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56화 (156/375)

156화. 마주보다

왕 태의는 걸음을 멈추고 다가오는 정미를 보며 안색을 굳혔다.

‘이 계집이 방금 내게 그리 굴욕을 줘 놓고도 모자라 또 짓밟으러 온 건가?’

정미는 태의의 표정이 좋지 않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뜻밖의 행동을 했다.

정미가 치맛자락을 들고 살짝 몸을 숙였다.

“왕 태의, 제 외조모께서도 소갈증을 앓고 계실 가능성이 큽니다. 진료를 봐주세요.”

왕 태의는 아주 의외의 기분을 느꼈지만, 아직 기분이 상한 상태였기에 코웃음을 쳤다.

“제가 어찌 감히요. 또 진료를 잘못했다간, 태의서에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정미는 천천히 일어나 왕 태의와 마주 보며 진지하고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왕 태의, 기술에는 전공이 있기 마련이지요. 당신은 제 이모할머니의 소갈증을 진단해내셨고, 오랫동안 진료를 해오셨습니다. 분명 보통 의원과는 달리 귀한 경험을 많이 쌓아두셨겠지요. 그러니 제 외조모님도 진료해주세요. 저와 어머니께서도 아주 감사할 겁니다.”

외조모는 위국공부의 노부인이었다. 최근 몸이 좋지 않아 가장 뛰어난 태의들을 모셨지만, 아무도 병증을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왕 태의는 다른 방면에선 어떨지 몰라도 소갈증에는 경험이 많은 의원임은 확실했다.

외조모의 건강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어느 방면이든 능력 있는 의원은 존경할 가치가 있었다.

정미의 말은 왕 태의의 아슬아슬한 체면을 회복시켜주었고, 심지어 앞서 정미가 자신의 오진을 짚어낸 것과는 사뭇 태도가 대비되어 알 수 없는 감동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눈앞의 출중한 아가씨를 보던 왕 태의는 가볍게 기침하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감히 위국공 노부인께 진료를 한번 봐 드리지요. 문제를 찾지 못하더라도 용서해주십시오. 제 의술이 훌륭하지 않은 탓이니!”

왕 태의의 뾰족한 말에 정미는 개의치 않고 살짝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왕 태의.”

소녀의 진실되고 찬란한 웃음에, 왕 태의는 낯이 뜨거워져 속으로 생각했다.

‘됐다, 됐어. 어찌 어린 아가씨와 다투려는 게야!’

왕 태의는 단 노부인의 곁으로 와 그녀의 안색을 살폈고, 혀를 내보라 하여 설태를 살피더니 물었다.

“최근 계속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변소에 가고 싶은 증상이 있었습니까?”

단 노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왕 태의는 이미 마음속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태의서 안에서 젊은 편에 속했다. 의술 경험이 선배들처럼 많진 않았지만, 소갈증에 대해선 남다른 연구를 해온 바였다. 그의 조모가 소갈증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그의 집안은 몇 대째 의술을 배워왔지만, 조부님과 아버지는 한참 동안 조모님의 병을 알아내지 못했다. 조모님의 병세가 아주 심각해졌을 때, 그제야 소갈증임을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때문에 왕 태의는 고서를 뒤적이며 공부했고, 각종 환자들을 더욱 유념하며 소갈증 환자들이 보이는 규칙을 점점 결론 낼 수 있게 되었다. 완전히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 병을 전문적으로 연구해보지 않은 의원보다는 훨씬 나았던 것이다.

또다시 창피를 당할 순 없기에 왕 태의는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입이 달지는 않으십니까?”

“입이 달다고?”

단 노부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확실히 그런 증상이 있었지요.”

“그럼 맞군요.”

왕 태의는 주변 사람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확실합니다. 위국공 노부인도 소갈증을 앓고 계십니다.”

그 말에 한 씨가 비명을 질렀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다.

그녀는 사 노부인이 어떤지 직접 두 눈으로 봤다.

‘발작할 땐 아주 무서웠다고! 어머니는 늘 건강하셨는데, 왜 이런 병에 걸리신 거지?’

