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진료비
정미는 화를 꾹 참고 따뜻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조모님, 황 부인께선 제게 진찰을 보러 오셨으니 제게는 환자입니다. 환자라면, 당연히 의원의 규칙에 따라야 하지요. 이건 황 부인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맹 노부인이 또 꾸짖으려고 하자, 황 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셋째 아가씨께서 그 규칙을 말씀해주세요.”
맹 노부인은 사납게 정미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이 못된 계집. 평소에 사고만 치다가 모처럼 능력이 생겼거늘, 그걸로 남을 애먹이다니.’
황 부인의 부군은 하급 관원이었지만, 그녀의 시아버지는 내각의 재상이었고, 재상의 권력을 가진 조정의 중신이었다.
‘만약 미움을 받게 된다면, 아주 성가시게 될 것이야! 이 망할 계집. 태도를 좀 누그러트려 백부에게 인연을 맺게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정말이지 일을 성공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망치기만 하는 염치없는 계집이로구나!’
정미는 맹 노부인의 화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황 씨의 냉담함은 더욱이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아픈 사람은 자신이 아니니, 진찰을 받으러 와서도 윗사람 행세를 할 텐가?
‘부적을 만들 때마다 정혈을 써야 하는데, 환자에게 굽히기까지 한다면 너무 분하지.’
정미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첫째, 부인과가 아니면 진료를 보지 않는다. 둘째, 생사존망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진료를 보지 않는다. 셋째,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진료를 보지 않는다.”
“허튼소리!”
맹 노부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정미를 노려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황 씨에게 말했다.
“이 계집이 아직 어려서 아무렇게나 구는 게 습관이 되어 그렇습니다. 이 아이의 농담은 듣지 마시고, 어디가 불편한지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경고하듯 정미에게 눈을 부라렸다.
“미야, 어서 황 부인께 사과드리지 않고 뭐 하느냐.”
‘이 못된 계집은 왜 이렇게 답답한 걸까? 태자비의 지위가 위태롭고, 나중에 태자가 즉위한 뒤 새로운 황후를 세운다면, 이런 조정의 중신들이 태자비를 위해 말해줄 수 있을 텐데.’
맹 노부인은 정미의 철없음이 몹시 미웠다.
‘하필 정가의 부법이 이 계집에게만 전해지다니, 정말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셋째 아가씨의 말이 맞지요. 저는 환자니, 의원의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제가 셋째 아가씨의 규칙에 부합할지 모르겠네요.”
황 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화가 나고 있었다.
‘아직 급계도 하지 않은 어린 계집이 감히 내 앞에서 신의 행세를 하다니. 소진 도사도 이러진 않을 텐데. 오늘 반드시 이 계집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 봐야겠어. 만약 아무것도 아니라면, 제생당의 간판을 내려야 할 거야.’
정미는 자세히 황 부인을 살펴보다가 담담하게 웃었다.
“어째서요?”
황 씨는 의아해하다가 비웃는 듯한 입꼬리로 웃었다.
‘내가 아직 병세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규칙에 부합한다니. 방금의 경망함은 다 거짓이었구나. 내가 재상의 며느리라 이러는 것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황 씨는 정미의 의술에 더욱 의심을 하게 되었고 냉소하며 그녀의 설명을 기다렸다.
정미가 웃었다.
“황 부인, 우선 혀를 내밀어 보세요.”
황 씨는 맹 노부인을 흘끗 살펴보고는 혀를 내밀었다.
정미는 자기 생각에 더욱 확신을 하게 되었고 담담하게 말했다.
“황 부인께서 안색이 어둡고, 코 옆엔 황반이 있으며, 입술은 푸르고, 혀에도 어반이 있는 것을 보니, 석가(*石痂: 자궁에 어혈이 모여 임신한 것처럼 월경이 없고 아랫배가 아픈 병)가 있는 것 같군요.”
그러고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물었다.
“황 부인께서는 여러 번 유산하신 게 맞습니까?”
말을 마치자, 황 부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 씨의 반응에 맹 노부인이 깜짝 놀라 외쳤다.
