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사가(謝家)로 가다
정미는 밖으로 나와 가볍게 한숨을 돌렸다.
3월의 화원은 가장 무성할 때였다. 수백 가지 꽃이 피어있었고, 나비와 벌이 춤을 추었으며, 아름다운 붉은빛과 초록빛이 마음의 번뇌를 조금 누그러트릴 수 있게 했다.
정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원래 사촌 언니인 한추화를 찾아가 같이 놀려고 했지만, 한지가 따라다닐까 봐 포기하고 얌전히 단 노부인의 거처로 돌아갔다.
“미야, 어찌 이리 빨리 왔느냐?”
단 노부인이 의아해했다.
정미는 단 노부인 앞에선 애교스러운 어린 손녀였기에, 다가가서 그녀의 팔짱을 끼며 방긋 웃었다.
“큰 사촌 언니에게 가지 않았어요. 화서만 보고 바로 돌아왔지요.”
“왜 안 갔니?”
단 노부인은 큰손녀를 떠올리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장손녀는 인품과 용모 모두 출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운이 좋지 않아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유복녀가 되었다.
만약 그때 둘째 며느리인 류 씨가 아들 하나라도 양자로 들였다면, 지금 한추화도 정미처럼 곁에서 도와주는 형제가 있었을 테고, 국공부의 적장손녀로서 혼사도 걱정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류 씨는 양자를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녀와 남편이 낳은 아이가 아니었고 한추화만이 그들의 육친이기에, 양자를 들이는 게 아닌 한추화를 집에 두고 데릴사위를 들이길 원했던 것이다.
단 노부인도 류 씨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것을 가엾게 여겨 그녀의 뜻대로 하게 두었다.
나중에 국공부에서 분가하게 된 후, 만약 한추화가 시집간 상태라면 집안 재산을 나눠 받을 수 없었다. 류 씨는 양아들이 부군의 것을 가지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단 노부인도 류 씨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추화에겐 미안한 일이었다.
정미는 단 노부인의 걱정을 이해하고는 팔짱을 더욱 세게 끼며 다정하게 말했다.
“모처럼 돌아왔는데, 외조모님이랑 더 있어야지요.”
“이 녀석, 말은 예쁘게 하는구나.”
단 노부인이 크게 웃었다.
어느새 점심이 되자 단 노부인은 식사를 대접했다. 음식이 상에 올라 젓가락을 막 들었을 때, 큰여종인 악사가 급히 들어와 보고했다.
“노부인, 사가(謝家)에서 서신이 왔는데…….”
악사가 망설이자, 단 노부인은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뭐라고 하던가?”
악사는 불안했지만, 이 일을 보고하지 않을 순 없었기에 꿋꿋이 대답했다.
“사 노부인께서 좋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사 노부인은 단 노부인의 친여동생이었다. 자매가 함께 외출할 땐, 사람들은 사 노부인을 작은 단 노부인이라 부르곤 했다.
달그락하는 소리와 함께, 단 노부인의 은젓가락이 상 위로 떨어졌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한 씨가 휘청거리는 단 노부인을 부축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씨가 아는 어머니는 늘 감정을 억누르며 침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씨는 알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 주변 사람의 안 좋은 소식을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이다. 특히 단 노부인과 여동생인 사 노부인은 어려서부터 정다웠다. 사 노부인이 수도로 온 뒤론 자주 왕래하며 더욱 정이 두터워졌다.
“마차를 준비해라!”
단 노부인은 짧은 한마디를 내뱉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이마를 짚었다.
한 씨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어머니, 이런 상태로 어찌 외출하실 수 있겠어요. 우선 의원을 모셔와야겠습니다.”
그러고는 악사에게 말했다.
“뭐 하고 있느냐. 어서 집안의 의원을 모셔오고, 태의도 모셔오거라!”
“아니다, 명주야. 못 들었느냐. 네 이모가 좋지 않다지 않으냐. 지금 어찌 태의를 부를 수 있어! 어지럼증은 하루 이틀 된 병이 아니니, 그리 급하지 않다.”
단 노부인이 단호히 거절했다.
