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문제에 직면하다
“둘째 오라버니?”
정미는 기뻐하다가 다시 차가운 표정으로 정철을 밀어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외출하지 않았었어?”
정철은 품속이 허전해지자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표정엔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방금 돌아왔어.”
‘역시, 오라버니는 돌아와서 나를 보고도 못 본 체한 거구나.’
정미는 눈을 내리깔고 입을 꾹 다물더니 말했다.
“그럼 식사는 했어?”
정철은 이런 인사치레에 적응이 되지 않아 정미를 빤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했어.”
정미와 정철은 반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우리도 먹었어. 오늘 어머니께서 주방에 닭튀김을 하라 시키셨는데, 사철 오라버니도 좋아하더라고.”
“다행이네. 다음에 사철 동생이 오면 오리 조림을 해주자. 그것도 아주 맛있으니까.”
“응.”
정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남매는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정철이 계속 말을 하지 않자 정미는 몰래 이를 갈다가 떠보듯 물었다.
“오후에도 나가?”
정철은 잠시 멈칫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나가. 어떤 사람이 꽃을 감상하면서 술을 마시자고 초대해서.”
그는 두 걸음 정도 걷다가, 정미가 따라오지 않자 다시 돌아왔다.
“미미, 왜 그래?”
한참 뒤, 정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눈가는 촉촉했다.
“미미?”
정철이 여전히 의아해하자, 정미가 그의 발등을 세차게 밟아버렸다.
“오라버니, 앞으로 다신 오라버니를 상대하지 않을 거야!”
소녀는 치마를 들고 빠르게 달려갔고, 그곳에 남은 정철은 멍하니 서 있었다.
‘아침부터 나와 미미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되었지?’
정철은 그 자리에 서서 곰곰이 생각했다.
* * *
정미가 비서거로 돌아왔을 때, 세 여종은 그녀의 얼굴이 눈물범벅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가씨,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너희 모두 들어오지 마!”
정미는 방에 달려 들어가 침상 위로 숨었고, 휘장을 내리고는 베개를 안은 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분명 오늘 오후에 나와 활을 연습해준다고 했으면서, 술을 마신다고? 이게 내가 싫어진 게 아니면 뭐야? 이건 다 그 몹쓸 책 때문이야!’
“환안, 초를 가져와!”
잠시 후, 환안이 초를 들고 들어왔다.
정미가 명령했다.
“대야도 하나 가져와.”
환안이 대야를 들고 오자, 정미는 그 책을 꺼내 촛불에 태워 대야로 버려버렸다.
“아가씨, 그 책은 왜 태우세요?”
“이게 화근이야. 남겨둬서 뭐해?”
“화근이라고요?”
환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건 아주 인기가 많았는걸요. 어제 소인이 얼마나 고생해서 뺏어온 건데요.”
“입 다물어!”
정미가 환안을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앞으로 다신 언급하지도 마. 언급했다간 하루 종일 밥을 주지 않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환안이 분한 듯 대답했다.
‘아가씨는 말만 세게 하시고 마음은 여리셔서, 매번 내게 밥을 주지 않을 거라 위협하면서도 한 번도 그런 적 없는걸. 그래봤자 만두 두 개 정도지.’
“뭘 태우는 거야?”
그때 정철이 걸어들어왔고, 정미는 표정을 굳힌 채 급히 대야를 쳐다봤다. 그 책은 이미 타서 재로 변해있었다. 정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 차갑게 말했다.
“왜 왔어?”
환안은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급히 물러나며 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오자, 정철의 낯이 뜨거워졌다.
정철도 자신이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미미를 해치지 않는 것 뿐이었다.
“생각났어. 오후에는 미미와 활 연습을 하기로 했잖아.”
정미가 차갑게 웃었다.
“술 마시러 갈 거라며?”
정철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꽃을 감상하고, 술을 마신다고 한 거야…….”
“그게 술을 마시는 거나 마찬가지 아냐?”
정미가 턱을 치켜세웠다.
“오라버니가 함께해줄 필요 없어. 혼자 연습하면 돼. 오라버니는 가서 술이나 마셔.”
정철은 잠시 망설이다가 정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것 때문에 오라버니에게 화난 거야?”
정미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정철이 손을 뻗어 그녀를 다시 돌아 세우려다가 어깨에서 손을 멈춰 세웠다. 정철은 결국 손을 다시 내려놓고 그녀의 앞으로 돌아가서 말했다.
“그럼…… 아침의 일 때문이야?”
정미의 얼굴이 빨개졌다.
“말하지 마!”
정철의 귀 끝도 뜨거워졌지만 철면피를 깔고 말했다.
“미미, 너무 신경 쓰지 마. 오라버니도 알아. 아침엔 그저 장난친 거잖아.”
‘미미가 이렇게 이상한 건 아침에 했던 부탁과 관련이 있을 거야. 아무리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라도, 내가 잘못 반응했어. 내가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고 도망가버렸으니, 이 난제를 정미에게 남겨버린 것 아닐까? 미미는 겨우 열네 살인걸. 만약 정말 무슨 부담이 있다면, 모두 내 잘못이지. 내가 이러니, 어찌 책임감 있는 오라버니라 할 수 있겠어?’
“미미, 무슨 어려운 문제가 있는 거야? 잘 모르겠으면 오라버니에게 자세히 말해봐. 오라버니는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둘이서 상의하면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정철의 봄비 같은 따뜻한 태도는 정미의 마음속 억울함을 다 털어놓고만 싶게 했다.
