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헛소문
정동은 아주 천천히 걸었다.
서재의 문이 갑자기 열린 순간, 아버지가 흉악한 표정으로 정요의 목을 조르는 모습을 본 뒤부터, 어째서 정미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교용에게 한 말도 아주 이상했다.
‘둘째 언니가……, 무슨 염치없고 황당한 일을 저지른 거지?’
정동은 생각에 잠겨 걸었고 점점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께 이렇게 꾸중을 들었다니, 분명 다른 사내와 정을 나눈 것이겠지! 그 사내는 누굴까?’
문득 한 사람의 이름이 정동의 마음속에 떠올랐고, 아마도 정동은 이 때문에 정미를 보러 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넷째 아가씨를 뵙습니다.”
문을 지키던 청가가 정동을 보자마자 의아해하며 예를 갖췄다.
정동은 찬합을 들어 올렸다.
“셋째 언니가 아프다고 해서, 보러 왔어.”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소인이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정동은 제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나를 만나줄지 어떨지는 확실치 않아. 정미는 성질이 더러워서,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에겐 사정없이 차갑지. 나처럼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티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나를 만나주지는 않겠지?’
정동은 실망스러운 건지 안심이 되는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사실 아직도 왜 자신이 정미를 보러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청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넷째 아가씨, 들어오시라고 하셨어요.”
주렴을 지나 병풍을 돌아 들어가니, 정미가 침상 머리맡에 비스듬히 기대있는 것이 보였다. 정미의 검은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져 있었고, 얼굴엔 아픈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뜻밖에도, 꽤나 친절하면서도 담담하게 정동에게 묻는 것이었다.
“무슨 일로 왔어?”
정동이 다가가 찬합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웃었다.
“셋째 언니가 아프다고 해서 보러 왔어. 아, 이건 오늘 막 만든 토란떡이야. 맛이 괜찮아서 언니도 먹어보라고 가져왔어.”
정동은 그렇게 말하면서 접시에 담긴 토란떡을 들고 왔다.
정미는 그런 그녀를 흘끗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참 친절하구나. 나를 보러 온 것만으로도 이미 아주 의외인데.”
정동은 앉아있기가 편치 않았다.
‘역시 정미는 말을 예쁘게 할 줄 모른다니까.’
예전이었으면 벌써 화냈을 정동은, 지금 여길 나갈 마음조차 들지 않아 입을 오므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어제 산으로 놀러 나갔으면서, 오늘은 왜 아파서 일어나지 못하는 거야?”
정미는 정동이 왜 병문안을 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확실히…… 병문안이 필요했기에, 억지로 웃으며 두어 번 기침하고는 말했다.
“어제 산에 올랐다가 찬 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봐. 오늘 일어날 수가 없네.”
“아, 어쩐지. 산 위는 원래 추운데, 어제 그렇게 옷을 많이 입은 것 같지는 않더라고.”
정미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정동의 입술을 쳐다보며 말했다.
“입술이 왜 그래?”
정동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실수로 깨물었어.”
정미가 작은 도자기 병을 건네며 말했다.
“어제 만든 부수야. 상처에 바르면 효과가 있으니, 괜찮으면 써봐.”
‘정동의 방문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으니, 고마움을 표하는 거라 치지 뭐. 관심 없는 사람에게 정을 빚지고 싶지 않으니까.’
정동은 의외라는 듯 멍하니 건네받고는, 고개를 숙여 작고 정교한 도자기병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어떻게 쓰는 거야?”
“상처에 바로 바르면 돼.”
정미는 오늘 정동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병문안을 온 목적도 알 수 없었기에, 놀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바로 써도 돼.”
정미는 정동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었다.
‘이 울보가 나를 찾아온 건 무슨 계획이 있어서겠지. 그러니까 내가 먼저 수를 놓아야지. 지혈생기부 한 병 정도는 아깝지 않아. 어쨌든 어제 둘째 오라버니한테 시신에게 사용하라고 주려 했던 거니까…….’
정동은 아주 잠시 망설이더니,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해볼게.”
정동은 병을 열고 몇 방울을 손가락에 떨어트려 입술에 발랐다.
그 순간, 입술의 통증이 사라지자 정동은 깜짝 놀랐다.