방금 왕 태의의 오진을 떠올리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정미를 바라봤다.

정미는 왕 태의의 설명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부의는 평범한 의원과 다르지만 통하는 부분도 있었기에 알아둬서 나쁠 것이 없었다.

왕 태의는 이 모녀에게 밥줄을 끊길 뻔했기에 예민한 상태였고, 한 씨가 자신의 딸을 쳐다보자 그 의미를 깨닫고 곧바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정미의 표정을 봤을 땐 다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흥, 어미가 되어선 딸보다 잘 모르는군!’

정미가 왕 태의에게 물었다.

“왕 태의, 제 외조모님과 이모할머니 모두가 소갈증이라 하셨지요. 그럼 이 소갈증은, 가족과 관련된 것 아닌가요?”

왕 태의는 저절로 정미를 얕잡아 보지 않게 되었다.

‘방금 어린 아가씨가 우연히 맞춘 게 아니라 원래 정말로 뭔갈 아는 아이였구나.’

왕 태의도 최근에야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때때로 부모가 소갈증이 있으면 형제자매나 자녀에게 같은 병이 생길 확률이 보통 사람들보다 높았다.

그는 정미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부모에게 이 병이 있으면, 자녀에게도 같은 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두 노부인은 친자매이시니, 동시에 같은 병을 앓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때 사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큰언니, 생각났어. 우리 어머니께서도 돌아가시기 전에 나와 비슷한 증상을 앓으셨잖아.”

“그래, 기억난다.”

단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모친은 그녀들이 어릴 때 돌아가셨기에 너무 오래된지라 잠시 떠오르지 않았을 뿐 곰곰이 돌이켜보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왕 태의, 그럼 위국공 노부인에게도 약을 지어주세요.”

사 노부인이 말했다.

“그건―”

왕 태의가 정미를 쳐다봤다.

‘이 아가씨에게 능력이 있는데, 내가 어찌 하찮은 재주를 내보일 수 있겠는가. 만약 이 아가씨보다도 못하다면 또 창피를 당할 텐데.’

정미는 왕 태의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기에 공손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왕 태의께서 이미 제 이모할머니를 진료하신 경험이 있으시니, 외조모님도 태의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왕 태의는 그제야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안심하세요. 소관은 최선을 다할 겁니다. 위국공 노부인께서 이미 시야가 흐려졌다고 하셨지만, 이건 감정이 격해진 탓에 급증이 일어난 겁니다. 우선은 활동하기에 편치 않으시니, 여기서 약을 드신 후 가시지요.”

왕 태의는 각종 주의사항을 설명한 뒤 약을 달이러 갔고,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정미를 쳐다봤다.

“사촌 누이, 정미에게 어찌 이런 능력이 있는 거야? 궁 안의 태의보다 대단한 거 아냐?”

사광량은 감개무량했다.

한 씨는 득의양양하여 입꼬리가 귀에 걸려서는 겸손하게 말했다.

“태의보다 대단하다고 말할 순 없지. 하지만 정미가 죽어가는 임부도 살리고, 이미 죽은 부인의 배 속에서 태아를 살려낸 건 사실이야.”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모두가 분분히 물었다.

한 씨는 정미가 자신을 슬쩍 잡아당기는 것도 개의치 않고 희색이 만면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경탄하자, 한 씨는 찻집의 이야기꾼처럼 더욱 열심히 설명했다.

정미는 난처하기도 하고 어이도 없었다.

‘예전엔 어찌 어머니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걸 못 알아봤지. 만약 설서(*說書: 이야기꾼)를 했다면 분명 설서 선생들의 밥그릇을 다 빼앗을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뺨을 붉히며 단 노부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단 노부인은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으며 아까보다 안색이 더욱 좋아 보였기에, 정미는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외조모님을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는 그냥 두지 뭐.’

한편 계속 정미를 신경 쓰고 있던 사철은 정미의 웃는 얼굴을 보자 잠시 멍해졌다.

