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 시간은 정철에게 평생처럼 길게 느껴졌고, 정미는 그제야 그를 놓아주며 숨을 헐떡였다.
소녀의 입술은 붉게 부어있었고 표정은 평소처럼 고집스러웠다.
“오라버니, 장난치는 게 아니야.”
그녀는 오라버니와 마주보며 또박또박 진지하게 말했다.
“입 맞추고 싶어서, 입 맞췄어.”
“……왜?”
정철이 멍하니 물었다.
물어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동생에게 입맞춤을 받은 뒤에 멍청하게 이유를 묻는 오라버니가 어디 있겠는가.
‘보통의 오라버니라면 어떻게 했을까?’
정철은 정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영이었다면…… 정영이었다면, 나를 덮칠 기회가 어디 있겠어!’
정철은 자신이 풀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혔음을 깨달았다.
뜻밖에도, 정미가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오라버니가 말했잖아.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나는 네 오라버니야!”
‘확실히 정미를 미워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정미는 눈살을 찌푸리고 억울한 듯 말했다.
“그래서 오라버니를 찾은 거잖아. 다른 사람을 찾을 수도 없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철이 정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무슨 다른 사람? 미미, 이런 상식 밖의 행동은 아무와도 하면 안 돼!”
“오라버니, 아파.”
정미는 오라버니의 고함과 엄한 표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평했다.
정철은 손을 놓으며 차가운 안색으로 말했다.
“알겠어?”
여동생의 멍한 표정을 보자, 정철은 머리가 터질 듯하여 힘없이 말했다.
“미미, 이상한 이야기책을 본 거 아냐?”
“아냐!”
정미가 곧바로 부정했다.
‘이야기책에 그런 게 어딨어, 이건 다 춘화 때문이라고!’
여기까지 생각하자, 정미는 또 화가 나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정미의 억울한 모습에 정철은 곧바로 믿었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앞으로 다신 이러면 안 돼. 아무와도 안 돼!”
“오라버니랑도 안 돼?”
정철의 얼굴이 피가 날 듯 붉어졌다.
“오라버니랑은 더욱 안 돼!”
정철은 정미가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해도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미미, 네가 어린 호기심에 그런 걸 알아. 걱정 마.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게. 너도 앞으로 다신 오라버니에게 이런 장난치지 마. 아, 생각났다. 남안왕이 오후에 오라버니를 불렀으니, 활 연습은 내일 같이 해줄게.”
정철은 이때까지 버티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달아났고, 이마가 문틀에 부딪혔지만 멈춰서지 않았다.
정미는 흔들리는 주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뒤 침상 위에 털썩 드러누워 베개를 안고 굴렀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꿈속에서 오라버니가 나한테 입맞춤을 할 땐 기꺼이 원했었는데, 현실 속의 나는 기꺼이 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달콤하게 여겼다고! 이거 더 심각한 거 아냐?’
정미는 살짝 부어오른 입술을 조용히 매만졌다.
‘염치도 모르고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오라버니와 다시 입 맞추고 싶어. 어떡하지?’
한참 후, 정미는 벌벌 떨며 아혜를 불렀다.
‘아혜, 잠깐 나와볼 수 있어?’
잠시 후, 아혜의 나른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시간에 무슨 일로 나를 떠올렸을까?」
‘아혜,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
「말해.」
정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했다.
‘만약 어떤 사람을 보기만 해도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으면, 그건 왜 그런 거야?’
아혜는 정미의 질문에 깜짝 놀라더니 한참 뒤에야 떠보듯 물었다.
「나이가 비슷해? 사내야?」
‘응.’
「그럼 쉬워. 네가 그 사람을 은애하고, 시집가고 싶은가 보지.」
정미는 순간 멈칫하다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허튼소리, 허튼소리 하지 마! 내가 어떻게 그 사람한테 시집가고 싶어 한다는 거야!’
