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71화 (171/375)

171화. 속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정미는 말을 마치자, 저도 모르게 오라버니의 아름다운 입술에 다시 시선이 꽂혔고 마음이 흔들려 급히 고개를 다시 떨구곤 아쉬워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날 충분히 입을 맞춰둘걸. 앞으론 할 수 없으니까.’

이 생각이 들자, 정미는 왠지 모르게 억울해져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정미는 어려서부터 둘째 오라버니와 함께했고, 둘째 오라버니는 그녀에게 가장 잘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미도 자신이 둘째 오라버니에게 가장 잘해주고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그렇게 사이가 좋더라도, 나중에 오라버니가 다른 여인에게 입맞춤을 받고, 다른 여인이 그의 아이를 낳아주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정미는 마음이 뒤틀려 몹시 아파 왔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정철의 표정이 변하더니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미미, 왜 그래?”

고개를 든 정미의 얼굴이 조금 창백했다.

“괜찮아. 갑자기 조금 어지러워서.”

“못난 계집, 왜 그래?”

용흔이 달려와 정철을 옆으로 밀쳐내고는 잔소리를 해댔다.

“날씬해지려고 일부러 밥을 먹지 않은 것 아니냐? 그럼 안 되지. 용남도 살이 쪄서 그랬던 적이 있는데, 배고파서 여러 번 기절했었다고. 한번은 마침 물가에서 산책하던 중에 기절해서 곧바로 물에 빠졌는데…….”

‘이런 오라버니가 있다니, 용남도 정말 가련하구나.’

정미는 왠지 모르게 괜찮아져 몰래 정철을 흘끗 쳐다보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니 나는 그래도 운이 좋아. 최소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오라버니가 있으니.’

소녀는 갑자기 끓어오르던 아쉬움과 아픔을 마음속 깊은 곳에 눌러버렸고,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용흔, 시끄러워요.”

용흔은 잠시 멈칫하더니, 정미와 말싸움을 할 수 있을 것 같자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녀의 뺨을 쥐려 손을 뻗으며 말했다.

“개 입에서 상아가 나올 리 있나―”

손이 반쯤 다가갔을 때, 정철이 막아 세웠다.

“세손, 미미가 조금 편치 않으니, 우선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사동을 가리켰다.

“이 사동은 얼굴도 새파래졌는데, 우선 이연원에 돌아가 기다리시지요. 제가 사람을 불러 약을 보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이만 돌아갈 테니.”

용흔은 오늘 더 이상 정미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다시 한 씨에게로 가고 싶지 않았다.

* * *

왕부에 돌아온 후, 용흔은 발을 들어 길상을 걷어차며 화냈다.

“네가 내 호사를 다 망쳤다! 말해, 도대체 무슨 일인 것이냐. 기회를 틈타 그 여종의 손을 만진 게냐?”

길상이 기어와 용흔의 허벅다리를 안고 우는 척했다.

“아이고, 세손. 소인은 억울합니다! 소인처럼 성실한 사람이 어찌 그런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그때 세손께서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 망할 계집이 얼마나 악랄한지요. 손에 있는 화살들을 제 얼굴에 던져버렸다고요. 저, 저를 죽여서 멸구할 생각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멸구?”

용흔이 멈칫하더니 손을 뻗어 길상을 밀쳤다.

“허튼소리 하지 마라. 넌 회인백부에 처음 가본 건데, 그 여종이 네가 누군지 알 리가. 처음 만난 사람을 멸구하려 하다니, 네가 그리 유명한 줄 아느냐?”

길상은 얼굴을 막으며 몹시 억울해했다.

“처음 만난 게 아닙니다. 세손, 전에 제가 춘화를 사드리러 갔던 걸 기억하십니까? 제 손등을 다 긁어버리고 마지막 춘화를 뺏어간 녀석이, 바로 그 여종이라고요!”

용흔은 길상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다가 크게 분노했다.

“그런 것이더냐? 그래서 멸구하려 했군! 안 되겠어, 가서 정미에게 알려야겠다. 곁에 그런 후안무치한 여종이 있다니, 너무 위험해!”

