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제 발등을 제가 찍다
그 사람은 가노(*家奴: 주인의 집 안에 살며 일하는 사내종)의 차림을 하고 있었고, 나이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였다. 그의 이름은 순자(順子)였고, 원래는 앞뜰에서 일하는 자였지만,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기에 지금까지도 장가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순자는 준수한 외모를 가져 요 2년 동안 어린 여종들이 몰래 추파를 보내곤 했다. 오늘 몰래 화원에 들어온 것도 노부인의 처소에 있는 아희와 만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셋째 아가씨가 갑자기 다가왔고, 순자는 급히 꽃밭에 숨어 대담하게 미인의 활 연습을 구경하며 눈이 즐겁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셋째 아가씨의 화살이 한 번 빗겨나가 하마터면 그에게 맞을 뻔했고, 순자는 깜짝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희도 멀리서 셋째 아가씨가 여기 있다는 걸 보았는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순자는 속으로 오늘 하루 참 재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넷째 아가씨가 온 뒤, 이런 놀라운 정보를 듣게 된 것이다.
‘난꽃처럼 고아하고 단정한 둘째 아가씨가, 사내를 빼앗았다고?’
순자는 기억을 되돌아봤고, 곧바로 청려한 모습의 정요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대부호 가문의 이런 일은 순자도 많이 보고 들었었다.
‘둘째 아가씨가 사내를 빼앗아서 가둬진 것이고 바깥엔 병이 났다고 알렸다면, 얼마 뒤에 죽었다고 알리겠지. 쯧쯧, 그런 미인이 이렇게 사라지게 되다니, 정말 아깝구나.’
순자는 일찍이 아희와 그런 관계를 맺어왔기에 원래도 도둑놈 심보가 가득한 사내였다. 게다가 혈기왕성한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하니, 고양이가 발톱으로 가슴을 쥐는 것만 같았다.
‘둘째 아가씨가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가서 재미 좀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늘 들은 이 정보에게 미안하겠는데! 와, 평소 그렇게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높으신 귀녀잖아. 맞아, 둘째 아가씨한테 또 어떤 별칭이 있었는데? 그래, 수도 제일 재녀! 이 몸이 만약 그 수도 제일 재녀의 맛을 볼 수 있다면,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겠군!’
정동의 마지막 말은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처럼 호수 바닥에 있는 무서운 흉수를 불러들였다.
* * *
순자는 가슴이 뜨거워져 깊은 밤에 살금살금 옥쇄거로 들어갔다.
쇄옥거는 이미 조금 무너져가는 모습이었다. 원래도 그리 크지 않은 처소는 썰렁했고, 처마 밑에 달린 등이 어렴풋이 빛을 비추고 있었다. 정요를 지키는 두 파자는 무료했는지, 일찍이 방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순자는 순조롭게 들어와 아주 쉽게 정요의 거처를 찾을 수 있었고, 방 뒤의 창밖으로 돌아간 뒤 갈라진 틈으로 몸을 기울여 안을 들여다봤다.
이어 순자는 크게 기뻐했다.
둘째 아가씨는 일찍이 이불 속에 숨어버렸고 아마도 깊게 잠에 든 듯했다.
방 안엔 침상 머리맡에 있는 등 하나만 밝혀져 있었고, 순자가 열심히 안을 들여다보아도 달빛 색의 휘장 안에선 영롱한 곡선의 그림자만 보였다.
순자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고, 소매에서 얇은 쇠막대기를 꺼내 창문 틈으로 집어넣고는 능숙하게 창을 잠근 횃대를 빼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창을 밀어 열고 들어갔다.
어두운 방 안, 순자는 살금살금 걸어 빠르게 침상 머리맡으로 갔다.
그는 가만히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손을 뻗어 휘장을 걷었다.
둘째 아가씨의 새하얗고 투명한 얼굴이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에 묻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순자는 기뻐했다.
‘어제 아희가 말하기를, 그녀와 아복이 둘째 아가씨를 보러 왔는데 두 파자가 막아서서 말도 건네지 못했다고 했지. 하지만 멀리서 봐도 둘째 아가씨의 병증이 가볍지 않은 것 같다고 했어. 아희의 말이 틀리지 않았군. 안색을 보니 정말 아픈 것 같긴 해. 아프면 좋지. 반항할 힘도 없을 테니.’
