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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169화 (169/375)

169화. 불억루(不憶樓)

정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몇 걸음 다가왔다.

“오늘 밤 다시 찾아온 건, 내가 보고 싶어서지?”

순자가 눈을 깜빡이며 묵인하자, 정요는 갑자기 냉소했다.

“하지만 네 신분과 내 신분을 보아라! 아무리 내가 방 안에서 요양하고 있더라도, 결국엔 집안의 둘째 아가씨다. 그리고 너는 그저 하인일 뿐이지!”

순자는 순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둘째 아가씨께서 이미 내 신분을 알아채신 건가? 지금 당장 멸구 해야 하나?’

순자는 흉악한 눈빛으로 정요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주 가까이 있었기에, 그가 망설임 없이 행동한다면 성공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순자의 눈빛을 알아챈 정요는 웃으며 손목을 들었다.

“이게 뭔지 아느냐?”

순자는 고개를 숙여 쳐다보았다. 정요의 하얗고 얇은 손목엔 은방울이 달려있었다.

정요는 손으로 은방울을 매만지며 가볍게 웃었다.

“만약 내 손목이 움직이면, 이 은방울 소리가 얼마나 클 것 같으냐?”

순자는 정말로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어젯밤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하늘의 실수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럼, 무슨 뜻이신지요?”

순자는 그 얇은 손목을 빤히 쳐다보며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순자는 가시를 가진 미인의 고귀한 신분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유혹적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확실히 사람은 자극에 더욱 끌리기 마련이었다.

정요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 그 생각은 거두거라.”

순자는 이를 갈다가 창가로 걸어갔다.

“잠깐, 아직 말을 다 하지 않았어.”

그에게로 풍겨오는 향기로운 바람엔 냉기가 담겨있었고, 순자는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는 여인이 더욱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자는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섰는데, 뜻밖에도 정요는 그의 아주 가까이 와있었다. 두 사람의 콧김이 닿을 정도였다.

정요는 손을 높이 쳐들어 순자의 얼굴을 가린 천을 잡아당겼다.

순자는 깜짝 놀랐다.

순자의 얼굴을 정확히 본 정요가 웃었다.

“아주 흉악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순자는 당황했고, 마음속의 황공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정요는 까치발을 들고 순자의 뺨에 입맞춤을 했다.

“둘째 아가씨―”

순자는 둘째 아가씨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설마 둘째 아가씨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사내의 맛도 보지 못하고 갈 뻔했는데, 내가 나타나서 마침 뜻이 맞았던 것인가? 그래, 둘째 아가씨 같은 여인은 여인 중에서도 최고이고, 사람을 홀리는 걸 타고 난 것 같은데, 어찌 평범한 여인처럼 사내를 모실 수 있겠어.’

“내일 밤 다시 와.”

정요가 순자의 귓가에 다가가 난초 같은 숨결을 뱉었다.

매일 억지로 얼음물로 목욕을 시켰지만, 아마 정말로 죽어버릴까 봐 겁이 났는지, 요 이틀 동안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온몸엔 맑고 깨끗한 향기가 맴돌았다.

순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둘째 아가씨―”

정요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입술을 눌렀다.

“내 말 들어. 내일 밤 올 때, 나 대신 어떤 것들을 가져 와 줘. 네가 가져와 주기만 하면, 앞으로…… 계속 너를 기다리마.”

“뭘 가져오라는 겁니까?”

순자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계속 너를 기다리마.’라는 말에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당귀, 복령, 계란, 땅콩, 갈자초…….”

정요는 하나하나씩 읊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하겠느냐?”

순자는 정요의 말을 다시 반복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게 왜 필요하신데요?”

정요는 웃음을 머금고 순자를 흘끗 쳐다봤다.

“역시 젊어서 그런지 기억력이 좋구나. 이건 당연히 내 몸을 위해서야. 봐, 이 손이 얼마나 차가운지. 계속 이 꼴이면 정말 며칠도 견딜 수 없을지 몰라―”

정요는 한 손을 순자의 얼굴에 비볐다. 분명 뼛속까지 차가운 손인데도, 순자는 온몸에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그는 목소리마저 잠기었다.

“둘째 아가씨―”

정요는 손을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며 작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내일 밤 그 물건들을 가져오면, 네게 몸을 맡기지.”

“저, 저를 원망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순자는 믿기지 않았다.

