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식수지미(食髓知味)
두 사람은 동초간을 나섰다. 맹 노부인은 황 씨가 가려는 것을 보고 급히 일어나 배웅했고, 돌아와서 정미에게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정미는 은표 육백 냥을 꺼내주며 말했다.
“황 부인께서 제가 만든 부수를 드셨어요. 이건 진료비예요, 조모님께서 받아주세요.”
“어찌 진료비를 받을 수 있느냐!”
맹 노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진료비를 건네받았으나, 곧 그 위에 적힌 액수를 보고는 조용히 소매 안으로 넣었다.
정미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정미도 힘들게 번 돈을 조모에게 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백부는 아직 분가하지 않았으니 자손에겐 사유 재산이 있을 수 없었다.
“은표는 일단 이 할미가 가지고 있으마. 만일 네가 병을 고치지 못하면, 너를 데리고 사죄하러 가야 하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손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맹 노부인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미가 나가게 두었다.
* * *
태사부 황 소경 댁.
황봉은 황 씨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맞이하며 신나서 물었다.
“큰누님, 어떻게 됐어?”
황 씨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낮게 꾸짖었다.
“여기서 함부로 떠들지 마. 방으로 돌아가서 말해!”
남매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황봉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큰누님, 정가의 셋째 아가씨가 진찰을 봐주었어?”
황 씨가 그를 흘끗 노려봤다.
“봤어.”
“어때?”
황봉이 손을 뻗어 황 씨를 잡아당기자, 황 씨가 그의 손을 때려서 치운 후 담담하게 말했다.
“뭐가 어떻기는. 이상한 물을 한 잔 마셨을 뿐이야. 나를 속인 걸지도 모르지.”
“당연히 아니지! 큰누님, 정가의 셋째 아가씨는 정말 대단하다고. 구천현녀와 다름없어!”
황 씨는 불신 가득한 얼굴로 황봉을 훑어보았다.
“구천현녀? 황봉, 그 아가씨의 외모가 아름다운 것만 보고 숭배하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아냐!”
황봉은 다급해졌다.
“큰누님, 어째서 나를 믿지 않는 거야!”
“너를 믿으라고? 말해봐. 네가 이 나이가 되도록 언제 점잖게 군 적이 있니? 매일 빈둥거리고 게으른 놈들과 어울려 다니기만 했지!”
황봉은 화가 나서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정가의 셋째 아가씨와 무슨 상관이야. 큰누님, 그 아가씨의 능력은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나도 알아. 그 아가씨가 죽은 부인에게서 아이를 받은 일 말하는 거 아냐? 그런 일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인걸. 네가 직접 보았다고 해도 믿을 수는 없어.”
황봉은 마음이 급해져 얼굴이 붉어졌고 이를 갈며 말했다.
“큰누님, 그냥 솔직히 말할게. 나는 정가의 셋째 아가씨가 죽은 부인에게서 아이를 받은 걸 직접 본 것뿐만 아니라, 그, 그 아가씨가 직접 내 상처를 치료해주기도 했다고!”
황 씨는 깜짝 놀랐다.
“다쳤다고? 언제 있었던 일이야?”
“쉿― 큰누님, 목소리 낮춰!”
황봉은 당황하며 문밖을 흘끗 쳐다봤고,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절대 아버지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안 돼.”
“알겠어.”
“그러니까 얼마 전에 나랑 화량 무리가 사냥을 갔잖아, 그때 실수로 곰이랑 호랑이를 마주쳤는데―”
“헉―”
황 씨가 숨을 들이켜고는 황봉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곰이랑 호랑이를 마주쳤다고?”
“아이고, 큰누님. 살살 해, 아프다고!”
황봉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황 씨는 그제야 손을 놓고 그의 귀를 꼬집으며 말했다.
“어서 똑바로 말해!”
“말하고 있잖아!”
황봉은 억울한 듯 중얼거렸고 이어서 말했다.
“그때 나도 놀라서 멍해졌고, 얼른 달아나려고 했거든. 그런데 그 곰이 나를 쫓아와서 내 팔을 한입 물어버린 거야!”
“봐봐!”
