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넘어지다
정동은 갑자기 사철을 더 쳐다볼 수가 없어 정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셋째 언니, 예전엔 왜 사철 오라버니를 본 적이 없지?”
정미는 앞으로 둘째 오라버니와 거리를 유지하기로 굳게 결심했지만,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왔기에, 정미에게 정철은 몸 안에 흐르는 피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했다.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내려놓을 수 없었으니, 잠시 딴생각에 빠진 정미는 정동에겐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사철 오라버니는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주 못 본 거야.”
“아, 사철 오라버니의 본가는 어디 있는데?”
정동이 참지 못하고 다시 사철을 바라봤다.
“내 고향은 회성이야.”
“회성?”
정동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재자(才子)였고 생모는 재녀였기에, 정동도 재능이 출중한 사람을 자연히 존경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회성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회성은 문인들이 모인 곳이라 했어요.”
고향을 얘기하자, 사철은 겸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문풍이 짙은 편이긴 하지.”
정동은 사철과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것에 신나서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뿐만 아닌걸요. 회성의 사람들은 풍아해서 평소 놀이도 우아하게 한다고 들었어요. 오라버니네에선 그네 시합이 성행하지 않아요?”
정동이 이것까지 알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한 사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네를 타는 풍습이 있어.”
정동은 이 친척 오라버니가 온화하고 예의 바르며 우아하고 품위 있어 조금의 단점도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손뼉을 치고 말했다.
“너무 좋다. 사철 오라버니, 저쪽에 그네가 하나 있어요. 모처럼 우리 백부에 왔는데 오늘 우리 자매들의 식견을 넓혀주세요, 네?”
“그건―”
사철은 정미를 쳐다봤으나, 정미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는 첫 방문에 집주인들의 미움을 살 순 없다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정미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을 때, 사철은 이미 그네 위에 서 있었고 정동과 진령운은 신나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사철은 그네를 높이 타다가 갑자기 두 발을 들더니 공중에서 한 바퀴 뒹굴었다.
“꺄악―”
정동과 진령운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하지만 곧이어 사철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자, 둘은 손을 뗐다. 사철은 안정되게 그네에 착지해있었다.
“대단해요!”
두 소녀는 나이가 많지 않았기에 단지 이런 뛰어난 그네타기만으로도 그에게 푹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미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회성은 문풍이 성행하고 명문 집안의 자제들은 무술을 거의 익히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사철은 달랐다.
조부님의 말씀에 따르면, 사철은 사가의 장자이고 나중엔 사가 일족의 기둥이 될 테니 공부만 해서는 안 되고 건강한 몸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사철에게 무술 선생님을 모셔주셨고, 사철이 무슨 명예를 쌓기는 바라지 않고 건강한 몸을 가지기를 바라곤 했다.
사철은 확실히 무술에는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학자들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기초가 있으니, 그네를 타는 솜씨도 회성에선 1, 2등을 다투었다.
회성에선 사가의 보물 같은 장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두 소녀의 비명 속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사철은 그네에서 뛰어내렸고, 공중에서 우아하고 아름답게 몇 바퀴 구르고는 차분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이내 그는 세 사람에게 예의 바르게 포권했다.
정동과 진령운이 그를 둘러쌌다.
“사철 오라버니, 진짜 대단해요. 우리한테도 그네 타는 법을 가르쳐주면 안 돼요?”
이때, 사철은 정미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정미에게 호감이 가득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자세히 묻지는 못하고 따뜻하게 물어보았다.
“미 동생, 같이 그네 타지 않을래?”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괜찮아요!”
세 사람의 이상한 눈빛에 정미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웃으며 말했다.
“사철 오라버니, 내가 요즘 몸이 그리 편치 않아서 그네는 탈 수 없어요. 동생들이랑 타요.”
“미 동생―”
정미는 아주 긴장했다.
“오늘 모처럼 두 여동생도 신나 하는데, 사철 오라버니가 좀 놀아줘요. 나는 어머니께 가서 점심은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고, 밥이 다 되면 부르러 올게요.”
정미는 이 말을 남기고 치맛자락을 들고는 빠르게 달려갔다.
월동문을 지났을 때, 정미는 벽을 짚고 멈춰서서 두려워하며 생각했다.