한 씨는 어머니가 결정을 내린 일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깊은 한숨을 쉬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미는 단 노부인의 팔을 안고 말했다.
“외조모님, 그래도 우선 의원을 모셔봐요. 제가 겁나서 그래요!”
단 노부인이 정미의 손등을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착한 아이구나. 걱정 말거라. 외조모가 약속하마. 사가에서 돌아온 뒤에 곧바로 태의를 부르겠다.”
꿈속에서 외조모가 돌아가셨을 때, 정미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단 노부인의 말에 정미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와 어머니가 같이 가드릴래요.”
단 노부인은 잠시 당황하더니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곧이어 세 사람은 사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고, 마차가 달리는 동안 정미는 계속 단 노부인의 상태를 살폈다.
단 노부인은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한 정미의 얼굴을 보고는 마음이 아파져 정미를 안아주며 말했다.
“역시 우리 정미가 이 할미를 가장 아끼는구나. 분명 오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보러 온 게야.”
지금 같은 상황에 딸과 외손녀가 곁에 있어 주는 것은 확실히 그렇지 않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외조모님―”
정미가 고개를 숙여 눈가에 스친 눈물기를 숨겼다.
“어머니, 말을 아끼시는 게 좋겠어요. 눈 감고 쉬세요.”
한 씨가 권했다.
단 노부인은 확실히 몸이 편치 않았기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얼마 뒤, 마침내 마차가 멈춰서자 단 노부인이 곧바로 눈을 떴다.
“도착했느냐?”
그러고는 순간 단 노부인의 표정이 굳었다.
“외조모님, 왜 그러세요?”
단 노부인의 이상함을 눈치챈 정미가 물었다.
단 노부인은 옅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정미의 팔을 토닥였다.
“괜찮다. 도착했으니, 할미를 부축해주렴.”
정미는 외조모가 토닥인 곳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작은 습관이 있었다. 외조모는 자신을 토닥이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보통은 늘 손등이나 손목을 토닥이곤 했는데, 이번엔 정미의 팔꿈치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평소였다면 정미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계속 단 노부인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기에, 왠지 모르게 이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미는 마음속의 의혹을 꾹 누르고 단 노부인을 부축해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왔다.
“외조모님, 천천히 내려가세요.”
그리고 단 노부인이 마차에서 내릴 때, 정미는 그제야 어디가 이상한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외조모님의 몸이 불편하다고 해도, 발을 뻗어 주변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갈 정도는 아닐 텐데!’
마차에서 내린 후, 정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외조모님, 눈, 눈이 왜 그러세요?”
“미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한 씨가 작게 꾸짖었다.
정미는 한 씨를 쳐다보지도 않고 단 노부인의 눈만 쳐다보며 꿋꿋이 물었다.
“외조모님, 도대체 눈이 왜 그런 거예요?”
단 노부인은 소리를 따라 정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유감스러움인지 위안인지 모를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이 녀석, 눈이 좋구나. 할미는 괜찮다. 방금 계속 눈을 감고 있었던 탓에, 갑자기 떠서 잘 보이지 않는 것뿐이야.”
정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계속 눈을 감고 있었던 게 어떻게 시력이 흐려진 원인이 될 수 있어!’
한 씨도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머니, 눈이 흐려진 건 큰일이에요. 아무래도 우선 의원을 모셔봐야겠어요.”
단 노부인은 침착했다.
“이미 도착했으니, 들어가서 얘기하자꾸나. 네 이모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 사가에도 의원이 있을 것 아니냐. 걱정 말거라. 나는 그저 조금 어지럽고, 눈이 침침한 것뿐이야. 다른 건 다 멀쩡해.”
한 씨와 정미가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권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저 좌우로 단 노부인을 부축해 들어갔다.
사가는 원래 회성(薈城)에 있었지만, 집안의 장자가 몇 년 전에 수도에서 일하게 되어 수도로 함께 오게 되었다.
때문에 수도에는 장남의 가족만 머무르게 되었고 지내는 사람이 많지 않아 저택도 그리 크지 않았다.
단 노부인이 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가의 입구엔 일찍이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사 노부인의 장손 사철(謝哲)이었다.
