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60화 (160/375)

160화. 황당한 꿈

흘끗 봤을 뿐인데, 정미는 곧바로 그 책을 던져버렸다. 가슴은 북처럼 쿵쿵 뛰었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아가씨―”

밖에서 환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지 마!”

정미는 책 내용에 깜짝 놀라 혼이 나가 있었기에 이성적으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이 한 발짝 일찍 반응했고, 침상에서 뛰쳐나온 정미는 바닥의 책 위로 달려들어 양손으로 꼭 쥐었다.

환안은 말을 잘 듣는 시종이었기에 정미의 말에 곧장 방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

“아가씨, 뭐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는데요?”

“아, 베개야. 맞아, 베개였어! 방금 악몽을 꿔서, 실수로 베개를 차버렸지 뭐야.”

정미가 허둥대며 대답했다.

“아가씨께 별일 없으면 다행이에요.”

정미는 다시 침상으로 돌아가 당부했다.

“환안, 일찍 자렴. 무슨 일이 있으면 널 부를 테니.”

“예.”

환안의 대답 후, 바깥에서는 더 이상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촛불이 흔들려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를 반복하며 정미의 새빨개진 얼굴을 비췄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미는 책을 꼭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 책은 정말 이상해. 안에 그려진 사람들은 어찌 실오라기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거지?’

정미는 부끄러우면서도 놀라웠고 강적을 만났다는 듯 책을 빤히 노려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촛불에서 불꽃이 튀었을 때,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안 돼, 그런 지옥 같은 참상도 다 버텼는데 이런 책 하나 보지 못할까 봐?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일부러 사 왔는데, 정확히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

정미는 결심을 내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떨리는 손으로 약간 찢어진 책을 조금씩 열어보았다.

첫 그림이 눈에 들어오자 정미는 또 책을 떨어트릴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으며 억지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씩 넘겨보았다.

책의 그림들은 모두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아니, 너무 지나치게 생생한 탓에 마지막 장까지 넘겨 시선이 그 그네 위의 남녀에 꽂혔을 땐, 정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두 눈을 가려버렸다.

방 안은 고요했고, 정미의 두근대는 심장 소리만 들려왔다.

‘마치……, 마치 실수로 둘째 오라버니의 품에 떨어졌을 때처럼…….’

이런 책을 본 뒤 둘째 오라버니를 떠올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 정미는 짜증을 내며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때 창밖에서 새가 날아가며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정미는 깜짝 놀라 황망히 책을 숨기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눈을 감기만 하면 머릿속에 책에서 본 장면 하나하나가 떠올라, 정미는 더 이상 잠들 수가 없었다.

‘남녀 사이는 이런 것이었구나!’

정미는 우선은 부끄러워하다가, 나중엔 역겨워하다가, 그 다음엔 저도 모르게 둘째 오라버니와 소매를 떠올렸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럼 오라버니와 소매도 책에서 본 그런 짓을 한다는 거야?’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정미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따뜻하고 다정하며 총명하고 대단한 둘째 오라버니가 어떻게 여인과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정미는 정철 옆의 온화하고 아름다운 여종을 떠올리자 순간적으로 가슴이 아주 답답해졌다.

‘나는 정말 바보구나. 오라버니에게 소매의 손을 잡느냐고 묻다니! 오라버니는 소매의 손을 잡는 것뿐만 아니라, 입맞춤도 하고, 포옹도 하고, 심지어, 심지어 옷도 입지 않고 소매와 그런 일들을 하는 거였어!’

정미는 손을 뻗어 멍하니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한참 뒤, 그녀는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 힘껏 손을 문질렀다.

‘앞으로 다신 둘째 오라버니의 손을 잡지 않겠어. 다신!’

어디서부터 온 억울함인진 몰랐지만, 정미는 그동안 오라버니가 자신을 속였다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 분명 나에게 그렇게 잘해주고 다른 사람에겐 냉담하게 대했으면서, 내가 아무것도 모를 때 소매와 그렇게 친밀하게 지내왔다니. 너무 친밀해서 내가 역겨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이날 밤, 정미는 잠들 수 없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잠들었지만 황당한 꿈을 꾸게 되었다.