순자는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해 몰래 침을 삼키고는 이불을 걷어 손을 정요의 가느다란 허리에 얹었다.
침상 위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자는 흥분하여 숨을 들이켰다.
‘봐라, 귀녀는 귀녀구나. 여종과는 비교할 수 없군. 아희도 외모는 충분히 출중하지만, 허리는 둘째 아가씨보다 두 배는 두꺼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인이지.’
날씨가 따뜻해지는 계절이었기에 보통 사람들은 얇은 이불만 덮곤 했다. 정요는 두꺼운 이불을 두 개나 덮고 있었지만, 안에는 홑옷만 입고 있었다.
순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천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굶주린 늑대처럼 정요를 덮쳤다.
피부가 맞닿는 순간, 순자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와, 둘째 아가씨가 아니라 얼음 아냐? 몸이 왜 이렇게 차가워?’
사내의 뜨거운 기운에 뼛속까지 추웠던 정요는 오히려 편안했는지 꿈을 꾸던 그녀는 몸을 뒤척였고 스스로 그 뜨거운 곳에 가까워졌다.
순자는 흥분하여 덜덜 떨며 생각했다.
‘역시 정을 맛 본 여인이구나. 이렇게 적극적이라니. 자세도 능숙해. 위국공 세자와 얼마나 뒹굴었는지 모르겠군.’
이건 그가 대담하게 정요를 찾아온 이유기도 했다.
‘어쨌든 순결을 빼앗긴 여인이라면, 내가 조금 맛봐도 누가 알겠어?’
그때 정요가 갑자기 극심한 고통을 느껴 잠에서 깨어났다.
“읍읍읍―”
정요가 격렬하게 발버둥 쳤다. 하지만 연일 얼음물로 목욕한 몸은 아주 연약하여 힘이 없었다.
폭풍우가 지나간 후, 순자는 급히 바지를 올리고 창을 넘어 도망갔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분명 따뜻한 바람이었지만, 정요에겐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정요는 거의 굳은 몸을 일으켜 통증을 참으며 창을 닫았고 다시 침상에 돌아와 묵묵히 앉아있었다.
날이 점점 밝아오며 닭의 울음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정요는 마침내 눈동자를 움직였고, 붉게 부어오른 입술을 깨물며 매섭게 말했다.
“한 씨, 정미, 감히 이런 악랄한 방법으로 나를 능욕하다니! 나 정요가 죽지만 않는다면, 언젠간 너희를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 * *
쇄옥거에서 일어난 이 추악한 일은 아무도 알지 못했고, 날이 밝은 후 모든 것은 햇빛에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정미는 일찍 일어나 거울 앞에 앉아서 눈 아래가 시커먼 소녀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
아혜의 말을 들은 뒤, 정미는 조금도 잘 수 없었고 잠을 뒤척이며 그 부끄러운 말들을 떠올렸다.
‘설마 내가 정말 둘째 오라버니를 은애하는 건가? 여동생의 오라버니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아가씨가 좋아하는 사람을 대할 때의 그런 마음인 건가?
아니, 아니, 아니.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어떻게 둘째 오라버니를 은애할 수 있겠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왜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계속 오라버니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거지?’
“아가씨, 따뜻한 죽 좀 드세요.”
화미가 백합과 연밥으로 만든 죽을 가져와 말했다.
정미는 죽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꿀물이나 한잔 가져와 줘.”
화미는 더 권하고 싶었지만, 정미의 눈 아래가 시퍼런 것을 보고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 잠시 후 그녀가 꿀물을 가져왔다.
정미는 꿀물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아가씨, 잔이 비었어요. 소인이 다시 가져올게요.”
화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께 분명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걸 거야. 아니면 왜 빈 잔을 들고 계속 마시겠어?’
“됐어, 이연원으로 가자.”
정미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이연원에 도착했다.
정미는 마음이 아주 복잡했다. 오라버니를 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보기 두려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미는 정철을 만나지 않았고, 이른 아침부터 어떤 손님이 찾아와 셋째 아가씨를 만나야 한다고 지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를 부르셨다고?”
정미가 눈을 내리깔았다.
“안 뵐 거야. 미안하지만 아희, 돌아가서 노부인께 내가 오늘 몸이 좋지 않다고 전해줘.”
아희는 몰래 입을 삐죽이며 생각했다.
