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한 씨의 처벌
한 씨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둘째 나리가 막아섰다.
“당신, 어딜 가는 거요?”
몹시 화가 난 한 씨는 매서운 말투로 말했다.
“어딜 가냐고요? 당연히 그 뻔뻔하고 미천한 것에게 가는 것이지요. 흰 천으로 목을 매달라 해야겠습니다!”
“허튼소리!”
둘째 나리가 고함쳤으나, 한 씨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그를 쳐다봤다.
“당신이 정요의 적모라는 걸 잊어선 안 되오! 정요를 그렇게 만든 사내가 다른 이었으면 몰라도, 당신의 조카 아니오. 이리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 서녀를 목매달겠다고 하고, 당신의 조카는 무사하게 둔단 말이오?”
한 씨의 멍한 눈빛에, 둘째 나리는 소매를 뿌리쳤다.
“당신은 정가의 부인이오.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집안을 위해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하진 못할망정, 조카의 뒤치다꺼리를 할 생각만 하다니! 정말 나를 실망시키는구려!”
“나리 말씀이 맞아요.”
한 씨가 중얼댔다. 자신이라고 어찌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미는 툭하면 때리고 욕하면서, 그 천한 것은 늘 감싸들기만 하니. 아니, 나리가 감싸드는 건 자식들이 아니라 집안의 이익인 걸까?’
한 씨는 뭔가 떠오른 듯 오히려 차분해졌다.
“그럼 나리께선 어찌 하려고 하십니까?”
둘째 나리는 자신의 말이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숨을 돌렸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소. 정요가 급병을 얻었다 하고, 일단 혼사를 취소한 뒤, 시간이 좀 지나면 당신이 국공부로 돌아가 한번 떠보시오.”
한 씨는 입가에 비웃음을 지으려는 걸 꾹 참았다. 나리의 말은 그저 황당하고 터무니없었다.
“나리께선 국공부에서 시랑부와 파혼하고, 정요를 들일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요도 어쨌든 백부의 아가씨요. 돈도 세력도 없는 집안의 아가씨가 아니라. 설마 정요를 이리 만들어 놓았는데,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셈이오? 시간이 좀 지나면 당신이 가서 말해보고, 국공부의 생각을 알아보시오.”
둘째 나리는 정요의 말을 모두 믿지 않았다. 이미 정혼한 세자가 정혼을 취소한 뒤, 파혼한 서녀를 아내로 맞을 능력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가 한 씨 보고 돌아가 보아라 한 것은, 그저 위국공부에서 이 일을 어찌 처리하는지 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백부가 정성껏 키운 딸을 망가뜨렸으니, 최소한의 대가는 치러야겠지.’
“알겠습니다.”
한 씨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리도 아버지가 된 자로서, 그 천한 것의 마지막 가치를 쥐어 짜낼 뿐이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한 씨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것을 느껴, 한 씨는 나리가 나간 뒤에 꿈쩍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 한 씨가 입을 열었다.
“설란, 가서 둘째를 데려오거라.”
* * *
“어머니.”
정요가 한 씨 앞에서 무릎을 살짝 낮추며 인사했다.
한 씨는 싸늘한 눈빛으로 정요를 살펴봤다.
높은 목깃의 녹두색 상의와 노란색의 꽃무늬 주름치마를 입은 정요는 상큼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봐선 알 수 없군!’
한 씨는 십몇 년간 정요의 속내를 알지 못했던 것만 떠올리면 구역질이 났다.
한 씨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너희 모두 물러나고, 설란과 상란만 남거라.”
시종들이 물러났고, 한 씨는 정요 뒤에 서 있는 포금을 한 번 쳐다봤다.
“너도 나가거라!”
포금은 저도 모르게 정요를 흘끗 쳐다봤고, 정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요는 이미 둘째 나리가 한 씨에게 그 일을 얘기했다는 걸 눈치챘다.
아버지의 관문을 통과하니, 어머니는 그리 무섭지 않았다.
‘어머니는 줏대가 없는 어리석은 자이니, 아버지가 하는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듣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 나를 여기 불러오지 않고, 곧바로 쇄옥거에 와서 나를 죽였을걸.’
한 씨는 침착한 정요를 보고 이를 갈며 그녀를 흘겨봤다.