황 씨는 곧바로 황봉의 소매를 걷었다. 그러나 조금의 흉터도 보이지 않았다. 급히 다른 쪽 소매를 걷어본 황 씨가 멍하니 말했다.
“아무 상처도 없는데…….”
황 씨는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꾸짖었다.
“이 자식, 또 날 속인 거지?”
“아냐, 큰누님. 이쪽 팔이야. 그때 하마터면 물어뜯길 뻔했다고. 피도 멈추지 않았고……. 다행히 정가의 셋째 아가씨가 나한테 부수를 써주었어. 그걸 먹고 났더니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이 팔의 상처가 점점 아물더니, 조금의 흉터도 남지 않은 거야.”
“정말로?”
황봉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봐, 내가 굳이 정가의 셋째 아가씨를 추켜세울 것 같아? 큰누님의 배 속에 있는 아기는 내 친조카라고. 만약 내가 그 아가씨의 능력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면, 어찌 내 친조카를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겠어?”
황 씨는 황봉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꾸짖었다.
“셋째 아가씨가 너를 구해줬는데, 어찌 얘기도 하지 않았던 거야? 우리 집에서 조금의 표시도 하지 않았으니 너무 실례잖아.”
황봉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아시면 걱정하실까 봐 그랬지.”
황 씨가 그를 한 번 노려봤다.
“아버지가 너를 때리고, 앞으로 외출해서 소란을 피우지 못하게 하는 게 두려웠던 거겠지.”
“어쨌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나는 누님을 위해서 말해준 거라고.”
“그래, 그럼 네가 내게 찾아준 작은 신의가 쓸모 있는지 지켜볼게. 만약 정말로 내가 순조롭게 아이를 낳는다면, 네 매형의 질풍마는 네게 주마.”
“정말?”
황봉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언제 너를 속인 적 있니? 됐다. 나랑 어머니를 뵈러 가자. 식사를 하고 난 뒤엔 다시 장가로 돌아가야 해.”
* * *
회인백부 안, 누군가 혼이 나가 있었다.
곧 4월이 되어갔고 낮이 점점 길어졌으며 밤은 점점 짧아졌다. 앞마당 문지기인 순자에겐 오늘 하루가 유난히 고달팠다.
순자는 어젯밤의 즐거움이 떠오를 때마다 자신의 다리를 주체할 수 없어 뒤뜰로 달려가고만 싶었다.
그도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어젯밤은 그저 운이 아주 좋아서 둘째 아가씨의 몸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겠지. 만약 오늘도 찾아간다면, 둘째 아가씨도 뭔갈 준비해놓아 들통이 날지도 몰라.’
하지만 정요의 몸은 정말로 황홀했다. 순자도 그저 애송이가 아니었기에, 그동안 처녀와 젊은 부인들을 많이 건드리곤 했다. 하지만 정요처럼 닿기만 해도 혼이 나가 차라리 그녀의 몸 위에서 죽을지언정 절대 내려오고 싶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이제야 여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순자야, 순자,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옆에 있던 사람이 그를 밀쳤다.
순자는 정신을 차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 생각도 안 했다고?”
그 사람은 시시덕거리며 순자를 건드렸다.
“너 좀 봐. 이 꼴이 됐는데, 아무 생각도 안 했다고?”
순자가 고개를 숙이자, 바짓가랑이 사이에 천막이 처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얼굴이 빨개져 그 사람에게 침을 뱉었다.
“다 사내뿐인데, 이게 뭐가 우스운 일이라고! 됐어, 너희는 문이나 지키고 있어. 나는 볼일 좀 보고 올 테니.”
순자는 그곳에서 나와 빠르게 안마당과 바깥뜰 사이에 있는 담벼락으로 갔고, 그곳을 가린 잡초들을 헤쳐 개구멍으로 들어갔다.
* * *
아희는 어제 순자와 만나지 못한 탓에 계속 마음이 허전했고, 일이 없는 틈을 타 두 사람이 늘 만났던 장소를 어슬렁거리던 중,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을 들었다.
“아희, 아희―”
아희는 크게 기뻐하며 소리를 따라갔다.