정요는 잠시 멈칫하더니, 애처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원망하냐고?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니. 하지만 원망이 무슨 소용이 있지? 내 처녀의 몸은 이미 네게 가버렸는데, 너를 원망한다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것이냐? 뉘우치고 후회하는 것보다 멀리 보는 게 낫지.

최소한 앞으로 네가 몸조리를 할 수 있는 물건을 가지고 오면, 내가 좀 더 오래 살 수 있으니 말이야. 누군가 내가 죽길 원한다면, 절대 그 소원을 이루게 둘 순 없지!”

지척에 있는 미인의 말에 순자는 갑자기 동정심이 들었다.

‘둘째 아가씨의 처지는 확실히 좀 가련하긴 해.’

“둘째 아가씨, 걱정 마세요. 내일 밤 그것들을 모두 가지고 오겠습니다.”

“자, 이걸 가지고 가거라.”

정요가 깨진 은자 한 조각을 순자의 손에 쥐여 주자, 순자는 조금 망설였다.

“이건―”

“어서 가져가. 돈이 없으면 어찌 물건을 살 수 있겠느냐? 제생당엔 가지 말고. 실마리를 잡힐 수 있으니.”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순자가 창을 넘어 떠나자, 정요는 창을 잘 닫고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 * *

“청겸?”

정철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예, 왕야. 분부하실 게 있으십니까?”

두 사람은 높은 단상에 앉아, 호위들이 열기에 차 권법을 겨루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남안왕은 상아색의 포자(*袍子: 소매가 길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중국 고유의 긴 옷)를 입고 있었다. 밝은 태양 아래 그의 마른 몸은 옷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야위어 보였고, 입가의 옅은 웃음엔 잘 드러나지 않는 야유가 담겨있었다.

“청겸, 요 이틀 동안 어찌 넋이 나간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야? 설마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게냐?”

정철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 걱정을 끼쳤군요. 아무런 걱정거리도 없습니다.”

“정말이냐?”

남안왕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정철은 눈을 내리깔았다.

“왕야께 거짓말을 할 리가요.”

그러자 정철의 어깨에 살짝 차가운 손이 떨어졌다.

남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됐다, 본왕과 함께 갈 곳이 있다.”

정철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남안왕을 따라 단상에서 내려왔다. 뜻밖에도 남안왕은 정철을 데리고 왕부를 나왔다.

마차 안, 정철은 바깥을 내다볼 수 없어 그저 머릿속으로 마차가 가는 방향을 추측했다.

정철은 타고난 방향감각을 가졌지만, 마차는 아주 많은 모퉁이를 돌았고 머릿속의 노선이 점점 복잡해져, 그저 마차가 가는 곳이 자신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는 것만 확신할 수 있었다.

마차는 이각(*二刻: 30분)의 시간을 달린 뒤에야 마침내 멈춰섰다.

남안왕이 웃으며 말했다.

“내리거라.”

정철은 먼저 마차에서 내려 손을 뻗어 남안왕의 하차를 도왔고, 그제야 도착한 곳을 살필 수 있었다.

아름다운 꽃밭이 눈에 들어왔고, 그 사이로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들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여인들의 장신구가 짤랑이는 소리를 내었고, 아름다운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정철은 멍해졌다.

남안왕은 정철의 모습을 보고 웃었다.

“청겸, 맞혀 보거라. 여기가 어디인 것 같으냐?”

정철은 입을 뻐끔거리며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추측할 필요도 없이, 경험만으로도 여기가 청루(*青楼: 기생집)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책으로 돈을 벌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어찌 남녀의 일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알 수 있겠는가? 그는 대업을 위해 몇 번이고 몰래 청루로 가 비결을 찾아왔었다.

이 화원은 몹시 우아해 보여서 평범한 청루와는 달랐지만, 정철은 눈썰미가 좋았기에 여인들의 모습과 행동만 봐도 양가(*良家: 지체와 교양이 있는 집안)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남안왕이 웃었다.

“널 당황하게 한 것 같구나. 청겸의 성정이라면 이런 곳에 오지 않았을 것 같아서. 여긴 행원(*行院: 연극을 하던 관기(官妓)들의 수용소)이다.”

남안왕은 말을 마치고 웃으며 정철을 바라보았다.

정철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남안왕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는 몸이 좋지 않아, 껄껄 웃어도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그러나 그 속의 기쁨은 확실히 느껴졌다.

