일단 둘째치고, 여인의 명예로만 봐도 정철은 이 일을 여기서 그만두고 싶었다.
어쨌든 간에, 그 순자에게 당한 여인은 무고하니까. 순자가 욕망을 이루었든 아니든, 그 여인이 누군지 밝혀진다면 앞으로 살아가기 힘들 터였다.
지금은 여인이 살기 너무 힘든 세상이었다.
그는 미미를 동정하면서도 다른 여인들의 삶도 덜 험난하기를 바랐다.
* * *
정철은 더 이상 이 일에 끼어들지 않았으나, 맹 노부인과 다른 집안어른들은 이 일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순자가 아무리 죽어 마땅한 놈이라도, 감히 사람을 죽이는 여인이 집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맹 노부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조사해보니 순자와 친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큰주방의 아주머니었다. 그녀는 나중에 맹 노부인의 여종인 아희를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니 회인백 부인 유 씨는 더 이상 조사할 수 없어 맹 노부인의 지시를 받으러 찾아왔다.
맹 노부인은 화가 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아희를 포함한 몇 명을 조용히 처리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더 조사했다간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럼 이 일은 숨길 수 없게 되고, 회인백부의 여인들은 외출도 할 수 없겠지.’
유 씨와 다른 집안어른들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이 일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입을 다물었다.
* * *
시체를 발견하고 이틀이 지나지 않아 내원에 또 일이 생겨났다.
둘째 아가씨를 모시는 파자 중 하나가 초조하게 달려와 한 씨에게 보고했다.
“부인, 둘째 아가씨께 큰일이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한 씨는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천한 것이 죽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나리가 그 천한 것을 죽이지 말라고 하셨으니 괴롭히기만 했는걸. 최근엔 얼음물로 목욕하는 것도 매일하지 않았으니 죽을 리 없지. 죽지만 않으면 아무 상관없고.’
파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부인, 둘째 아가씨의 온몸에 홍진이 났습니다. 몇 군데는 고름까지 생겼는데, 노노가 보기엔 마치―”
파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온몸을 떨며 기절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파자는 이를 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 아가씨의 병증은 천연두 같습니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백자 찻잔이 한 씨의 손에서 떨어져 산산조각났다.
짧은 충격 뒤, 한 씨는 벌떡 일어나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꾸짖었다.
“어서 처소로 돌아가 서 있지 않고!”
한 씨의 말에 파자는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억지로 힘을 쥐어 짜내 겨우 밖으로 나와서는 담장에 기대 울기 시작했다.
한 씨는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멈춰서서 여종에게 분부했다.
“어서 관아에 가서 나리를 모셔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