“순자, 네가 왜 여기 있어?”
순자는 입에 꿀을 바른 듯 말했다.
“마음이 통한 거지. 네가 보고 싶었어.”
순자는 준수한 외모에 아첨을 잘했다. 아희가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옷깃을 움켜쥐자, 순자는 그런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이 참, 순자. 뭐 하는 거야?”
“내 아희야, 만져봐. 하루 종일 네 생각만 했다고.”
“안 돼, 대낮에 무슨―”
아희가 못 이기는 체 대답했다.
순자는 정요 생각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기에 지금이 대낮인지 밤인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희를 끌어안은 뒤,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진행했다.
일각 후, 순자가 일어나서 말했다.
“아희,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어. 더 이상 늦으면 안 되니까 다음에 다시 만나자.”
아희는 이미 만족스러웠지만, 순자가 오늘 왜 일을 끝내기도 전에 바지를 올리고 가버리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순자, 너, 너 왜 그래?”
순자는 욕구를 풀지 못해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이 아희를 다독였다.
“정말 일이 있어. 그게 아니라면 이런 꼴로 왜 가려고 하겠어. 내 아희야, 다음엔 우리 하루 종일 붙어있자.”
아희에게서 벗어나 개구멍에서 나온 순자는 힘없이 벽에 기댔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둘째 아가씨를 맛본 뒤로 다른 여인은 여인으로 보이지 않아. 이걸 어떡하지, 스님이 되어야 하나?’
온종일 괴로워하던 순자는 밤이 되자 더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몰래 일어나 다시 쇄옥거로 향했다.
이번에 그는 창밖에서 한참을 기다렸고, 안에 아무 기척이 없는 걸 확신하고서야 어제처럼 창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옅은 푸른색의 얇은 휘장은 달빛처럼 흐릿해 보였고, 안엔 그가 종일 그리워하던 모습이 비추었다.
순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가갔다.
휘장 앞에 한참 서 있던 순자는 둘째 아가씨가 꼼짝도 하지 않자 그제야 휘장을 열고 고개를 숙여 그 미인을 한 번 쳐다봤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한 손수건을 꺼내 정요의 입에 쑤셔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정요가 갑자기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깜짝 놀란 순자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요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거라.”
흔들리는 촛불이 정요의 얼굴을 새하얗게 비추었다. 핏기 하나 없는 그 얼굴은 얼음과 눈으로 만든 옥인(玉人)처럼 조금의 저속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자는 조금 두려워졌다.
‘설마 요괴가 변한 건 아니겠지? 참으로 사악하구나!’
정요는 자신의 뜻밖의 행동에 다시 찾아온 사내가 잠시 망설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휘어잡지 못하면, 어제처럼 넘어가고 말 것이다.’
어두운 불빛 아래, 정요는 아주 따뜻하게 웃었다.
“오늘 밤에도 찾아올 걸 알고 있었다.”
정요는 어제 한 씨가 사람을 보내 자신을 해치려 했고, 만약 그 사람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오늘 밤에도 다시 찾아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에 사내가 찾아온 것은 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아셨다고요?”
순자는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고, 둘째 아가씨가 이미 어느 곳에 사람을 숨겨 언제든 자신에게 달려들어 묶어버리고, 부인께 데려갈까 봐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성인 남자였지만 둘째 아가씨를 지키는 두 파자는 몸집이 컸기에, 그 혼자서 세 사람을 막을 순 없었다.
정요의 말에 순자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정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나를 모욕한 이 사내의 나이는 그리 많지 않나 보군. 그래도 사오십 된 늙은이보단 낫구나.’
“그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너를 기다렸지. 일어나서 앉거라.”
순자는 기어 일어나 의자에 앉았고 경계하며 정요를 쳐다봤다.
정요가 웃었다.
“방 안엔 너와 나 외엔 없다.”
그러며 손가락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두 파자는 저쪽 방에 자지. 사실 내가 소리를 지르기만 하면, 곧바로 올 테고.”
순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둘째 아가씨가 자신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젯밤은 둘째 아가씨가 잠들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둘째 아가씨의 입을 막아 조금의 기척도 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큰일이 나는 것은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