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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난-158화 (158/375)

158화. 복숭아꽃보다 아름다운 너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정미는 정철의 몸에서 전해져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시원하면서도 은은한 향기는 정미에겐 그 비싼 화로수(花露水)들보다 더욱 향기로웠다.

정철의 머리카락에서는 아직도 물이 흘러 정미의 손등에 뚝뚝 떨어졌다.

정미는 저절로 방금 소매의 말이 떠올라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라버니, 내가 머리 말려줄게.”

“괜찮아. 곧 있으면 마를 거야.”

정철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다.

정미는 기다랗고 아름다운 눈매로 그를 쳐다보며 차갑게 코웃음 쳤다.

“그럼, 소매가 말려주기를 원하는 거야? 알았으면 조금 늦게 왔을 텐데.”

정철은 얼떨떨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정미는 답답함에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소매, 어서 들어와서 둘째 공자의 머리를 말려줘.”

잠시 후 문발이 흔들리더니 소매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깨끗하고 두꺼운 수건과 단향목으로 만든 빗이 있었다.

소매는 두 사람 앞으로 와서 쟁반을 옆에 내려놓고는 수건을 들고 말했다.

“공자, 우선 머릿밑에 수건을 두르세요.”

정철은 원래 소매의 시중을 잘 받지 않았기에 어색했고, 옆에 이상한 태도의 여동생이 있으니 더욱 마음이 불편해 담담하게 말했다.

“소매, 물건만 내려놓고 우선 나가보거라.”

소매는 입을 꾹 다물다가 정미를 흘끗 쳐다봤다.

정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은 홧김에 소매를 불러들인 거였지만, 소매가 오라버니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더욱 마음이 답답해졌다.

정미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자, 소매는 ‘예’하고 대답하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미미―”

정철이 말문을 열자, 정미가 큰소리를 쳤다.

“뒤돌아서!”

“응?”

“얼른.”

정미가 그를 노려봤다.

정철은 생각했다.

‘오늘 미미가 적잖이 억울한 일을 당했나 보구나. 그렇지 않으면 이럴 리 없어. 이따 어느 개자식이 여동생을 희롱했는지 반드시 알아내서, 반쯤 죽여놓을 테다!’

정철은 여동생의 말을 따라 얌전히 뒤돌아섰다. 그러자 작은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정철의 온몸이 굳었다.

“미미?”

그는 다시 몸을 돌려 막고 싶었지만, 갑자기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만약 내가 헛된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면, 무서울 게 없잖아?’

정미의 목소리가 정철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오라버니, 함부로 움직이지 마. 우선 오라버니의 머리를 말려주고 나서 얘기해. 진짜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니까.”

아무리 마음이 답답하더라도 정미는 제 오라버니의 건강을 가지고 놀 순 없었다.

정미는 소매가 한 말을 떠올리며 정철의 뒤에서 반쯤 무릎을 꿇고 두꺼운 수건을 그의 어깨에 받쳤다.

역시, 정철의 어깨는 이미 젖어있었다.

정미는 아무 말 없이 다른 수건을 들어 조심스럽게 정철의 머리끝을 닦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 가까웠다.

정철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생각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결국엔 이성을 붙잡고 가볍게 기침하며 말했다.

“미미, 그냥 오라버니가 스스로 할게.”

“움직이지 마. 다 돼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철에게는 일분일초가 달콤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정미가 수건을 내려놓았을 때, 정철은 그제야 숨을 돌렸고 다시 몸을 돌려세우려고 했다.

“움직이지 마. 아직 머리를 빗지 않았는걸.”

정미는 빗을 들고 그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정철의 머리카락은 이미 다 말라 있어 더 이상 감기에 걸릴까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자, 정미는 그제야 말할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소매에 대한 일을 물으려다가 너무 갑작스러울까 봐 아무렇게나 주제를 던졌다.

“오라버니, 오늘은 왜 이 시간에 목욕을 했어?”

“오늘 나가서 다른 사람과 권법을 겨뤘거든. 땀이 많이 났어.”