‘어제 오후에 셋째 아가씨가 활을 연습하는 것도 봤는걸. 그래서 순자와 만나지도 못하고 말이야. 근데 오늘 아침이 되니까 몸이 좋지 않다고?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아이고, 아가씨. 노부인께서 명령하셨어요. 귀한 손님이 오셔서 아가씨를 뵙고 싶어 하니, 꼭 오셔야 한다고요. 만약 가지 않으시면 소인은 감히 보고도 올릴 수 없을 거예요.”
정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일어났다.
“그래, 가볼게.”
* * *
정미는 간단히 단장한 후, 아희를 따라 염송당으로 갔다. 그 귀한 손님은 스물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부인이었다.
“미가 왔구나. 얼른 황(黃) 부인께 인사드리거라.”
맹 노부인은 따뜻한 표정으로 정미에게 손을 흔들었다.
정미가 걸어 들어가 젊은 부인에게 예를 갖췄다.
“황 부인을 뵙습니다.”
황 씨는 정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미가 어려 보이자, 조금 후회가 스쳤다.
‘동생은 원래 믿음직하지 않았지. 근데 내가 왜 홀린 듯 그 애의 말을 믿었을까!’
맹 노부인은 황 씨가 정미를 살펴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급히 말했다.
“황 부인, 이 아이가 바로 제 셋째 손녀, 정미입니다.”
그러고는 정미에게 말했다.
“미야, 황 부인께선 장(章) 재상의 막내아들의 처란다. 오늘 네게 볼일이 있어 찾아오셨으니, 소홀히 대접해선 안 된다.”
맹 노부인의 말에 정미는 뭔가 깨달았다.
‘나와 장 재상의 며느리는 일면식이 없어. 나를 찾아온 건 분명 진찰을 받으러 온 거겠지. 진찰을 받으러 온 거면, 황 부인과 나는 더 이상 장유존비(長幼尊卑)의 관계가 아니야. 조모님의 말은 나를 무슨 위치에 두시는 거람?’
정미는 맹 노부인의 아랫자리에 앉아 차분히 물었다.
“황 부인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황 씨는 당황했다.
순간 황 씨는 곧바로 소녀의 태도 변화를 느꼈고, 그 변화는 꽤나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황 씨는 태연자약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는 태부사소경(太仆寺少卿)의 딸입니다. 그리고 제 남동생은 황봉이라 하지요. 제 남동생의 말을 들어보니, 셋째 아가씨와 몇 번 인연이 있었나 보더군요.”
‘황봉?’
정미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그가 누군지 떠올렸다.
황봉은 전에 사냥을 갔을 때, 하마터면 곰에게 팔을 뜯길 뻔했던 소년이었다. 정미가 부수로 그를 구해주었고, 상사절에도 운선산에서 마주쳤었다.
정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영제(*令弟: 남의 아우를 높여 부르는 말)와 몇 번 만난 적 있습니다.”
황 씨가 웃었다.
“제 동생이 운선산에서 셋째 아가씨의 신과 같은 의술을 보았다고 하기에, 저도 동경이 되어 셋째 아가씨께 진찰을 부탁드리러 왔답니다.”
동생은 이 셋째 아가씨를 아주 불가사의하게 말했고, 그녀도 병이 급한 탓에 사람을 보내 몰래 알아보니, 뜻밖에도 찻집과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동생보다도 더욱 과장되게 말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평민 백성들의 말은 그저 듣고 넘겼을 뿐이었다. 백성들을 속이는 건 아무 신파나 할 수 있으니 그 말들을 진짜라 여길 수 있겠는가?
황 씨가 자신을 얕보는 걸 정미도 느꼈기에 정미의 표정도 차가워졌고 입꼬리를 휘며 말했다.
“그럼 황 부인께선 제가 진찰을 보는 규칙을 알고 계실까요?”
그 말에 황 씨는 당황했고, 맹 노부인이 꾸짖었다.
“미야, 어찌 황 부인께 그리 말할 수 있느냐! 황 부인께서 네게 진찰을 받으러 오신 것은, 너를 존중하시기 때문이다. 경망하게 소란을 피우지 말거라.”
정미는 마음속에 반감이 일었지만 맹 노부인은 그녀의 조모였기에 남들 앞에서 맹 노부인이 자신을 꾸짖을 때 감히 말대꾸를 할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