“네 아버지께서 이미 내게 말하셨다.”
정요가 천천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한 씨가 차갑게 웃었다.
“송구스럽다고? 하하, 네가 송구스러울 게 뭐 있겠느냐? 정요, 넌 내 착한 딸인데 말이다!”
“어머니, 저도 고의로 어머니께 상심을 안겨드린 게 아닙―”
“그만!”
한 씨가 손을 들어 정요의 말을 끊었다.
“네가 하는 감언이설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한 씨는 일어나서 정요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미소지었다.
“네 아버지께서, 네가 급병을 얻었으니 혼사를 취소하라 하시더구나.”
정요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으나, 고개를 푹 숙여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한 씨의 얼굴에 스친 흉악한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일어나거라.”
정요가 천천히 일어났고 고개를 숙인 채 한 씨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혼사를 무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견딜 수 있어!’
“설란, 상란, 둘째 아가씨를 모시고 욕실로 가서 목욕 시중을 들거라!”
“어머니?”
정요가 고개를 들고 의아해했으나, 한 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욕실로 향했다.
“둘째 아가씨, 모시겠습니다.”
설란과 상란은 정요를 양옆에 끼고 욕실로 갔다. 정요는 처음으로 한 씨에게 불안한 마음을 느꼈다.
이번만큼은 평소와 좀 다른 듯했다.
한 씨는 욕실에 있는 의자에 앉아 턱을 치켜들었다.
“멍하니 있지 말거라. 이 애는 좀 이따가 요양하러 가야 하니 말이다.”
한 씨는 ‘요양’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조롱했다.
설란과 상란은 이미 정요의 옷을 벗기는 중이었고, 정요는 무의식적으로 피했다.
“어머니, 저는 이미 점심에 목욕을 했어요.”
한 씨는 이미 정요를 깊게 미워하고 있었다.
한 씨는 솔직한 사람이었고, 속과 겉이 다른 것을 가장 싫어했다. 화날 때는 친딸인 정미에게조차 때리고 욕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서녀에게는 곧바로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마디만 더 했다간 행주를 네 입에 물릴 테다! 벗겨지는 게 싫으면 스스로 벗거라!”
이에 정요의 눈이 커졌다.
한 씨의 엄격한 눈빛을 마주하자, 정요는 그저 부끄러워하며 옷을 한 겹씩 벗을 수밖에 없었다.
한 씨 같은 적모는 성질만 제대로 파악하면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요는 이런 사람이 외면하기 시작하면, 일말의 정도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는 뒤에선 칼을 갈고 앞에선 따뜻한 웃음의 짓는 안주인들보다 더욱 무서웠다.
‘이 세상 어느 안주인도, 서녀가 옷을 벗는 걸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바라보진 않을 테니까!’
“어머니, 되었나요?”
속옷만 입은 정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굴욕은 반드시 되갚아주겠어!’
“그래. 너희, 둘째 아가씨를 모시고 들어가 씻겨드리거라.”
한 씨는 자신이 내린 결심에 대해선 단호한 사람이었기에, 절대 꾸물거리지 않았다.
“둘째 아가씨, 들어가시지요.”
설란과 상란이 정요를 끌고 욕통으로 데려갔다.
정요는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욕통을 보며 깜짝 놀랐다.
“어머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차가운 물로 씻으면 몸이 견디지 못할 거예요.”
한 씨가 소리 내어 차갑게 웃었다.
“급병을 얻어 파혼한 게 아니더냐? 멍하니 뭐 하고 있느냐, 어서 둘째를 넣지 않고!”
설란과 상란은 이렇게 성난 표정의 한 씨를 처음 보았다. 집안 아가씨를 대하는 태도를 보자, 주인이 정말 화가 나면 자신들 같은 여종은 어찌 될지 뻔했다.
때문에 그들은 더욱 힘을 내어 정요를 목욕통으로 끌고 갔다.
어쨌든 아가씨일 뿐인 정요는 두 사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욕통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3월의 날씨에 조금의 온기도 없는 찬물로 들어가자, 정요는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몸부림쳤고, 발악하려고 했으나 두 여종이 꾹 누르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요는 점차 차가운 물에 적응해갔고,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눈가엔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렸다.
‘언젠간 어머니를 가만두지 않을 테다!’