“큰이모할머니, 큰 사촌 고모님을 뵙습니다.”
사철이 급히 맞이하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정미를 쳐다보며 조금 의아해하더니, 이내 본인이 알던 그 정미라는 걸 깨닫고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
정미는 이 먼 친척과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친척 오라버니가 문풍이 성행하는 회성에서도 출류발췌(*出類拔萃: 무리 가운데 특출나게 뛰어난 사람)한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대충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추었다.
단 노부인이 사철에게 물었다.
“철아, 네 조모는 지금 어떠하더냐?”
사철이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조모님은 무슨 까닭인지 갑자기 정신 경련이 오셨고, 의원을 모셨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태의를 모셨는데, 약을 드셔도 호전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아, 어머니께서 더는 지체하지 않고 이모할머님께 서신을 보내신 겁니다.”
“그럼 얼른 들어가 보자꾸나!”
단 노부인은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정미는 깜짝 놀라 식은땀이 났다.
“조모님, 조심하세요!”
사철도 무의식적으로 단 노부인을 부축하다가, 공교롭게도 정미의 손과 부딪쳤다.
두 사람은 의아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고, 사철이 먼저 손을 거뒀다.
정미는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사철이 난처해할까 봐 살짝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뜻을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외조모님, 아무리 급하셔도 천천히 걸으셔야 해요.”
사가의 사람 앞에서 당연히 단 노부인의 불편함을 말할 수는 없었다. 부담을 가질 테니 말이다.
* * *
사가의 부지는 크지 않았기에 빠르게 사 노부인의 거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 노부인은 전신경련이 와 의식이 이미 희미했고, 수시로 기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방 안에선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 노부인이 들어오자,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들 일어나 맞이했다.
하지만 단 노부인은 그런 예의를 차릴 틈이 없었고, 흐릿한 시력에 적응되었는지 어렴풋이 보이는 윤곽으로 정미의 손목을 꽉 잡았다.
“미야, 할미를 부축해주거라.”
정미는 단 노부인을 부축하여 침상 곁으로 갔고, 사 노부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생아, 좀 어떻니?”
단 노부인이 더듬거리며 사 노부인의 손을 찾아 잡았다.
하지만 사 노부인은 이미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한 씨가 옆에 있던 태의에게 물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호전되지 않는 겁니까?”
이 태의는 한 씨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태의서에서 의술이 평범한 자에 속한 태의일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태의가 대답하자, 한 씨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何) 태의가 간질병을 잘 본다고 알고 있는데, 왜 하 태의를 모셔오지 않았지?”
사가의 사람이 대답하기도 전에 태의가 말했다.
“오늘 하 태의께선 당직이십니다.”
입궁하여 당직을 서는 태의는 어느 집안이라 해도 모셔올 수 없었다.
사 노부인의 맏며느리인 허(許) 씨가 말을 이었다.
“노부인께선 소갈증(*消渴症: 당뇨병)을 앓고 계셔서, 늘 왕(王) 태의께서 오셨습니다.”
‘소갈증’이라는 단어가 정미의 신경을 건드렸다. 정미는 혼란과 흐느낌이 가득한 방 안에서, 단 노부인에게 기대어 아혜와 소통했다.
‘아혜, 내 이모할머니께서 소갈증을 앓고 계신데, 지금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고 계셔. 하지만 약을 먹은 뒤로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고 있어. 왜 그런 걸까?’
「소갈증이 있고, 경련과 발작을 일으킨다?」
아혜는 정미의 말을 반복하더니 다시 물었다.
「지금은 어떤데? 자세히 설명해봐.」
정미의 설명을 들은 아혜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저혈당 때문이네.」
‘저혈당?’
정미가 잘 이해하지 못하자, 아혜는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음식을 너무 적게 먹었거나, 약을 먹어서일 거야. 소갈증을 앓는 환자는 정상인처럼 체내의 당분을 조절하지 못해. 그래서 체내의 당이 오히려 뚝 떨어져 버린 거지.」
‘그럼 어떡해?’
「얼른 설탕물을 먹여. 그럼 증상을 완화할 수 있을 거야. 만약 환자가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져든다면, 좀 성가시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