「그럼 왜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은 건데?」
아혜는 그저 목소리일 뿐이기에 아주 직설적이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고깃덩이고, 네가 개인 건 아니잖아?」
“아혜의 말은, 내가 오라버니를 은애하게 됐다는 거야?”
정미는 이 답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져 중얼댔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뭐가 말도 안 되는데? 나도 네 머릿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데, 네가 나이가 비슷한 사내를 좋아하는 게 왜 말이 안 돼? 유치하긴!」
정미의 중얼거림을 듣던 아혜가 매정하게 비꼬았다.
한참 후, 정미가 아무 반응이 없자 아혜가 물었다.
「말해봐, 누군데? 그 약골 사촌 동생? 아니면 티격태격하던 애? 아니면―」
‘함부로 추측하지 마. 나, 나는 활을 연습하러 가야겠어.’
정미는 벌떡 일어나 벽에서 우각궁을 꺼내 밖으로 나갔다.
아혜가 차갑게 웃었다.
「시간 낭비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재능도 없으면서!」
정미가 궁을 움켜쥐었다.
‘재능이 없으니까 노력하는 거야.’
「노력? 바보야, 이 세상에 노력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승마와 활, 칼과 창까지, 너는 고작 말을 채찍질하는 것도 다섯째 공주를 따라잡을 수 없을걸.」
정미가 입을 꽉 다물었다.
‘다섯째 공주와 비교할 필요 없어. 내가 매일 매일 성장하기만 하면, 허튼 게 아니라고. 너랑 말 안 할래. 활 연습하러 가야 해. 며칠 뒤에 장공주께서 시험을 볼 거라 하셨다고.’
「아, 잠깐!」
아혜가 정미를 부르고는 신비스럽게 물었다.
「신궁에게 없어선 안 되는 재능을 가지고 싶지 않아?」
정미의 발걸음이 멈췄다.
‘뭔데?’
아혜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명목(明目).」
‘명목?’
「그래. 네가 ‘명목부’를 쓰면, 네 눈이 다른 사람보다 더 또렷이 보이고 멀리 보일 거야. 시력이 아주 좋아지니, 활을 배우는 것도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지.」
설명을 마친 아혜가 헤헤 웃었다.
「어때, 배울래?」
정미는 아주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배울래!’
정미는 부법과 궁술을 열심히 탐구해야만 그런 놀랍고 두려운 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좋아. 네가 내게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말해주면, 명목부를 알려줄게.」
‘뭐? 됐어, 활 연습이나 하러 갈래.’
정미는 우각궁을 들고 밖으로 나가며 거절했다.
아혜는 포기하지 않았다.
「알려주는데, 미백부나 거반부(祛斑符), 명목부 같은 부적들은 나한테만 배울 수 있어. 나한테 배우지 않으면 앞으로 다신 배우지 못한다고.」
‘그만해, 안 배울 거야!’
「아이 참, 정말 안 배울 거야?」
아혜는 화가 나 펄쩍 뛰다가 결국 힘없이 말했다.
「됐다, 됐어. 이렇게 고집 센 애는 처음 보네. 난 너랑만 얘기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랑은 교류하지도 못하는데, 나한테 못 말할 게 뭐 있는데? 가지 마. 명목부를 배우고 나서 다시 말해. 그럼 더 빨리 배울 수 있잖아.」
‘그럼…… 이제 안 묻는 거야?’
「안 물어. 흥!」
아혜는 언짢은 듯 대답하고는 생각했다.
‘어쨌든 나중에 알게 될 테니까. 자신이 누굴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나한테 묻다니, 앞으로 다른 건 안 물을까 봐?’
이미 복잡한 부법을 많이 익힌 정미에겐 명목부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반나절 만에 배울 수 있었고, 부수를 먹은 뒤 조용히 혼자 화원의 구석으로 가 궁술을 연습했다.
때는 해 질 무렵이었고, 정미는 확실히 사물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느껴져 우각궁을 손에 쥔 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자신감도 정미를 집중시키진 못했고 그녀의 마음속엔 정철이 가득했다.