“오라버니도 다른 사람과 싸우기도 하는구나.”

정철이 웃었다.

“싸운 게 아니야. 오늘 남안왕부에 가서 그의 호위와 겨루었을 뿐이지.”

남안왕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기에, 다른 사람의 시합을 보는 걸 좋아했다. 남안왕부의 호위는 매월 작은 시합을 하게 되었고, 승자는 상을 받기도 했다. 수도 안에서 이 일은 이미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어 있었다.

정철은 지난번 한 씨 모녀 대신 감사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남안왕과 마음이 잘 통해 그 이후로 점점 자주 왕래했다.

당연히 정미는 그런 일들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고, 그녀는 정철의 시합 중 일어났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그의 머리를 빗었다.

그때, 정철이 물었다.

“미미, 오늘 외출했어?”

“응. 어머니랑 외가에 갔어. 뜻밖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

정미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정철이 한숨 쉬었다.

“다행히 정미가 외조모님의 증상을 발견했구나. 나중에서야 진단해냈다면, 이미 늦었을 거야. 그리고 이모할머니 쪽에서도 이럴 땐 당분을 적절히 보충해야 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거고.”

“맞아, 오라버니는 모르지. 처음엔 정말 사가에서 내 말을 신경 쓰지 않을까 얼마나 걱정했다고. 다행히 어머니께서 꿋꿋이 지지해주셔서, 모두가 허락해주셨어. 그리고 사가의 친척 오라버니도 세심하더라고. 미리 설탕물을 준비해놨었거든.”

“아, 사가의 오라버니라고?”

“사철 오라버니 말이야. 잊어버렸어?”

“어찌 잊을 수 있겠어.”

정철은 침착하게 물었다.

“보아하니, 사철에 대한 미미의 인상이 나쁘지 않았나 본데?”

정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

“사가의 오라버니는 꽤 괜찮았어. 지 오라버니와 용흔보다 훨씬 침착했으니까.”

‘세심하면서도 침착하다고?’

정철은 잠시 기억을 되짚으며 그 사가의 친척 아우는 확실히 그런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정철은 마음속으로 작은 꿀벌에게 찔린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이내 석연해졌다.

‘만약 아주 우수한 사내가 정미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거야. 하지만 그 자식, 아무리 그래도 행동이 너무 빠른 거 아냐? 입을 맞추다니?’

“미미, 왼쪽 뺨에 상처가 있는 것 같아. 설마 고양이가 할퀸 거야?”

정미는 부끄러우면서도 화가 나 중얼거렸다.

“외조부님이 그런 거야. 진짜 싫어. 또 수염으로 내 얼굴을 긁다니. 내가 몇 살인지는 생각지도 않으시나 봐!”

정철은 긴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외조부님이었구나. 다행이다.”

정미는 정철의 대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오라버니, 들었어? 큰오라버니의 통방인 예인에게 아이가 생겼대.”

정철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못 들었어.”

‘내 거처엔 그런 잔소리를 하는 파자나 여종도 없는데, 큰형님의 통방이 회임한 게 나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지?’

정미는 빗을 들고 정철의 머리칼을 정수리에서부터 조금씩 아래로 빗어 내려갔다. 그녀는 말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무심코 묻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그럼 소매도 오라버니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거야?”

“씁―”

정철의 온몸이 순간 번개를 맞은 것처럼 굳었다. 머리가 웅웅댔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리다가 빗에 머리가 잡아당겨져, 정철은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정미는 빗이 정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보고는, 정철의 머리가 뜯길까 봐 급히 몸을 일으켜 빗이 따라가는 방향으로 손을 놓았다.

그 순간, 정미의 몸이 균형을 잃어 정철의 품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온 세상이 고요해졌고 두근대는 심장 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정미는 잠시 후에야, 이 심장 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지만 별처럼 찬란한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또 다른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정미 자신의 것이었다.

“둘째 오라버니?”