정동은 말도 잇지 못하고 곧바로 화장대 앞으로 달려가 말끔히 나은 붉은 입술을 보며 멍해졌다.
최근 정동은 정미에 대한 신기한 소문들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고,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다시 뒤돌아섰을 때, 정미를 보는 정동의 시선은 이미 크게 변해있었다.
“셋째 언니, 이 부수 정말 신기하다…….”
이쯤 되자, 이 부수가 정말 정미가 만든 것인지 물어보고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미의 담담한 눈빛을 마주하자 갑자기 호기심이 사라지게 된 터라, 정동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언니, 요즘 둘째 언니와 같이 있지 않는 것 같던데, 싸웠어?”
정미는 의아해하며 정동을 한 번 쳐다봤다.
‘정동과 나는 계속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내가 정요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해서 본인한테 마음을 털어놓을 줄 아는 건가?’
그러나 정동도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갑자기 정미를 찾아올 생각이 든 이유가, 바로 이것을 묻고 싶어서였을지도 몰랐다.
‘정미도 나처럼 둘째 언니의 숨겨진 모습을 알게 된 것 아닐까?
그리고 아버지. 나는 늘 정미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좋은 아버지에게 만날 때마다 그리 딱딱하고 사납게 굴다니. 나에겐 좋은 일이었지만, 내가 존경하고 애정하는 아버지에게 그리 대하는 것은 어쨌든 화나는 일이니까. 하지만―’
정동은 서재에서 본 그 장면을 차마 떠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의 목을 조여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때 만약 교용이 뛰어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정말 둘째 언니를 목 졸라 죽였을까? 하지만 둘째 언니가 무슨 일을 저질렀든 간에, 어쨌든 아버지의 친딸인걸. 호랑이가 아무리 흉악해도 자기 새끼는 잡아먹지 않잖아!
만약 내가 잘못을 저지르는 날이 온다면?’
정동은 정미를 빤히 쳐다봤다.
‘정미도 아버지의 숨겨진 모습을 알고 있어서, 아버지에게 그리 냉담하게 대한 것 아닐까? 아니, 아니, 내가 너무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거야. 둘째 언니가 아버지를 화나게 했겠지.’
정동은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 자신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함에 절망했다. 늘 자신에게 온화하고 다정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뒤집히고 난 후였다.
‘혹시 이 언니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콜록콜록.”
정미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가볍게 기침했다.
정동은 정신을 차리고 말을 더듬었다.
“셋째 언니, 몸이 많이 안 좋아?”
늘 선명했던 정미의 붉은 입술이 창백했다. 정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계속 온몸에 오한이 나서.”
“그, 그럼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래. 다음에 또 보러 올게.”
정동이 일어났다.
정미는 마음속 의심을 꾹 참고 말했다.
“조심히 가. 환안, 넷째 아가씨를 배웅해드려.”
“그럴 필요 없어. 나 혼자 나갈게.”
정동은 몸종을 데리고 나갔다.
* * *
때는 대낮이었고, 뜰에 있는 꽃나무들이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시간이었다. 정동이 그 길을 지나갈 때, 누군가의 말소리를 듣고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화미 언니, 아가씨가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리신 걸까?”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서 네 일이나 해!”
“에이, 화미 언니. 아까 들어가신 넷째 아가씨를 제외하면 지금 시간에 누가 찾아오겠어. 그건 걱정되지 않아. 다른 사람들 모두가 우리 아가씨는 병에 걸린 게 아니라, 어제 죽은 부인의 아이를 받아서 그 부인의 영혼이 달라붙은 거라던데!”
정동은 곧바로 입을 틀어막고, 몸종인 낙화(落花)와 서로를 마주 봤다.
“퉤퉤퉤! 어린 계집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또 멋대로 지껄였다간 내가 네 입을 찢을 테다!”
“아악, 화미 언니, 때리지 마. 헛소리를 한 게 아니야. 나도 들은 거라고. 지금 집안에 소문이 많이 나 있는 걸?”
“무슨 소문?”
화미가 참지 못하고 묻자, 청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죽은 사람을 괴롭혔으니, 그 사람의 안녕을 앗아간 사람에게 들러붙은 거래.”
“하지만 우리 아가씨는 그 부인에게 은혜를 베풀었는걸!”
청가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귀신이 무슨 도리를 알겠어. 아가씨께서 그냥 잠시 아픈 걸 수도 있지만,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거야.”