‘만약 그 망할 계집이 길상에게서 춘화를 뺏어가지 않았다면 내가 불억루에 갈 일도 없었을 거고, 불억루에 가지 않았다면 남안왕 숙부님과 정가의 둘째 형님도 마주치지 않았을 텐데! 어쨌든, 모두 그 망할 여종의 잘못이야. 어서 정미에게 알려서 그 여종을 내쫓게 해야겠어.’

용흔은 생각할수록 화가 나 밖으로 나가려다가 옷깃을 붙잡혔다.

“세손, 가시면 안 됩니다.”

용흔이 눈을 부라렸다.

“어찌 네 얼굴이 벌집처럼 엉망이 되었는데 나를 막는 것이냐? 그런 여종은 엄벌에 처하지 않으면 나중에 주인에게 화를 입힐 것이다!”

주인이 당당하게 얘기하자, 길상은 참고 참다가 결국 말했다.

“세손, 생각해보십시오. 소인이 왜 춘화를 사러 갔습니까?”

“나한테 보여주려고 그랬지.”

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러니―”

“응?”

용흔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손을 들어 길상의 뺨을 내리치려고 했다.

“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거라!”

길상은 가슴이 철렁하여 눈을 감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 여종이 춘화를 산 게 본인이 보려고 그랬던 걸까요?”

용흔은 한참 동안 눈만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 말은, 저, 정미가 그걸 보려고 했다는 뜻이냐?”

길상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흔은 화가 나 얼굴이 붉어져 매섭게 길상을 노려봤다.

‘어찌 못난 계집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못난 계집이 여종을 시켜 춘화를 살 리 없잖아!’

길상은 용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용감하게 물었다.

“세손, 소인의 말이 옳은 것 같지 않으십니까?”

용흔은 입을 뻐끔거렸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못난 계집이 뭐하러 춘화를 보려는 거지?’

“세손―”

용흔은 힘없이 손을 휘저었다.

“우선 물러나거라.”

예사롭지 않은 일을 맞닥뜨린 용흔은 그저 조용히 있고 싶었다.

* * *

그 시각 비서거 안.

정미 또한 어째서 환안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 아가씨, 무슨 말씀이라도 하세요…….”

환안이 조심스럽게 정미의 옷깃을 당겼으나 정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름다운 여종은 그런 주인의 반응에 놀라 견딜 수 없어 눈물을 글썽였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한참 뒤, 정미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안, 다음에 경왕세손을 만났을 때, 나도 화살을 그 얼굴에 던져버릴까? 어때?”

환안이 털썩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아주 화나신 걸 소인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소인이 잘못한 것이 맞습니다. 그렇게 해선 안 됐어요. 저는 그저, 저는 그저 그 사동을 보자마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네 잘못이 아냐.”

환안의 의아한 눈빛에 정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다음에 경왕세손을 만나면, 나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

‘그 춘화는 끈질기게도 나를 괴롭히는구나. 앞으로 어떡하지?’

정미의 답답한 마음에 어둠이 드리웠다.

* * *

다가오는 4월의 밤, 달은 밝고 별은 드문드문하며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 그야말로 ‘월상류초두(*月上柳梢頭 : 달이 버드나무 끝에 걸리고), 인약황혼후(*人約黃昏後 : 황혼이 지나고 만나기로 약속하였네)’와 어울리는 때였다.

비서거와 멀지 않은 쇄옥거 안은, 바로 이 시구와 같은 상황이었다.

이번에 순자는 창을 열 필요가 없었다. 정요가 애초에 창을 닫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품 안의 물건을 쥐고 빙긋 웃다가 방 안으로 넘어 들어왔고, 정요는 침상 옆에 단정히 앉아 그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침상 머리맡의 등불로 정요의 기쁜 표정을 본 순자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그는 젊은 부인들과 처녀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귀녀까지 자신을 잊지 못할 줄은 몰랐다.

순자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만지며 생각했다.