마침 이때, 정미도 무의식적으로 눈을 들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사철의 외모는 아주 훌륭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그는 문풍이 성행하는 회성의 학자 가문 출신으로 학자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져 수도에 있는 또래의 소년들의 경박함과 교만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미는 이 아주 먼 친척 오라버니가 좋지도 싫지도 않았지만, 오늘 미리 설탕물을 준비한 행동 이후론 조금의 호감이 생겨났다.

미리 설탕물을 준비한 것은 결코 자신의 말을 믿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그저 필요할 때 노인의 병세를 지체시키지 않게 곧바로 쓸 수 있게끔 한 것이었을 터였다.

이 세심하고 침착한 성정은 정미로 하여금 자신의 오라버니가 떠오르게 했기에 정미는 이런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미는 저절로 작은 패왕인 용흔을 떠올렸다.

‘나이도 비슷한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역시 자주 넋을 놓는 버릇은 나빴다. 정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져, 사철은 귀 끝이 빨개져서는 시선을 피했다.

이런 두 사람의 행동은 허 씨의 눈에 들어왔고, 허 씨는 귀 끝이 빨개진 아들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정가의 아가씨와 철이는 어느 방면에서나 모두 잘 어울리지. 그저 왕래가 없었고, 정가의 셋째 아가씨는 수도에서 명성이 그리 좋지 않으니 고려하지 않았을 뿐.

그런데 오늘 보니 셋째 아가씨는 가진 능력을 떠나서, 말도 일 처리도 꽤 잘하는 것 같은데. 다른 건 몰라도, 아까 왕 태의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뜻밖에도 신축자재한 셋째 아가씨가 몇 마디 말로 왕 태의를 구슬려서 큰이모님께 약을 달이러 가게 했지. 이런 수완만으로도 충분히 사가의 맏며느리가 될 자격이 있어.

우리 본가는 회성에 있고, 지금은 나리가 수도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중에 또 다른 곳에 가야 할지도 모르잖아. 아들에게 총명한 며느리를 붙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 음, 하지만 셋째 아가씨의 인품이 어떤지는 우선 한번 보고 말해야겠어. 다행히 두 아이 모두 아직 어리니까, 급한 일이 아니니.’

며느리로 맞을 생각에, 허 씨는 더욱 자세히 정미를 관찰했다.

왕 태의가 약을 달여와 단 노부인한테 먹이고는 당부했다.

“약을 드셨으니 몸이 피로하여선 안 됩니다. 우선 한 시진 정도 쉬셔야 합니다.”

모두 왕 태의의 당부에 따랐다.

허 씨가 점심 식사를 마련하며 한 씨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배고프진 않으신가요? 사실 노부인께서 아프셔서 모두 놀란 탓에 아직도 식사를 하지 못했거든요.”

“우리도 아직 먹지 않았어요. 어머니께서 서신을 받자마자 급히 움직이셨거든요.”

“그럼 두 노부인 먼저 쉬시게 하고, 저희는 식사를 들지요.”

두 노인의 건강을 걱정한 탓에 식사는 사 노부인의 거처 가까운 곳에서 하게 되었다. 친척 관계였기 때문에, 병풍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고 남녀로만 두 식탁에 나누어 앉았다.

사가는 식구가 많지 않았기에, 사내 쪽 식탁에는 사광량과 사철, 그리고 사철의 형제 사안(謝安)이 있었고, 여인 쪽 식탁에는 정미 모녀와 허 씨의 딸 사효(謝曉)가 있었다.

정미와 사효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사효는 정미와 나이가 비슷했고, 가끔 위국공부에 놀러 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사효는 ‘식사할 땐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예절을 지키지 않고 정미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언니, 우리 조모님이 설탕물을 마셔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안 거야?”

정미가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나는 부의잖아. 마침 배운 거라, 조금 알고 있었어.”

당연히 아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다.

사효는 두 눈을 반짝이며 정미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언니, 정말 대단하다. 방금은 우리 모두가 깜짝 놀랐어.”

그녀는 큰오라버니 사철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우리 큰오라버니도 평소엔 아주 침착한데, 오늘은 많이 당황했었거든. 언니는 모르지. 오늘 언니네를 마중 나갈 때, 신발도 잘못 신었었다고. 그것도 내가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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