“됐어, 그런 이상한 얘긴 그만해. 우리 아가씨께서 들으면 또 속상하실 거야.”
청가가 혀를 내둘렀다.
“알겠어, 화미 언니. 나는 그저 우리 아가씨가 안타까울 뿐이야. 분명 좋은 마음으로 그 부인의 아이를 살린 건데, 사람 목숨을 구한 게 공덕이 무량하다는 건 둘째치고, 어찌 그런 액운에 씔 수 있겠어? 그 부인의 남편도 참 고약하다.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부인의 배를 가르고 우리 아가씨를 모함하려고 하다니!”
화미가 냉소했다.
“언행이 올곧으면 겁날 게 없잖아. 둘째 공자님이 나섰는데, 그 무뢰한이 우리 아가씨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지. 지금 아가씨는 그저 몸이 불편할 뿐이고, 그 무뢰한이나 조심해야 해. 자기 아내의 원혼이 들러붙지 않게!”
“으악, 화미 언니, 그만해! 나 지금 온몸에 소름 돋았으니까. 밤에 잠도 못 자겠어.”
“됐어, 네가 허튼 생각이나 안 하면 돼. 얼른 문이나 지키러 가. 이따 넷째 아가씨가 나오실지도 모르니까. 나는 아가씨의 약을 달이러 갈게.”
“응, 가볼게.”
청가가 달려갔다.
정동은 창백한 얼굴로 꽃과 나무 사이에서 복도를 향해 지나가는 화미를 바라봤다.
“아가씨―”
옆에 있던 낙화가 정동을 살짝 건드리자, 타고난 겁쟁이인 정동은 몸을 벌벌 떨며 낙화를 쳐다봤다.
낙화가 철면피를 깔고 말했다.
“아가씨, 어서 가요. 아무래도 여긴 조금 추운 것 같아요.”
낙화의 말에 정동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고, 얼른 비서거를 떠났다.
정동은 연교거에 돌아오자마자 침상에 숨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했다.
“잠깐 잘 테니까, 중요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마.”
낙화가 몸을 숙이며 말했다.
“예, 아가씨.”
낙화가 물러난 후, 정동은 이불을 움켜쥐고 넋을 놓았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본 무서운 장면과 둘째 언니가 저지른 나쁜 일, 그리고 마당에서 들었던 무서운 말들이 자꾸 떠올라.’
정동은 이제 자신이 열이 나고 아플 차례라 생각했다.
‘퉤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구나. 아무렇게나 나가지 말걸.’
정동은 짜증이 난 듯 침대 기둥을 몇 번 내리치다가,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잠에 들었다.
* * *
복도에서 정동의 다른 몸종인 냉월(冷月)이 낙화에게 물었다.
“오늘 아가씨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 비서거에 갔다가 셋째 아가씨에게 또 화가 나신 거야?”
“화난 일은 없었는데―”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가씨가 저러다가 아프시기라도 하면 이낭께서 우리를 추궁하실걸.”
시종들은 한가로울 때마다 모여 잡담을 나누는 걸 좋아했다. 방금 그런 섬뜩한 이야기를 들은 낙화는 곧바로 냉월을 구석으로 끌고 가서 조용히 말했다.
“그 이야기 들었어?”
“뭐?”
냉월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이 참, 셋째 아가씨에게 원혼이 들러붙은 일 말이야. 지금 집안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까, 너도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네 어머니께서 큰주방에서 일하고 계시잖아.”
집안에서 퍼지는 이런저런 소식의 시작은 대체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큰주방이었다.
냉월은 약간 불쾌한 듯 낙화를 밀쳤다.
“뜸 들이지 말고 얼른 얘기해봐.”
낙화는 항상 냉월에게서 소문들을 들어왔기에,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지금 더 이상 미루지 않고 곧바로 털어놓았다. 낙화는 정미에게 붙은 원혼을 직접 보기라도 한 듯 생생하고 무섭게 묘사했다.
냉월은 낙화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때때로 고개를 끄덕였다. 낙화의 이야기가 아주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리고 냉월은 이 소문을 큰주방에서 일하는 친어머니에게 알렸다.
그렇게 정미에 대한 소문은 저녁이 되기도 전에 백부의 모든 하인에게 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