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마음에 들다
“됐다, 어서 앉으렴.”
웃으며 말하는 한 씨의 시선은 대부분 사철에게 향해있었다.
한 씨는 늘 정미의 성정에 복잡하게 뒤얽힌 높은 가문으로 시집가면 사고를 일으킬 거라 걱정했다. 화서는 어렸을 때부터 그녀가 지켜본 아이였기 때문에 신세가 그리 좋지는 않지만 품행과 외모 모두 훌륭했고, 게다가 두 아이의 외조부와 외조모가 돌봐주니, 좋은 혼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아이의 나이가 들어가는 동안에도 화서의 몸은 계속 호전되지 않았다. 한 씨는 화서를 아꼈지만 정미의 친어머니였기에 허약한 사내에게 딸을 보낼 순 없었다. 나중에 만일의 일이 일어나면, 딸의 평생을 망치게 되는 꼴이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사철이 나타나니 한 씨의 눈이 반짝였다.
2년 전만 해도 이 아이는 작기도 하고 어리기도 하여 그리 주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 동안 지켜보니, 각 방면에서 모두 훌륭한 아이였다. 특히 사가의 가풍이 올바르고, 사내가 마흔이 되도록 자식이 없을 때만 첩을 들일 수 있다는 가규가 있다는 점만으로도 다른 집안보다 훨씬 나았다.
한 씨는 사철을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사철도 둔한 아이가 아니었기에, 한 씨가 자신을 지나치게 주의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어렴풋이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표정엔 티가 나지 않았지만, 사실 계속 열이 나고 있었다. 특히 정미가 나타난 이후론 늘 차분하고 담담한 성정인 그도 귀 끝이 점점 빨개졌다.
한편 정철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깐 채 손안의 찻잔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가의 동생도 미미에게 마음이 있나 보군. 당연하지. 정미는 솔직하고 순진하니, 눈이 있는 사내라면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있겠어?’
정철은 마음속에 드는 감정이 실망인지 위안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엔 적어도 자신이 아는 소년 중에선 사철이 가장 미미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정철은 참지 못하고 정미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때, 사철이 입을 열었다.
“미 동생, 어제 내 조모님의 병은 모두 네 덕분이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정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요. 그건 당연한 일이었는걸요. 오라버니의 조모님은 내 이모할머니이기도 하니까요.”
사철이 빙긋 웃다가 옆의 탁자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양손으로 건넸다.
“이건 어머니께서 일부러 널 위해 준비하신 거야.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정미는 상자를 건네받고는 겸손하게 말했다.
“숙모님도 너무 겸손하시네요. 당연히 마음에 드는걸요.”
정미는 몸을 돌려 상자를 환안에게 건네며 둘째 오라버니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까 그가 냉담하게 대했던 것이 떠오르자 자신을 겨우 통제했다. 그녀는 이를 숨기려고 저도 모르게 사철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사철은 잠시 멍해졌다가 뒤늦게 멈칫했던 손을 거두었다. 귀 끝은 더욱 빨개져 있었다.
한 씨는 이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
‘이 두 아이도 서로에게 마음이 있나 보구나. 아주 좋은 일이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정철이 사철을 쳐다보는 걸 발견했고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맞다, 이 일은 철이와 상의해봐야겠는걸. 철이는 어려서부터 미를 아꼈으니, 미의 부군을 고르는 일도 나 다음으로 가장 신경 써줄 거야.’
“얘야, 오늘은 여기서 점심을 먹고 돌아가렴.”
“하지만 고모께 너무 폐를 끼칠까 봐요.”
한 씨가 그를 훑어보다가 꾸짖었다.
“이 녀석아, 고모집에 와서 식사도 하지 않고 가버리는 도리가 어디 있니? 네 조모와 내 어머니는 친자매란다. 내 마음속에선 너와 철이, 미, 모두가 같아. 앞으론 자주 오거라. 철아, 그렇지?”
정철은 소매 속에서 주먹을 몰래 꽉 쥐고는 애써 웃었다.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사철 동생이 앞으로 자주 와야지요.”
“철 형님은 공부하느라 바쁘니, 자주 너와 함께하진 못할 거다. 하지만 정미는 평소 별로 일이 없으니까, 왔을 때 맞이하는 사람이 없진 않을 거란다.”