한 씨는 묵묵히 쳐다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빨리 침착해지다니,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속여온 이유가 있었구나!’
“설란, 물이 많이 없어졌구나. 어서 물을 더 넣거라.”
“예.”
설란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그녀는 옆의 나무통에서 물을 길어 정요의 정수리에 부었다.
“악―”
정요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고, 분노와 원망이 담긴 눈으로 한 씨를 바라봤다.
‘이 독부(毒婦), 정말 지독하구나. 찬물로 씻기는 것도 모자라 살얼음이 섞인 얼음물을 끼얹다니! 이러면 내가 아이를 가지는 데 영향을 줄 텐데!’
정요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결국 또다시 끼얹어지는 얼음물을 피하지 못했다.
정요는 점점 힘이 빠져나갔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게 되었다.
“됐다.”
한 씨가 손을 들었다.
“둘째에게 옷을 입혀주고, 모셔다드리거라.”
설란과 상란은 가느다란 숨을 쉬는 정요를 끌고 나와 옷을 입힌 뒤 데리고 나갔다.
바깥에 있던 포금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 아가씨께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설란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잘 몰라. 부인께서 말씀을 묻고 계신데, 둘째 아가씨께서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온몸에서 한기가 올라오시던걸. 우리 부인께서도 깜짝 놀라셨어. 포금, 얼른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가 쉬게 해드려.”
포금은 반신반의하며 힘들게 정요를 부축해서 돌아가다가 교용과 우연히 마주쳤다.
새파랗게 질린 정요의 안색을 본 교용은 깜짝 놀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께서 왜 이러시는 거야?”
포금이 교용을 흘끗 노려봤다.
“멍하니 뭐 하는 거야. 어서 도와.”
교용이 손을 뻗어 부축하려다가 급히 손을 거뒀다.
“왜 이렇게 차가워?”
“몰라, 내 손도 얼 것 같아. 부인 쪽의 설란이 말하기를, 부인께서 말씀을 묻고 계신데, 아가씨께서 갑자기 이렇게 되셨대. 아가씨 안색 좀 봐. 얼음처럼 차갑다고. 어찌 이런 이상한 일이!”
교용은 창백한 얼굴로 포금과 함께 정요를 부축해 거처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급히 쇄옥거를 떠나 비서거로 향했다.
* * *
“교용 언니?”
비서거의 입구에 앉아있던 청가가 일어났다.
“청가―”
급히 달려온 교용은 벽을 짚고 숨을 헐떡였고, 청가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후, 교용이 청가에게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청가, 셋째 아가씨께서…… 아프시다던데?”
“응.”
청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의심스럽게 교용을 쳐다보자, 교용이 말했다.
“아, 나도 한때 셋째 아가씨를 모셨었으니,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뵈러 온 거야.”
‘그렇지만 아가씨께서 교용을 둘째 아가씨께 보내버렸던 거고, 최근 아가씨는 분명 쇄옥거 쪽과 소원해지셨는데 굳이?’
이는 아직 나이가 어린 청가에게도 보이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교용을 대하는 태도는 예전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교용 언니, 세심하구나. 우리 아가씨는 거의 다 나으셨어.”
“거의 다 나으셨다고?”
교용의 목소리는 높아져 마치 비명처럼 들렸다. 교용은 청가의 의심스러운 눈빛에 급히 마음속의 공포를 가라앉히고 억지로 웃었다.
“이렇게 빨리? 어젯밤부터 아프기 시작하셨잖아?”
청가는 불쾌한 듯 입을 삐죽였다.
“교용 언니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 아가씨가 빨리 나으신 게 싫다는 거야?”
“아냐, 아냐…….”
교용이 급히 부인했다.
“나는 그저 좀 놀라워서. 내가 아직 셋째 아가씨를 뵙지도 못했는데 다 나으셨다니까, 옛 종으로서 부끄러워서 그래.”
청가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라고. 우리 아가씨께서 다 나으신 게 가장 중요한 거지. 솔직히 말할게. 오늘 오전에 다섯째 공주께서도 오셨어.”
“다섯째 공주?”
“그래. 수(秀) 아주머니께서 우리 아가씨는 몸에 풍사(風邪)가 든 것이라 하셨거든. 근데 다섯째 공주께서는 황가의 핏줄이잖아.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낫지 않을 리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