“황 부인―”
황 씨는 이 순간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정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손을 떨었다.
그녀는 열일곱 살 때 장 재상 가문에 시집 왔고, 지금까지 8년이 지났다. 8년 동안 아기가 5번 찾아왔지만, 모두 석 달도 채우지 못하고 유산되었다.
그것은 한 여인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고, 회임한 지 한 달이 넘은 지금, 만약 또 유산을 하게 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남동생이 정가의 셋째 아가씨 얘기를 했을 때에도, 분명 남동생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이 셋째 아가씨가 어떻게 내 병을 알아본 건지는 모르지만, 만약 일찍이 귀띔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면, 이 셋째 아가씨는 정말로 능력이 있는 거야.’
“황 부인, 제 말이 맞나요?”
정미가 차분히 물었다.
황 씨는 정신을 차리고 흥분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셋째 아가씨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황 씨는 내심 후자를 더 믿었다.
‘정가의 셋째 아가씨는 아직 급계도 하지 않았으니 집안 어른들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거고, 게다가 나는 장 재상가에 시집간 이후 줄곧 조용히 지냈으니 여러 번 유산한 일은 아주 친한 사람들만 알고 있었어.’
그리고 회인백부는 시댁과 별로 왕래가 없었으니 정가의 셋째 아가씨가 이 일을 일찍이 알 일은 없었을 터였다.
정미가 웃었다.
“황 부인 같은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그러니 제 진료 규칙에 부합하지요.”
황 씨는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너무 어려서 별로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내 병증을 바로 알아맞혔으니 한번 시도해봐야겠어.’
“그럼 부탁드리지요.”
정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맹 노부인에게 말했다.
“조모님,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방이 필요해요.”
이 순간, 맹 노부인도 정미의 태도에 약간 놀라있었다. 마음은 떨렸지만 방금의 엄한 표정은 다시 거두고 말했다.
“동초간(東梢間)으로 가거라.”
“네.”
정미가 발걸음을 옮기다 황 씨가 자신을 따라서자 입을 열었다.
“황 부인은 잠시 기다리세요. 제가 부인을 부르면 오세요.”
황 씨는 조금 불쾌했지만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정가의 셋째 아가씨는 너무 이상하구나. 이게 정말 재주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저 거만한 것인지 알 수 없군.’
정미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자, 맹 노부인이 급히 웃으며 말했다.
“저 계집이 겉치레하는 겁니다. 황 부인께선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황 씨가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진찰을 받으러 왔으니, 당연히 의원의 말을 따라야지요.”
겸손한 말이었지만 총명한 맹 노부인은 그 속에 담긴 불쾌함과 위협을 알아챌 수 있었고 곧바로 정미에게 화가 났다.
‘그 망할 계집은 죽어도 태도를 좀 누그러트릴 줄 모르는구나. 만약 황 부인의 병을 고치지 못하면, 찾아가서 용서를 빌게 해야겠어. 교훈이 되게끔!’
잠시 후, 동초간 문밖을 지키던 아복이 와서 말했다.
“황 부인, 셋째 아가씨께서 부르십니다.”
황 씨는 일어나서 아복을 따라갔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정미가 조용히 창가의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아복은 문발을 내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정미가 손가의 잔을 밀어냈다.
“황 부인, 이 잔 안의 물을 마시면 석가 증상이 없어질 겁니다. 뜻밖의 일이 없는 한, 아직 두 달도 안 된 배 속의 아기는 지킬 수 있을 거예요.”
황 씨의 표정이 휙 변하더니 얼떨결에 물었다.
“셋째 아가씨, 내가 회임한 걸 알아본 겁니까?”
정미가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그건 석가보다 알아보기 쉽습니다.”
황 씨는 눈앞의 아가씨가 더욱 신비하게 느껴졌다.
아까 이 소녀가 자신에게 석가 증상이 있다고 했을 땐, 사실 그리 믿지 않았다.