정미가 어이없다는 듯 한 씨를 쳐다봤다.
“어머니―”
‘내가 뭐가 한가하다는 거야.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제생당에 가지 않은 것뿐이지, 며칠만 지나면 다시 바빠질 텐데. 오라버니보다 더 바쁠지도 모른다고.’
“그럼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사철은 저도 모르게 정미를 흘끗 쳐다봤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가는 수도의 집안들과 달리 소성년식 때 어른들이 통방을 준비해준다는 규칙이 없었다. 그저 소성년식을 지낸 이후론 혼사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머니께서 한두 번 말씀하신 게 아니었지. 수도의 규수들은 훌륭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만약 상식 없는 여인을 맞이한다면 집안 전체에 해가 될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정미는 사철에게 있어 가장 적절한 시기에 나타난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사철은 원래 어른들이 혼사를 정해주는 대로 따를 준비가 되어있었고, 감히 한 소녀를 원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어른들도 만족하는 동시에 그 또한 밤에 몰래 잠을 뒤척이며 자신만의 소녀를 그리워할 수 있길 은근히 바라곤 했다.
“맞다, 고모님. 제가 이번에 온 것은, 감사를 표하는 것 외에도 서신을 전달하러 온 것이에요.”
사철이 소매 속에서 서신 하나를 빼냈다.
한 씨가 그것을 건네받고는 물었다.
“무슨 서신?”
사철이 웃으며 말했다.
“제 소성년식이 다가오고 있어서, 어머니께서 고모님과 친척 형제자매들을 초대하셨어요.”
한 씨는 서신을 쥐고 의아해했다.
소성년식을 보러 가는 사람은 대부분 가까운 친척이었다. 사가와 자신의 집안은 친인척 관계를 따지자면 조금 멀었다.
사철은 한 씨의 의아함을 알아채고는 설명했다.
“아버지께서 수도에 오신 지 몇 년밖에 되지 않아, 국공부 외에는 고모님과 가장 가까우셔서요. 그날 만약 시간이 되신다면 와서 성원해주세요.”
“그건 당연하지.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르는구나. 2년 전엔 아직도 어린아이 같았는데, 눈 깜짝할 새에 소성년식을 치르다니. 식을 치룬 뒤엔 어른이나 마찬가지겠구나.”
한 씨는 조금 감개무량한 듯 정미를 곁눈질하고는 웃었다.
“미야, 철이는 여기 처음 왔으니 네가 데리고 나가 걸으며 우리 백부를 소개해주거라. 다음에 왔을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말이다.”
정미가 일어나며 답했다.
“좋아요.”
한 씨는 정철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어 말했다.
“나는 네 둘째 오라버니와 얘기 좀 나누마.”
처음부터 끝까지 정철은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정미는 아주 괴로웠다.
‘오라버니는 내가 뻔뻔하고 염치없다고 생각해서 다신 나를 상대하지 않으려는 거야? 만약 그렇다면, 어찌 굴욕을 자초할 수 있겠어.’
사철의 곤혹한 눈빛을 마주하자 정미가 빙긋 웃었다.
“철 오라버니, 가요.”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나가고 난 뒤, 한 씨는 한참 뒤에야 시선을 거두고는 정철을 바라봤다.
“철아.”
정철이 반응하지 않자 다시 불렀다.
“철아?”
정철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
한 씨가 피식 웃었다.
“별로 큰일은 아니다. 철아, 네가 보기에 저 애는 어떤 것 같니?”
“사가의 동생이요?”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보기엔 좋은 아이 같더구나. 정미도 이미 열네 살이나 되었고 사철은 열여섯이니, 나이도 딱 좋은 것 같다. 철아, 넌 어찌 생각하니?”
“저는―”
한 씨가 웃었다.
“정미는 네 여동생이고 너희 남매는 어려서부터 사이가 좋았으니, 정미의 혼사는 네가 오라버니로서 얘기해도 된단다. 네가 보기에도 사철이 괜찮은 것 같으면,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고. 철아, 어떻게 생각하니?”