“두려워 말거라. 본왕은 네가 요 이틀 동안 내 왕부에 지내며 날이 어두워져야 돌아가려고 하는 걸 보니, 그곳에서 심심하여질 바에야 여기서 노래를 듣고 차를 마시러 온 것이니.”

이때, 어떤 여인이 급히 그들을 맞이했다.

“남 공자께서 오셨군요,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소매(小梅), 동랑(冬娘)은?”

소매에게 남안왕은 단골손님이었기에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오늘 어떤 젊은 공자님께서 오셨는데, 꼭 청청(靑靑)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공자께선 자주 오시니, 청청이 절대 손님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그 공자께선 아주 대단하신 분이더군요. 그래서 동 안주인께서 직접 권하러 가셨답니다.”

“우리와 함께 가보지.”

남안왕이 담담하게 말하자, 소매는 궁금한 듯 정철을 흘끗 쳐다보고는 급히 말했다.

“저를 따라서 오세요.”

정철은 조용히 두 사람을 따라가며 곁눈질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 행원은 아주 정교하고 풍아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2층 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이 보이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께서 어느 집안의 귀한 분이신지는 제게 중요치 않습니다. 저희 불억루에 오셨으니, 여기의 규칙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저희 아이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쪽은 손님과 외출을 하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하지 않는 쪽이지요. 청청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러니 공자께선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어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루의 안주인 주제에 감히 이 몸에게 그리 말한 것이냐? 불억루를 닫고 싶은 것 아니냐? 정말 웃기는구나. 청루를 하면서 뭐 그리 고상한 척을 하는지. 오늘 이 몸은 꼭 청청을 데리고 나가야겠다. 네가 허락하든 허락하지 않든 그건 전혀 중요치 않아!”

소년의 목소리에 정철과 남안왕은 서로를 마주 봤다.

‘아는 목소리라는 걸 정말 인정하기 싫구나!’

남안왕은 고개를 젓더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그에게로 화병이 날아와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정철은 손을 뻗어 그 화병을 받았다.

“오늘 여기를 다 때려 부술 테다―”

안에 있던 소년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멈춰서더니, 귀신을 본 마냥 문쪽을 쳐다봤다.

남안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 들어갔다.

“왕…… 왕…… 왕……!”

용흔은 한참 동안 말을 더듬다가 결국 어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고, 남안왕 뒤에 있던 정철을 보자 더욱 울고 싶어졌다.

‘하늘도 잔인하시지. 나는 그저 그 망나니들에게 더 이상 놀림을 받지 않기 위해 어른들의 일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서 사동을 보내 그림책을 사오라고 했지만 책도 사지 못했고, 사동의 손은 누구 집인지 모를 하인에게 참혹하게 할퀴어져 왔다고.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게 되었고, 이 불억루가 풍아한 편이라는 것을 어렵사리 알게 되었는데, 아직 명기는 보지도 못했는데 왕숙님과 정가의 둘째 형님을 마주치게 되다니!

큰일이다, 큰일이야. 왕숙님은 분명 이 일을 어머니께 알릴 테지. 무조건 매를 맞겠어! 아냐, 하지만 그건 최악의 일은 아니다. 최악인 것은 정가의 둘째 형님을 마주쳤다는 거야. 만약 못난 계집에게 알려지면 어떡하지!’

용흔은 처음으로 긴장이라는 심정을 알게 되었고, 두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남안왕이 살짝 웃었다.

“우리는 이미 만나본 적 있는 사이인데, 잊었는가?”

용흔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잊, 잊었습니다.”

남안왕은 용흔을 지나쳐 방 안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동랑, 오늘 네 곡조를 들으러 왔건만, 아는 사람을 만났으니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이 어린 형제의 나이는 아직 이런 곳에 올 때가 아니니 말이네.”

동랑은 남안왕을 쳐다보며 눈에 스치는 아쉬움을 감추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남 공자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남안왕이 갑작스럽게 정철을 데리고 이곳에 온 터라, 정철은 아직 마음도 제대로 가다듬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용흔까지 만나고 말았다.

정철은 숙부가 조카를 훈계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차갑게 용흔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왕야, 그럼 저는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형님, 형님, 잠깐 기다려―”

용흔은 남안왕을 뿌리치고 급히 정철을 쫓아갔다.

남안왕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한참 후에야 조용히 마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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