‘그 책을 봤는데, 어떻게 그네를 타는 걸 똑바로 볼 수 있겠어!’
* * *
“왜 혼자 왔니? 사철은?”
한 씨는 정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미는 그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힘없이 대답했다.
“화원에서 정동과 령운을 만나서, 사철 오라버니는 그 둘과 그네를 타고 있어요. 저는 먼저 돌아왔고요.”
한 씨의 목소리가 곧바로 높아졌다.
“뭐라고? 정동과 령운이랑 그네를 탄다고? 그럼 넌 왜 돌아왔니? 같이 타지 않고?”
“저는 그네를 별로 안 좋아해서 재미가 없으니 우선 돌아왔지요.”
정미가 아무렇게나 대답하고는 스스로 따뜻한 차를 한잔 따라 마시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한 씨는 두세 걸음 다가와 손을 뻗어 정미의 이마를 꾹 눌렀다.
“바보 아니니? 어찌―”
정미는 이마를 가린 채 의아한 듯 한 씨를 쳐다봤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한 씨는 마음 속 분노를 참은 채 억지로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 말은 사철과 정동, 령운은 친하지 않은데, 네가 사철을 두고 오면 너무 실례 아니냐는 뜻이란다.”
한 씨는 정미와 사철이 친해지게 만들겠단 결심을 했지만 뭔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제일 좋은 건 사철이 정미를 먼저 마음에 들어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야만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 씨도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됐다.
“사실 저와 사철 오라버니도 친하지 않은걸요. 어쨌든 정동과 저나 비슷하지요.”
정미는 찻잔을 들고 천천히 마시며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둘째 오라버니는요?”
‘둘째 오라버니’는 정미의 혀끝에 몇 번이나 맴돌다가 나온 말이었다.
정미는 천만번이나 불렀던 ‘둘째 오라버니’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힘들어지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 씨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일이 있다고 해서 외출했다.”
“아.”
정미는 담담하게 대답했으나 갑자기 손에 든 차가 맹물처럼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고 여종이 보고한 뒤, 사철이 걸어들어왔다. 뒤에는 정동과 진령운이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니?”
한 씨는 정미가 찻잔을 들고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속으로 조급해했다.
사철이 웃으며 말했다.
“그네를 탈 때 실수로 발을 삐끗했습니다.”
사철은 말하면서 정미를 흘끗 쳐다봤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어찌 그녀의 여동생들과 이 이상 얽힐 수 있겠는가.
‘두 아이가 어떻든 간에, 조금 멀리하는 건 늘 나쁠 게 없지.’
“발을 삐었다고? 심하게?”
한 씨가 깜짝 놀라자, 사철이 급히 대답했다.
“고모님, 걱정 마세요. 그저 조금 아픈 것뿐이고, 잠시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별 지장 없어요.”
“그럼 다행이구나. 우선 좀 쉬거라. 이따 식사도 해야 하니.”
그와 동시에 한 씨는 매서운 눈빛으로 정동과 진령운을 한 번 훑어봤다.
정동은 늘 이 적모를 눈에 두지 않았으나 오늘은 예외적으로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예를 갖췄다.
“모두 제 잘못이에요. 용서하세요, 어머니.”
한 씨는 잠시 멈칫했고, 참지 못해 정미를 흘끗 노려봤다.
‘어린 정동도 우수한 사내 앞에선 얌전한 척을 할 줄 아는데, 이 바보 같은 계집은 도무지 눈치가 없구나!’
“됐다, 앞으로 조심하면 된다. 너희도 다 컸으니, 그네 같은 위험한 놀이는 하지 말렴. 만일 넘어져서 얼굴을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한 씨는 정미를 쳐다보다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점만큼은 네 셋째 언니에게 배워야 한다. 늘 침착해야 해.”
“알겠습니다.”
정동은 몰래 입꼬리를 씰룩이며 생각했다.
‘셋째 언니의 침착함을 배우라고? 침착 같은 단어로 농담을 하다니.’
정동은 한 씨가 늘 자신을 미워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한 씨가 자신을 내쫓아 사철과 식사할 기회를 잃을까 봐 몰래 진령운을 잡아당겼다.