‘혹시 내가 둘째 아가씨의 첫 번째 사내라서 그런 건가?’

이렇게 생각하니, 순자는 기분이 몹시 좋아져 빠르게 걸어갔고, 말투마저 고상해졌다.

“둘째 아가씨,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정요가 따뜻하게 웃었다.

“왔으면 됐다.”

이 웃음에 순자는 온몸이 반쯤 마비되는 것 같았고, 손을 뻗어 정요의 손을 붙잡았다.

정요는 반항하지 않고 눈을 들어 순자를 쳐다봤다.

“어젯밤 말한 물건은, 가져왔니?”

“가져왔습니다.”

순자는 급히 종이로 싸맨 물건을 품에서 꺼내 정요에게 건넸다.

어젯밤 정요가 말한 물건들은 약방에서 자주 보이는 것들이라 그리 비싸지 않았고, 정요가 준 돈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여인의 환심을 살 수 있으면서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을 어찌 거절하겠는가? 게다가 순자는 정요와 몇 번 더 어울리고 싶었다.

순자는 이런 생각을 하며 물었다.

“아가씨, 빠진 게 없지요?”

정요는 이미 포장을 열고 자세히 살펴보는 중이었고, 이내 진심으로 웃으며 말했다.

“없다. 아주 잘했구나.”

정요는 말하면서 다시 아무렇게나 포장을 접고 침상 머리맡에 있는 장에 그것을 밀어 넣었다.

“아가씨께서 만족하셨으면 됐습니다.”

순자는 몰래 침을 삼키며 전날 밤 눈 앞의 여인의 뇌쇄적인 모습을 떠올렸고,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껴안았다.

정요는 반항하는 대신 오히려 스스로 순자를 껴안았고, 그가 자신을 침상으로 데리고 가도록 두었다.

잠시 후,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두 파자가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둘 중 하나는 급한 와중에도 등을 들고 온 덕에, 방 안의 상황을 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치며 등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정요는 손에 금비녀를 들고 침상 머리맡에 웅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변태가 창을 넘어 들어왔어. 어, 어떻게 해야 하지?”

깜짝 놀라던 파자들 중 조금 더 용감한 파자가 곧바로 등을 밝혔고, 방 안은 순식간에 환해져 공포스러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인 차림을 한 사내가 목을 감싼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고,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는 피가 솟구쳐 나와 바닥을 온통 적셨다.

사내의 몸은 아직 떨리고 있었지만 아주 미약한 떨림이라 한눈에 봐도 곧 죽을 것 같았다.

두 파자가 정신을 차렸을 땐, 그 사내는 이미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한참 뒤, 한 파자가 용감하게 앞으로 다가가 한 번 살펴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앞뜰의 문지기 순자잖아!”

두 파자는 서로를 마주 보다가 동시에 정요를 쳐다봤다.

정요는 여전히 금비녀를 쥐고 있었고, 금비녀를 따라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요는 그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집안의 사람이야?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해?”

두 파자는 평소엔 흉포했지만, 이런 일을 맞닥뜨리자 깜짝 놀라 아무 의견도 낼 수 없었다. 한참 뒤에야 둘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둘째 부인께 알립시다.”

이 말에 정요가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어머니께서 아시면 내가 어찌 살 수 있겠어? 저 변태가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백부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내 죽음으로 죄를 갚을 수밖에 없을 거고, 너희들은 이후 어떻게 될지도 몰라.”

두 파자는 안 그래도 놀란 상태에서 정요의 말을 들자니 다리에 힘이 풀렸고 서로 눈을 마주치다가 각자의 생각을 알아챘다.

‘둘째 부인께 알려선 안 돼. 이런 추악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둘째 부인께서 아시면, 둘째 아가씨는 분명 좋은 처지가 되지 못할 거고, 우리는 죽지는 않더라도 예전에 둘째 아가씨를 모시던 시종들처럼 벙어리가 되어 팔려나갈 거야.’

정요의 낮은 울음소리에 한 파자가 말문을 열었다.

“둘째 아가씨, 이 일은…… 둘째 부인께 알리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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