늘 유산하는 괴상한 병 때문에 많은 태의를 불렀지만, 아무도 석가 증상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아가씨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맥도 짚지 않고 곧바로 내 배 속에 두 달도 안 된 아기가 있다고 말했어. 이 안목만 봐도 예사로운 능력이 아니야.’
황 씨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미가 담담하게 말했다.
“당연하지요. 만약 믿지 못하신다면, 드시지 않아도 됩니다, 억지로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부의고, 부수로만 병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황 부인께서 드시고 싶지 않다면, 다른 의원을 찾으셔야 할 겁니다.”
지금 황 씨는 저도 모르게 정미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까지 셋째 아가씨를 찾아왔으니, 당연히 믿지요.”
황 씨는 말하면서 손을 잔으로 뻗으며 생각했다.
‘만약 다른 의원이 해결할 수 있었다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데 황 씨의 손이 잔에 닿기도 전에, 정미가 잔을 살짝 옆으로 옮기는 것이 보였다.
황 씨가 당황했다.
“셋째 아가씨, 이게 무슨―”
정미가 웃었다.
“황 부인, 아직 진료비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성인도 아닌데, 정혈을 써서 만든 부수로 은을 벌어서 인삼이나 제비집으로 몸보신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게다가 나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해. 만약 둘째 오라버니의 신분이 들통나게 되면, 정가에서 쫓겨나게 될 거고, 내가 둘째 오라버니를 보살펴야 하니까.’
“아, 진료비가 얼마지요?”
황 씨는 정미의 직설적인 모습에 다시 불쾌해졌다.
정미가 손가락 하나를 뻗어 보였다.
황 씨는 입을 뻐끔거리며 맞혀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많이 부르면 손해를 볼 것이고 적게 부르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미도 이리저리 알아맞히는 취미가 없었기에 곧바로 말했다.
“천 냥.”
황 씨는 안도의 한숨을 어렴풋이 내쉬었고, 이에 정미가 이어서 말했다.
“착수금입니다.”
“착수금이요?”
황 씨는 당황했다.
“예, 선금으로 천 냥을 내시고, 7개월 정도 후 아기를 낳으면 나머지 구천 냥을 제게 보내주세요.”
황 씨는 화를 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술을 달싹였다.
“셋째 아가씨, 이건 정말―”
정미는 그저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다섯 번 유산을 했고, 이번엔 여섯 번째 아이지요. 황 부인, 은 만 냥이 비싸다고 생각하시나요?”
“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황 부인은 완전히 놀라 멍해졌다.
‘내 안색만 보고 유산한 적이 있다는 걸 알아본 건 그리 놀랄만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셋째 아가씨는 내가 몇 명의 아이를 잃었는지도 알아봤어. 이, 이건 정말 너무 이상한 일이잖아! 설마 남동생이 이 아가씨에게 모든 걸 말한 건가?
아냐, 남동생은 사내니까 나랑 아무리 친하더라도 기껏해야 내가 유산한 적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거야. 몇 번인진 모를 테지.’
황 씨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좋습니다. 제가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은 만 냥은 물론이고 셋째 아가씨께서 저를 아무렇게나 부리셔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정미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의원은 부모의 마음을 가지지요. 제가 어찌 환자를 부릴 수 있단 말입니까. 환자들의 병이 다 낫는 것이야말로 큰 기쁨이지요.”
‘황 부인이 찾아온 이후, 내가 한발도 물러나지 않았던 이유는 황 부인의 오만함을 누르기 위해서였어.
만약 조모님이 바라는 것처럼 황 부인에게 아첨하며 비굴하게 굴었다면, 황 부인의 병을 치료하더라도 백부가 재상에게 일부러 잘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겼을 테지.’
황 씨는 시원한 성정이었다. 혹은 이 여섯 번째 아기를 위해 애써 시원스러운 척하는 걸지도 몰랐다.
“이건 천 냥의 은표입니다. 받으세요, 셋째 아가씨.”
황 씨는 은표를 건넨 후 물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난 지 만월이 되면, 셋째 아가씨께 만월주를 대접하지요.”
“살펴 가세요, 황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