정미는 정철의 방 밖에 숨어서 몰래 안을 쳐다보고 있었고, 정철과 소매는 책에서 본 것처럼 뒤얽혀있었다. 소매는 정미와 마주 보며 정미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은 아주 도발적인 미소였다.

정미는 왠지 화가 나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고, 두 손으로 소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정철의 곁에서 떼어냈다.

이어 정미는 갑자기 정철의 품으로 떨어져 그와 마주 보게 됐다. 정철은 익숙하고 따뜻한 웃음을 지은 채로 천천히 몸을 숙여왔다.

그 순간, 정미는 피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정철이 가까워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은 순간, 정미는 놀라 깨어났고 곧바로 일어나 앉았다.

침상 머리맡의 등은 이미 촛농만 남아 있었고,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익숙한 화장대와 창턱에 놓인 작약, 벽 모퉁이에 있는 반어의 집이 어렴풋이 보였다.

현실과 꿈이 점점 분리되고 마침내 이성을 되찾게 되자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정미를 덮쳤다.

‘내가 어찌 둘째 오라버니를 두고 그런 꿈을 꿀 수 있어!’

정미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꿈속에서 정철이 몸을 숙여올 때 자신이 피하지도 않았던 장면이 또렷이 기억나는 점이었다. 무섭고, 부끄럽고, 불안했지만, 싫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오라버니가 내게 그렇게 입맞춤을 하길 원했던 거야? 불가능해, 그 사람은 둘째 오라버니잖아!’

정미는 얼굴을 가리고 머리를 벽에 박고만 싶었다.

‘만약 내가 이렇게 염치없는 사람인 걸 오라버니가 안다면 나를 어떻게 볼까?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나 자신조차도 이런 내가 싫은데. 나는 분명 가장 염치없는 여인일 거야. 자신의 오라버니를 두고 그런 꿈을 꾸다니―’

정미는 더는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아 목소리를 높였다.

“환안, 환안―”

바깥에서 바스락대며 옷을 입는 소리가 들린 후, 환안이 빠르게 외투를 걸치고 걸어들어왔다. 말투에서는 여전히 잠에서 덜 깨 멍한 느낌이 묻어나왔다.

“아가씨, 명령하실 게 있으세요?”

“가서 따뜻한 물 한잔을 가져와 줘.”

“예.”

환안은 잠시 후 따뜻한 물 한잔을 들고 와 정미에게 건네며 물었다.

“아가씨, 또 악몽을 꾸셨어요?”

정미는 우선 물 한 모금을 마시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소인이 같이 자 드릴게요.”

“괜찮아. 그저 목이 마른 것뿐이었어. 가서 계속 자.”

“아가씨―”

“어서, 아님 내일 밥도 못 먹게 할 거야!”

정미는 자신에게 화가 나는 건지 환안에게 화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어 그저 짜증 내며 침상머리를 두드렸다.

환안은 혀를 내두르며 급히 나갔다.

다음 날, 정미는 조금 늦게 일어나서는 아예 여종에게 휴가를 내라고 하고 문안 인사도 가지 않았다.

정미가 씻고 옷을 입은 후 침상 머리맡에 기대 책을 보고 있을 때, 청가가 들어와 보고했다.

“아가씨, 둘째 공자님께서 오셨어요.”

정미는 손을 덴 사람처럼 보던 의서를 한쪽에 던져버리고 급히 말했다.

“내 몸이 편치 않으니 돌아가라고 말씀드려.”

말을 마치자마자, 바깥에서 정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미, 어디 아파?”

정미는 청가를 매섭게 노려봤다.

청가는 그녀를 달래듯 웃어 보였다.

평소 정미가 정철을 만나는 걸 가장 좋아했기에, 청가는 정철이 오면 곧바로 그를 안쪽으로 들이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가씨의 반응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정미는 정철의 목소리가 들리자 긴장한 채로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 사람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빤히 쳐다봤다.

정철은 가까이 다가와 정미가 멍하니 꿈쩍도 않자 실소했다.

“왜 그래, 바보야?”