한참 뒤, 정철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가 보신 게 당연히 맞지요. 저도 사가의 동생이 아주 출중하다고 생각하고, 미미와도…… 미미와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한 씨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됐다. 앞으론 네가 그 애를 자주 집으로 불러서 놀렴. 정미와 둘이 서로를 알아갈 기회를 만들어주고.”
“알겠습니다.”
* * *
정미는 사철과 함께 화원에서 걸으며 말했다.
“사실 백부도 그리 크지 않아요. 구경할 것도 없죠.”
햇살 아래 소녀의 훤칠한 몸매와 아름다운 눈은 화원 안에 활짝 핀 꽃보다도 눈부셨다. 소녀는 백부의 부족함을 말하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침착했다.
사철은 그녀를 보며 아주 기뻐했다.
“사가는 더 작아. 하지만 우리는 식구도 적어서 조금 좁게 사니까 떠들썩하고 좋아.”
“사람이 적은 건 적은 대로 좋은 점이 있네요.”
정미는 백부의 난잡한 일들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말했다.
“응. 깔끔한 것에 익숙해져서,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적응이 잘 안 돼. 정미는 백부가 그리 크지 않다고 말했지만, 나는 다음에 오면 길을 잃을 것 같은데?”
정미가 웃었다.
“말도 안 돼요. 하지만 자기 집에서도 길을 잃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어요.”
“아, 그런 사람도 있어?”
“네. 매번 길을 잃으면 제 오라버니가 찾아 돌아오는데, 그래서 맨날 자기 오라버니에게 놀림 받아요.”
언급한 사람이 아가씨였기에, 정미는 누군지는 말하지 않았다.
사철도 꼬치꼬치 캐묻는 성정이 아니었기에, 정미는 그저 이렇게 잡담을 나누는 것도 기분이 꽤 좋다고 생각했다.
“셋째 언니.”
멈칫한 정미가 소리를 따라 뒤돌아보자, 정동이 진령운과 함께 손을 잡고 다가왔다.
가까이 온 후, 정동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사철을 바라봤다.
“이분은―”
저번에 정동이 문병을 온 뒤로, 정미는 그녀에 대한 태도가 조금 좋아졌기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 이모할머니 댁의 친척 오라버니야. 너도 사철 오라버니라 부르면 돼.”
그러고는 사철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제 넷째 여동생 정동, 옆은 제 큰고모 댁의 동생이고, 성은 진씨예요.”
“동 동생, 진 동생.”
사철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정동이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사철 오라버니.”
정미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정동을 흘끗 쳐다봤다.
‘왜 오늘 정동이 조금 이상한 것 같지? 평소보다…… 평소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은데?’
진령운은 마음속으로 조금 화가 났다.
‘왜 정동을 소개할 때는 이름을 말하고, 나를 소개할 땐 장삼이사(*張三李四: 장씨의 셋째 아들과 이씨의 넷째 아들이란 뜻으로, 이름이나 신분이 뚜렷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처럼 성만 말하고 끝인 거야?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진령운도 예를 갖추며 말했다.
“사철 오라버니, 운 동생이라 부르면 돼요.”
그러고는 정미를 곁눈질하고 이어서 말했다.
“방금 정동이랑 저기서 그네를 타는데, 멀리서 사철 오라버니와 미 언니가 걸어오는 걸 봤어. 처음엔 철 오라버니인 줄 알았는걸.”
“음?”
사철이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진령운이 둘째 오라버니를 언급하자 넋을 놓게 되었다.
정동이 사철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몰랐어요? 오라버니와 우리 둘째 오라버니의 뒷모습이 많이 닮았는걸요.”
뒷모습뿐만 아니라 가까이 다가오니 사철의 행동과 분위기까지도 정철과 꽤 닮아 보였다.
정동은 줄곧 정미가 정철의 이쁨을 받으며, 그녀 혼자만 그런 좋은 오라버니를 가지는 것에 대해 질투해왔다. 그러다 갑자기 그 오라버니와 닮은 사람을 발견하자, 마음속 호감이 마른 나뭇가지에 불이 붙은 듯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동 동생이 말하지 않았으면 정말 몰랐을 거야.”
사철이 점잖게 대답했다.
정동의 얼굴이 살짝 뜨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