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화서를 살피다
“오라버니?”
정미가 부르자, 정철이 옅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화제를 돌렸다.
“맞다, 미미. 오늘 오라버니가 덕소 장공주부에 가서 네 휴가를 대신 냈어. 장공주께서 네게 열흘의 휴가를 내주셨으니, 그동안 푹 쉬어. 최근 안색이 좋지 않더라.”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뺨을 어루만졌다.
부적을 만들 때마다 자신의 피를 써야 한다는 사실은 당연히 정철에게 알려줄 수 없었다.
“오라버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그렇게 긴 휴가를 내버리다니. 장공주께서 내가 시험을 피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어.”
“시험?”
“응. 상사절 전날, 장공주께서 다음 방문 땐 내 승마와 활 솜씨를 시험하신다고 하셨거든. 승마는 그렇게 무섭지 않아. 능숙하지는 않지만, 자주 타는 그 흑마가 온순해서 무리 없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거든. 그런데 활은 안 돼. 아무래도 장공주께선 다섯째 공주의 정확한 활 솜씨에 적응되신 것 같아. 내 실력을 보면 분명 차마 볼 수도 없으실걸.”
정철이 웃으며 위로했다.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장공주께서도 이해하실 거야.”
하지만 정미는 여전히 걱정되었다.
정미는 승부욕이 강했으나 예전부터 정요보다 자질이 한참 뒤떨어지는 걸 분명 알고 있었다. 정요가 아무렇게나 뱉어낸 시는 놀랍도록 아름다웠지만, 정미가 머리가 깨질 정도로 생각하여 지은 시는 그저 평범했다. 하지만 정미는 포기하지 않고 이를 갈며 열심히 공부했고, 언젠간 정요를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품어오곤 했다.
“이렇게 하자. 미미, 이틀만 더 쉬고 오라버니가 너랑 연습해줄게. 어때?”
정미가 아주 기뻐했다.
“너무 좋지. 고마워, 오라버니.”
* * *
저녁이 되자, 정미가 한 씨에게 찾아가 간청했다.
“어머니, 내일 외가에 가고 싶어요.”
“왜 잘 있다가 국공부에 가려는 거니?”
한 씨가 탁자 위의 서신들을 가리켰다.
“상사절 이후로, 적지 않은 집안의 여식들이 너를 손님으로 초대하고 싶어 하는데, 내가 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있거늘, 내일 그렇게 멀쩡히 외출하면 이목을 끌지 않겠니?”
정미도 이 일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셋째 숙부님의 말로는 어떤 부인은 의관에 두 번이나 찾아왔다고도 하셨지.’
하지만 정미는 그 사람들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건 그저 신기함 때문이었기에, 당연히 상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미가 급하게 국공부에 가려고 하는 건, 화서의 병 때문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외조모님이 너무 보고 싶은걸요. 어머니,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있나요? 부의로서 사람들의 요구를 다 들어줘야 하는 것도 아닌걸요. 게다가 그 사람들은 그저 제가 궁금할 뿐이에요.”
한 씨도 시원스러운 성정이었기에, 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그럼 내일 같이 가자꾸나.”
* * *
“정미가 정말 나를 보고 싶어 했느냐?”
위국공 노부인 단 씨가 아주 기뻐하며 정미의 손을 잡아당기며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한 씨에게 말했다.
“봐라, 우리 미는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정미는 단 노부인의 말에 뺨을 붉혔고, 한 씨는 정미를 진지하게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아요.”
정미는 의아한 듯 한 씨를 쳐다봤다.
‘어머니가 인정하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네!’
“됐다, 늙은이와 있으면 재미없을 테니, 미야, 가서 네 사촌들과 놀거라.”
정미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외조모님, 화서도 집에 있나요?”
단 노부인이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있단다. 근 이틀 동안 몸이 별로 좋지 않아서, 자기 방에서 쉬고 있지. 학당에도 가지 않았어.”
정미의 표정이 살짝 굳었고, 더는 앉아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서가 또 아프다고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정미는 국공부의 길에 아주 익숙했기에 안내인 없이 환안을 데리고 급히 화서에게로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정미의 외숙모인 조 씨가 피식 웃었다.
“노부인, 보세요. 사촌 아가씨가 정말 우리 사촌 공자를 보고 싶었나 봅니다.”