‘내가 어떻게 내 오라버니를 좋아할 수 있겠어? 아혜가 분명 나를 속인 걸 거야.’
정미는 활을 내려놓고 눈을 감고 상상했다.
‘만약 화서나 용흔이었다면- 안돼, 그건 상상만 해도 저녁밥도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정미는 천천히 입술을 매만졌다.
‘그럼, 아혜의 말이 사실인 건가?’
끝없는 두려움이 그녀를 점점 뒤덮었다. 정미는 물에 빠진 뒤 온몸에 힘이 빠진 사람처럼 머리를 감싸 안고 웅크려 앉아 머리카락을 힘껏 쥐어뜯었다.
‘내가 오라버니를 좋아하다니! 그럼 오라버니는? 그렇게 총명한데, 내 불결한 마음을 눈치챘겠지? 내가 무슨 어리석은 짓을 한 거야. 만약 내가 오라버니를 좋아한다는 걸 조금 일찍 알았다면, 죽어도 입을 맞추지 않았을 텐데.’
“셋째 언니, 여기서 뭐 해?”
뒤에서 의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미는 휙 뒤돌아 정동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안 했어.”
정동은 고개를 갸우뚱한 채 그녀를 살피다가 갑자기 웃었다.
“셋째 언니, 울었어?”
“너랑 무슨 상관이야?”
정미는 차가운 표정으로 정동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동이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
정미가 차갑게 쳐다보자 정동은 입술을 깨물다가 말했다.
“셋째 언니, 한가해 보이니 나랑 이야기 좀 나누자.”
정미는 당황했다.
너무 혼란스러운 탓인지, 그녀는 늘 사이가 좋지 않던 정동에게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했다.
* * *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벌레와 새가 우는 소리에 화원 안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정동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셋째 언니, 언니는 왜 늘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는 거야?”
정미는 정동을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너랑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정동이 입을 오므렸다.
그녀도 자신이 왜 늘 미워했던 정미를 붙잡고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라면 그녀는 늘 진령운과 사이가 좋았기에, 마음속에 있는 일은 진령운에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이번 일은 꼭 정미에게 묻고 싶었다. 아버지가 정말로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른 사람인지…….
“내 말은, 아버지는 늘 다정하시고 자애로우신데―”
정미가 냉소하며 정동의 말을 끊었다.
“그 다정함과 자애로움은, 너희 남매들에게만 베푸는 거 아냐? 시간이 늦었어. 난 갈래.”
“그럼 둘째 언니는?”
정동은 급한 나머지 둘째 언니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정미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정동이 웃었다.
“셋째 언니와 둘째 언니는 제일 사이가 좋잖아? 근데 요즘 셋째 언니가 둘째 언니를 상대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
“언니는 요즘 몸이 좋지 않잖아.”
정미가 담담하게 말하자, 정동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왔다.
“셋째 언니, 언니도 알게 된 거지, 그렇지?”
“헛소리하지 마. 난 아무것도 몰라.”
“언니도 분명 알 거야. 그럼 왜 둘째 언니와 갑자기 멀어졌겠어?”
정동이 확신하며 말했다.
정미는 지금 전혀 정요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에 정동을 흘끗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발걸음을 뗐다.
“그건 나와 언니의 일이야. 너랑 무슨 관계가 있어?”
정동은 정미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다가 말했다.
“둘째 언니가 위국공 세자와 정을 나누어서, 그래서 어머니께서 가둔 거지. 그렇지?”
정미는 놀라 넘어질 뻔했고, 고개를 돌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급히 떠났다.
정동은 그 자리에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발을 들어 꽃나무를 한 번 걷어차고는 떠났다.
한참 후, 꽃나무가 흔들리더니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 사람은 몸에 붙은 나뭇잎들을 털어냈고, 입에는 풀을 문 채 정미 자매가 떠난 방향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둘째 아가씨는 병이 난 게 아니라, 남의 사내를 빼앗아서 가둬진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