정미의 목소리에서 곤혹스러움과 얼떨떨함이 묻어나왔다. 이 두근거림의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정철은 ‘둘째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여동생이 보내는 신뢰와 의지의 눈빛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황망히 정미를 품속에서 일으켜 세우며 마음속의 낙담한 감정을 억누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바보야, 오라버니의 머리카락이 다 엉켰잖아.”

그러자 정미는 똑바로 앉아서 미안한 듯 웃었다.

“오라버니, 미안해. 그러니까 왜 갑자기 몸을 돌려서는…….”

정철은 어이없는 듯 정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생각했다.

‘열네 살짜리 아가씨가 아기를 가지는 일에 대해 물었는데, 누가 침착할 수 있겠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미는 궁금한 게 있으면 끝까지 매달리는 성정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는 손을 뻗어 정철을 끌어당겼다.

“오라버니, 소매가 오라버니의 아이를 낳아주는 거냐니까?”

정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체 이 세상 어느 아가씨가 그런 질문을 한다는 말이야?”

정미는 정철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정철의 표정은 엄숙했지만, 귀 끝은 빨개져 있는 걸 일찍이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부끄러워하고 있어.’

하지만 혹시나 정철을 너무 내모는 걸까 봐 정미는 눈을 내리깔며 슬픈 모습을 꾸며냈다.

“어머니께선 내가 시집갈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 하셨어. 하지만, 나는 시집을 갈 생각이 없는걸. 그럼 평생 알지 못하게 되는 거 아냐? 오라버니, 그냥 알려주라. 오라버니가 말했잖아. 모르는 게 있으면 오라버니에게 물어보라고! 설마, 그저 나를 달래려고 한 말이었던 거야? 사실 예전부터 내가 뭐든 모르는 게 귀찮았던 거 아냐?”

“그런 게 아냐―”

정철이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다가 정미의 반짝이는 눈빛을 마주하자 이 소녀에게 휘어 잡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동생의 가련한 모습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기에 한숨을 쉬고는 단념하며 대답했다.

“너한테 둘째 올케언니와 조카가 생기면, 가능할지도 몰라.”

“아, 그런 거구나.”

정미는 천천히 대답했다. 분명 정철의 대답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으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치밀어 오르는 상실감과 씁쓸함이 어디서부터, 왜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소매는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총명하지도 않고, 또…… 어쨌든 부족한 점이 이렇게나 많은데, 무슨 자격으로 오라버니의 아이를 낳는다는 거야?’

정철이 손을 뻗어 정미의 어깨를 토닥였다.

“됐어, 이제 알았으면 앞으로 엉뚱한 생각 마.”

“오라버니, 하지만 아직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는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아이가 나올 수 있는 거야?”

정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기침을 해댔다.

정미는 급히 다가와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했다.

“오라버니, 나 별로 안 급해. 천천히 알려줘도 돼.”

“정미!”

정철은 화가 나서 드물게 정미의 이름을 외쳤다.

“또 그런 허튼 질문을 하면, 오라버니가 벌을 줄 거야!”

정미는 아쉬워했다.

‘이 문제는 어머니로부터도 답을 듣지 못했던 내용이야. 오라버니에게 물으러 와서 여기까지 묻는 데 성공했는데, 만약 지금 답을 얻지 못하면 앞으론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거야. 좋은 기회는 놓치면 다신 오지 않는다고!’

정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고는 정철의 팔을 꼭 껴안은 뒤 뻔뻔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그냥 알려줘.”

정미는 손을 놓지 않는 걸로도 모자라 온몸으로 정철을 누르기 시작했다.

“말해주지 않으면 놓지 않을 거야!”

“미미―”

정철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또박또박 답했다.

“오라버니 팔 저려!”

순간 정미는 부끄러움에 빠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소녀의 뽀얗고 봉긋한 뺨에 붉은 기가 오르자 3월의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웠다.

눈앞의 소녀는, 바로 그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그 사람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정철 자신은 정미의 오라버니가 아니었고, 정미도 그의 여동생이 아니었다.

그저 정철과 정미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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