조 씨는 용모와 성정이 모두 평범했고, 부군의 총애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들을 연이어 셋이나 낳았고, 단 노부인이 직접 고른 며느리였기에 떳떳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한 씨와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단 노부인이 기뻐하며 한 씨를 쳐다보았다.
“사촌 남매 둘이 어려서부터 아주 친했지.”
조 씨는 몰래 입을 삐죽이며, 위국공 부인 도 씨를 흘끗 쳐다봤다.
‘친하려면 사촌 아가씨와 세자가 제일 친해야 하는데, 결국 어떻게 되었지?’
화서의 허약한 체질을 떠올린 단 노부인은 기분이 조금 가라앉아 화제를 돌려 눈살을 찌푸리며 한 씨에게 물었다.
“정요가 파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수도의 상류층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이런 일은 소문이 아주 빠르게 퍼지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정요는 알려지지 않은 서녀가 아니라, 경성 제일 재녀라는 명성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한 씨도 집안의 망신은 밖으로 퍼뜨려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까닭 없이 병을 얻었습니다. 꼴이 별로 좋지 않아요. 어머니께서도 아시듯이, 저희도 그리 횡포한 가문이 아닙니다. 딸이 아픈데, 어찌 다른 집안에 폐를 끼칠 수 있겠어요.”
단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내가 보니 정요는 요절할 관상이 아니었다. 안심하거라.”
단 노부인도 한 씨가 그 서녀에게 늘 잘 대해줬던 걸 알고 있었다. 이리 시간이 흘렀으니 모녀의 정도 있을 것이라 생각해 아무렇게나 한 씨를 위로했다.
“정말로요?”
한 씨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요절하지 않는다고? 설마 그 화근이 아주 오래 산다는 말인가? 안 돼, 앞으로 얼음을 더 추가해야겠구나! 나리께서 그 천한 것을 살려두라 하셨으니, 나는 그것의 몸을 괴롭혀서 못쓰게 할 거야. 몸이 약해져서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는 건 둘째치고, 만약 정말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더라도 출산할 때 저승문을 두드리게 해주마!’
그때 도 씨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께선 늘 사람을 정확히 보셨는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요의 몸이 다 나은 뒤 다시 좋은 사위를 찾으면 돼요.”
한 씨는 입술을 떨며 생각했다.
‘한지가 내 친조카라서 참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저 낯짝에 대고 그 둘을 반드시 이어줘야 한다고 우겼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도 이렇게 웃을 수 있을까?’
“정요가 파혼했으니, 어찌 제가 알맞은 사위를 찾아다닐 수 있겠어요. 이젠 그 아이 아버지에게 맡겨야겠지요.”
한 씨가 담담하게 말하자, 조 씨가 웃었다.
“그것도 그렇지요. 어쨌든 그 애는 그저 서녀일 뿐이니. 이젠 정미가 많이 컸으니, 정미를 신경 쓰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이 말에 한 씨는 단 노부인과 마주 보았다.
도 씨와 조 씨가 떠나자, 단 노부인이 한 씨에게 물었다.
“명주야, 아까 그 아이 말이 맞다. 정미도 내년이면 급계를 해야 하는데, 마음속에 생각해둔 사람이 있느냐?”
한 씨는 대답을 망설였다.
단 노부인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화서의 몸이 괜찮았다면, 두 아이가 이어졌어도 좋았을 텐데. 내가 보살펴주면 그 둘도 구박을 당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한 씨도 그제야 대답했다.
“저도 그리 생각했어요. 저도 화서를 아주 좋아하니까요. 용모도 출중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요. 또 총명하고 슬기로우니. 다만, 건강이…….”
단 노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한 씨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다행히 정미도 아직 어리니, 2년 정도 뒤에 다시 봐도 늦지 않을 거예요.”
‘다시 본다’는 뜻은, 화서의 병이 2년 동안 괜찮아질는지 보겠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그동안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것도 그르치지 않을 터였다.
단 노부인도 그 말 뜻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둘의 사이는 정말 좋으니 말이다. 작년에 화서는 정미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왔단다. 그리고 방금 정미를 봐라, 화서가 아프다는 소식에 표정도 굳어서는 누구보다도 급하게 달려가더구나.”