진령운은 이를 알아채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째 외숙모, 오늘 사철 오라버니가 왔는데 무슨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셨어요? 저희도 같이 먹을 수 있을까요?”
한 씨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남아서 같이 먹자꾸나. 우리가 남도 아니니.”
잠시 후, 화청(*花厅: 정원이나 화원에 위치한 응접실)에 식사가 다 차려졌다. 정동과 진령운은 의욕이 넘쳤지만, 정미는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
한 씨는 이를 보고 마음이 급해져 직접 나서서 사철을 따뜻하게 대해주며 이 미래의 사위가 서녀에게 혼을 뺏기지 않도록 했다.
한 씨가 만족스러웠던 점은 식탁에 여인들이 에워싸는데도 사철은 계속 침착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정동과 진령운에게는 실례하지 않으면서도 친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다른 또래 소년들보다 훨씬 나았다.
“고모님,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차를 마신 뒤, 사철이 일어나며 말했다.
“미야, 어서 사철 오라버니를 배웅해주거라.”
정미가 일어나 사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철 오라버니, 나를 따라와요.”
정동이 참지 못하고 일어나자, 한 씨가 기침했다.
“동아, 저번에 네 아버지께서 네게 수낭(*繡娘: 자수 공예를 하는 사람)을 모셔주라 하시더구나. 이리 오거라, 어머니가 네게 자세히 얘기해줄 테니.”
“네.”
정동은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아쉬운 듯 사철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한 씨가 빙긋 웃었다.
‘내 딸의 사내를 빼앗으려고? 절대 안 되지!’
* * *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정미와 사철을 비추었다.
사철의 웃음은 그 햇살보다도 더욱 따뜻했다.
“미 동생, 오늘 안색이 계속 좋지 않던데 어디 안 좋은 거야?”
정미는 이 친척 오라버니와 교류가 많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그네를 탄 모습은 소녀의 마음속에 있던 그의 모습을 갑자기 무너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정미도 알고 있었다. 그건 이 사람과 상관없는 일이고,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임을.
“며칠 전에 감기에 걸렸는데, 지금은 많이 나았어요.”
사철이 멈춰 섰다.
“그럼 배웅해줄 필요 없어. 일찍 돌아가서 쉬어.”
정미가 웃었다.
“길을 잃을까 봐 두렵지 않아요?”
사철이 빙긋 웃었다.
“나도 한번 시도해보려고. 만약 길을 잃으면 왔던 길로 되돌아가서, 고모님의 저녁도 얻어먹지 뭐.”
정미가 피식 웃었다.
“그냥 입구까지 데려다줄게요.”
길은 멀지 않았기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반주향(*半炷香: 향 반 개가 타는 시간으로 약 15분) 만에 입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사철은 품위 있게 정미와 인사하고는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떠나갔다.
정미는 그 뒷모습이 둘째 오라버니와 닮았다고 느껴져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은 길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정미는 몰래 훔쳐보다가 들킨 듯한 어색함을 느끼며 멋쩍게 웃고는 사철에게 손을 흔들었다.
사철은 그 녹색 옷을 입은 소녀가 옥란화 옆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웃음기가 더욱 짙어진 사철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소녀가 등을 돌리자, 사철은 살짝 웃고는 그제야 다시 뒤돌아서 떠났다.
정미가 몸을 돌렸을 때, 꽃나무 사이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정미는 급히 치마를 들고 쫓아갔지만, 풀과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만 보이고 그 사람의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정미는 실망감이 밀어 올라 아주 억울했다.
‘둘째 오라버니는 외출해서 돌아온 이후로도 나를 보니까 도망쳐버린 거야? 그럼, 둘째 오라버니는 다신 나를 상대하고 싶지 않은 건가? 그것도 이상할 건 없지. 어떤 여동생이 수치도 모르고 오라버니에게 입맞춤을 하라 하겠어. 그때 분명 나는 귀신에게 홀린 걸 거야!’
정미는 화가 나면서도 속이 상해 얼른 비서거로 돌아가고 싶었고, 급히 달려가는 와중에 발에 뭔가가 걸려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얼굴이 땅에 닿을 때쯤, 정미는 익숙한 품에 안기게 되었다. 위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미,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