‘눈앞의 사람은 내 둘째 오라버니야. 내가 아무리 작정하고 결심해도, 어떻게 오라버니를 상대하지 않을 수 있겠어?’
한참 뒤, 정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사실…… 사실 정말 어려운 문제가 있어.”
정철은 자신의 권유가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급히 말했다.
“무슨 난제?”
정미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목소리도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철은 살짝 웃고는 손을 뻗어 그녀를 토닥였다.
“오라버니에게 말할 수 없는 것도 있어?”
정미는 고개를 들고 그와 마주 봤다.
그 눈동자는, 정미를 볼 때면 늘 따뜻했다. 마치 여름밤의 달빛처럼 쳐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오라버니에게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남도 아니고 둘째 오라버니인걸.’
정미는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설마 오라버니가 내게 입맞춤을 하면 싫은 느낌이 드는지, 아님 꿈에서처럼…… 내가 혼란스럽고 부끄러우면서도 기꺼이 원했는지 알고 싶었던 거라고 말해야 하나?’
여동생이 망설이자 정철은 더 따뜻하게 웃으며 응원했다.
“미미, 넌 어렸을 때부터 무슨 일이 있으면 무조건 오라버니에게 말해줬잖아. 오라버니는 절대 남한테 말하지 않았고. 걱정 마. 무슨 일이든 비웃지 않을게. 말해주어야 같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그렇지?”
“나는―”
정미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결국 말문이 막혀 내뱉지 못했다. 그러나 오라버니의 말에 힘을 내게 되었다.
‘말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냥 직접 행동해도 되는 거겠지? 내가 너무 많이 생각했나 봐. 오라버니는 늘 나에게 그렇게 잘해줬잖아. 내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야. 그럼 이제 이 미칠듯한 문제를 얼른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
“오라버니,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오라버니는 절대 나를 미워하지 않을 거지?”
“당연하지.”
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확실해.”
말을 마치자마자, 정철은 갑자기 정미에 의해 잡아당겨졌고, 곧 앵두 같은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옅은 나무향이 담긴 싱그러운 숨결이 풍겨왔다.
두 입술이 맞닿는 순간, 정미는 가슴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고 느꼈다.
정미는 그저 가볍게 닿은 뒤 자신의 마음을 알면 곧바로 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살짝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입술에 닿자, 저도 모르게 그 싱그러운 숨결에 미혹되어 무의식적으로 놀란 혀가 벌어진 상대방의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거기다 호기심이 일어 상대방의 혀에 닿았다가 뒤엉켰다.
정철은 갑자기 정신이 들어 정미를 밀어냈다.
정미는 침상 위로 쓰러졌고, 쓰러질 때 손목의 팔찌가 침상 기둥과 부딪혀 맑은소리가 났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문밖에서 환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아냐!”
남매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철은 그제야 숨을 깊게 들이쉬고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문을 열었다.
“미미, 무슨 짓이야? 오라버니에게 이런 장난을 치다니.”
정철은 달아나고 싶었지만, 아침에 달아난 것 때문에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이번엔 차마 달아날 수 없었다.
‘내가 미미 혼자 남겨두면, 미미는 어떡해?’
정미는 그 자리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철은 차마 그녀를 더 쳐다볼 수 없었고, 이 침묵 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생각해야만, 여동생이 오라버니에게 이런 일을 하는 게 정상적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설마 미미가 나를…… 아니, 아니, 그건 말도 안 되지.
나는 계속 내가 정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미미는 몰라. 미미가 어찌 친오라버니나 다름없는 나에게 남녀의 정을 느낄 수 있겠어? 다른 사람에게도 우리는 친남매로 보이는걸!’
정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정미를 보며 낯을 붉혔다.
‘설마, 나는 내 마음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티가 난 건가? 미미는 마침 은애하는 마음에 눈떴고, 모든 것에 호기심이 많을 나이니까. 만약 나도 모르게 남매의 정에서 벗어난 언행을 했다면, 미미가 이상한 길로 빠지게 했을지도 몰라. 결국 내 더러운 마음이 미미에게 해가 되었구나…….’
“미미, 오라버니 말 좀 들어봐―”
정철은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키며 다시 정미의 옆에 앉았다.
이때, 정미도 마침내 고개를 들어 이상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라버니, 일단 아무 말 하지 마.”
정철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정미를 바라보고 있는데, 정미가 갑자기 정철을 덮쳤다.
정철은 지금 안 그래도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이런 일에 대해선 한 번도 대비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방금 그런 일이 일어난 와중에 정미가 또 덮쳐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윽고 그 서늘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다시 그를 덮쳤다.
이번엔 아까와 달랐다. 정철을 덮친 정미는 마치 한 마리의 작은 표범처럼 흉맹하고 사나웠으며, 입안의 먹이를 지키려는 듯 결코 놓지 않았다.
“미……!”
정철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정철은 다시 밀어내고 싶었지만, 정미가 너무 세게 안고 있는 탓에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민첩하고 익살스러운 작은 물고기가 자신의 입안에서 장난치며 뒤얽히니, 혹시나 정미를 다치게 할까 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정철은 이 갑작스러운 달콤함과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분명 지옥에 갈 거야.’
정철은 감히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도 정상적인 사내였지만, 모든 생각을 비우고 자신을 아무 감정도 영혼도 없는 목석이라 여기기 위해 애썼다. 만약 정철이 보통의 사내처럼 반응한다면, 정말로 여동생 앞에 나타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가 어떻게 앞으로 여동생을 보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오직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