* * *
단 노부인과 한 씨가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정미는 이미 화서에게로 도착해 그의 이마를 짚어보는 중이었다.
“왜 이렇게 뜨거워?”
화서는 침상 머리맡에 기대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화서를 더욱 창백해 보이게 했지만, 표정은 기쁜 표정이었다.
“괜찮아, 이틀 정도 지나면 다 나을 거야.”
“왜 또 아픈 거야?”
정미가 화서의 하얀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을 이었다.
“알겠다, 분명 몸도 안 좋으면서 상사절에 굳이 놀러 나가서 그런 거지? 그렇지?”
화서는 입을 꾹 다문 채 불편한 듯 얼굴을 피했다.
‘상사절에 안 나가면, 너를 어떻게 만나는데? 이 바보!’
정미는 습관적으로 화서의 뜨거운 얼굴을 건드리며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고, 미리 준비한 배원부 부수를 꺼내 화서에게 건넸다.
“어서 마셔.”
화서가 부수를 건네받아 열어보더니 물었다.
“이게 뭐야?”
“부수. 앞으로 3개월마다 한 번 마시면 몸이 더 나빠지진 않을 거야. 원래 상사절에 기회를 잡아서 네게 주려고 했는데, 너도 봤듯이 공교롭게도 그런 일을 마주쳤잖아. 일을 다 처리하고 나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까먹고 말았어. 그땐 그저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을 하고 싶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거든.”
화서는 부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입가를 닦으며 웃었다.
“그럼 3개월마다 나한테 이걸 주는 거야?”
“응. 거르면 안 돼.”
“내가 마을로 돌아가면?”
“내게 시간이 있으면 주러 가고, 없으면 사람을 보낼게. 어쨌든 거르지만 않으면 돼.”
앞말을 들었을 때 화서는 눈을 반짝였지만, 뒷말을 듣고는 다시 실망했다. 하지만 화서는 외로움에 익숙해져 있었고, 어려서부터 감정을 잘 억제해왔기에 얼굴에는 실망감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작게 말했다.
“그래, 네가 잊으면 내가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할 거야.”
“걱정하지 마. 다른 건 잊어도 이건 안 잊어.”
이때 어린 여종이 보고를 올렸다.
“세자께서 오셨습니다.”
정미와 화서가 마주 보며 생각했다.
‘한지가 지금 시간에 왜 집으로 돌아왔지?’
“들어오시라 해.”
잠시 후, 한지가 걸어들어왔다.
“화서, 오늘은 좀 괜찮아?”
한지는 화서에게 물으면서도, 신경은 온통 정미에게 쏠려있었다.
“정미, 왔어?”
정미가 일어나며 말했다.
“화서, 온 지 좀 되었으니 나도 가볼게. 어머니가 기다리실 테니.”
그러고는 한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지 오라버니, 화서랑 얘기하세요. 전 먼저 가볼게요.”
화서와 한지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미는 뒤돌아서서 걸어갔다.
한지는 정미가 이리 시원스럽게 떠날 줄은 몰랐기에 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정미, 기다려봐.”
정미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져 한지에게 붙잡힌 자신의 손목을 향해 차갑게 꽂혔다.
그 손은 가느다라면서도 힘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즐겁게 잡고 다니던 손과의 감정은 수줍은 기쁨으로 점차 변해갔으나, 지금은 그저 혐오감만을 느끼게 했다.
정미는 그 혐오감이 물밀 듯이 올라와 아주 피곤해졌다.
정미는 한지의 말은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면 정요 얘기만 하기 때문이었다.
정미의 표정이 너무 침착하고 눈빛이 너무 차가운 탓인지, 한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놓았다. 그리고 말문을 열기도 전에 정미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한지와 화서가 동시에 묻자, 정미는 아랫배를 누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좀 불편하네, 먼저 가볼게!”
정미는 뒤돌아서며 화서를 급히 흘끗 보고는 익살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화서는 무의식적으로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한지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발을 들어 쫓아가려고 하자, 화서가 느긋하게 말했다.
“지 형님, 일부러 나를 보러 와주다니 고마워.”
화서의 말에 한지는 아쉽지만 다시 몸을 돌렸고 화서의 옆에 다가가 앉아 인사말을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