그는 손을 뻗어 습관적으로 정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지만, 정미는 바늘에 찔린 것처럼 피했다.

“미미?”

정철이 의아해하며 정미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어제 잘 못 잤어?”

“누가 못 잤다는 거야. 아주 잘 잤거든!”

정미는 정철의 물음에 황급히 대답했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잘 잤는데 왜 그렇게 멍한 모습이야?”

정철이 정미의 손을 살짝 토닥이자 정미가 급히 뿌리쳤고 정철의 의아한 눈빛을 보며 짜증을 냈다.

“나 건들지 마!”

“미미―”

정철은 웃음을 거두었고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미미의 언행에 싫증이 묻어나온 것은 처음이야. 설마, 미미가 나를 싫어하기 시작한 건가?’

정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미가 하루하루 커가며 좋은 남편을 만나 평생을 사는 걸 지켜볼 준비는 되어있었어. 하지만 미미가 나를 싫어하는 것에 대한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지.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괴롭구나.’

정미는 정철의 복잡한 마음도 모른 채 손수건을 꺼내 끊임없이 정철이 만졌던 곳을 닦았다.

“오라버니, 앞으로 다신 내 손 만지지 마. 나, 나도 다 컸다고!”

“응, 알겠어.”

정철의 말투는 담담했으며 표정은 차분했다.

“그럼 미미가 또 오라버니에게 미리 알려줄 게 있을까? 오라버니가 또 실수하지 않도록 말이야.”

“나는―”

정미가 갑자기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은 시선이 마주쳤다.

정미는 철이 없었고 다정하지 않았지만, 정철에게만은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대하듯 어려서부터 서로 의지했고 떨어지지 않았다.

정철의 차분함 속에 느껴지는 어두움을 정미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 순간, 정미의 마음속이 쓰라렸다.

그녀는 입술을 움찔거리며 평소처럼 오라버니에게 애교를 부리며 달래려고 했지만, 결국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꿈에서 겪었던 일과 오라버니와 소매의 관계를 떠올리면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심지어 정철을 보고 싶지 않기까지 했다. 오히려 정철이 자신을 보는 것이…… 무서울 정도였다.

‘오라버니는 총명하고 세심한걸. 만약 내 이상한 생각들을 알게 되면, 내가 아주 염치없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날 상대하지 않는 거 아냐? 내가 먼저 오라버니를 상대하지 않을지언정 그런 날이 오게 하지는 않을 거야!’

정철이 가볍게 기침했다.

“미미, 무슨 일 있는 거지? 오라버니에게 말해줄 수 있어?”

정미가 두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가렸다.

“없어. 오라버니, 이만 가. 앞으로…… 앞으로도 날 찾아오지 마. 나도 요즘에 너무 바빠서…….”

그 순간 정미는 분명 눈을 감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주변에 아픈 분위기가 자욱한 것이 느껴졌다.

정미는 그 아픈 느낌이 자신의 것인지 오라버니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차마 눈을 뜨고 확인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철의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그래, 그럼 오라버니는 먼저 가볼게.”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문발이 흔들리는 소리가 선명히 귀에 들려왔다.

정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묻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난처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까. 만약 위험을 마주친다면 내 목숨을 잃어서라도 오라버니를 살리고 싶은데.

내가 무슨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거지? 굳이 아기를 낳는 일을 정확히 알아보겠다고 하다가, 결국 그렇게 황당한 꿈을 꾸었고, 오라버니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잖아.’

그때, 어느 발소리가 점점 선명해졌고 정미는 고개도 들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나가, 혼자 있고 싶어.”

발소리가 멈추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미, 아무래도 네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오라버니?”

정미는 손을 풀고 고개를 들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창백했던 안색에 늘 붉었던 입술마저 혈색을 잃은 정미의 얼굴은 심하게 운 탓에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해 가련하면서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정철은 그저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이런 아픔은 방금의 그 차가운 말들을 한쪽에 치워버리고 곧바로 뒤돌아오게 했다.

정철은 생각했다. 이 세상 모두에겐 각자의 어려운 상대가 있기 마련이고, 이는 그도 다르지 않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