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45화 (145/375)

145화. 구사일생

교용에게 문 앞을 지키라 명령한 뒤, 정요는 다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둘째 나리의 얼굴에 짜증이 역력했다.

“어찌 또 왔느냐?”

정요는 한 걸음씩 다가서며, 둘째 나리와 반 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포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정요가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둘째 나리는 굳은 표정의 서녀를 보자 뭔가 깨달은 듯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

“요야, 이 혼사에 불만이 있는 것이냐?”

둘째 나리는 아주 기분이 나빴다.

‘내가 며칠 동안 바삐 알아보며 정한 혼사인데, 불만을 가진다고? 정말 생각이 짧군!’

정요가 대답을 하지 않자, 둘째 나리는 화를 꾹 참으며 말했다.

“요야, 너는 어려서부터 시서를 많이 읽었으니 잘 알 것이다. 사람을 보고 일을 볼 때는 멀리 봐야 하고, 당장 눈앞의 일에 마음을 빼앗겨선 안 된다. 네 정혼자가 그저 현승의 아들일 뿐이라도, 앞길이 창창하고 십몇 년이 지나면 네게 고명부인이라는 자리를 안겨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게다.

네게 다른 훈귀 가문들의 서자를 붙여주는 건 당장에야 듣기 좋을지 몰라도, 나중에 분가하게 되면 평민들보다도 못한 나날을 보낼 수도 있다!”

둘째 나리는 사실 이 정도로 인내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요에게 이렇게 자세히 설명한 이유는 그저 자신이 직접 정한 혼사가 아주 자랑스러웠고, 정요가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요는 확실히 침착해진 채로, 둘째 나리의 말을 얌전히 듣고 난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버지, 늘 저를 위하시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이 혼사가 불만스러운 게 아니라…….”

“아니라?”

“할 수 없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둘째 나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정요를 빤히 쳐다봤다.

정요는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했다.

“왜냐하면 저는 이미 위국공 세자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정요는 부모가 자신이 손쓸 새도 없이 이렇게 빨리 혼사를 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태자비가 출산을 한 후에 일어나길 바랐다.

만약 태자비가 난산으로 사망한 뒤, 정요가 태자와 정을 나눴다는 말을 하면, 백부에서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회임한 태자비가 있는 상황에서 그 말은 절대 꺼낼 수 없었다.

일단 한지를 방패 삼으면, 자신의 명성은 더럽혀질지라도 최소한 혼사는 미룰 수 있을 터였다.

정요는 백부에서 절대 자신을 한지와 혼인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지는 이미 정혼을 했으니, 백부가 나를 위국공부로 보내고 싶더라도 짧은 시간 안에는 이루어질 수 없어. 큰일을 위해 수개월 동안 치욕을 참고, 8월이 되어 태자비가 출산을 할 때가 되면―’

정요는 미처 소중히 보관할 틈도 없었던 금계랍을 몰래 꽉 쥐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아버지께서 내가 한지와 정을 나눴다는 걸 아시더라도, 모두가 알게끔 퍼트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으실 거야. 기껏해야 집안 어른들이 알게 되는 정도겠지. 이것만 있으면, 조모님과 다른 사람들이 잠시 내게 냉대하더라도 나중엔 다시 태도를 바꾸게 될 거야.

어머니? 하하, 내가 이 보물로 그 귀인의 목숨을 구한다면, 어머니가 뭘 더 어쩔 수 있겠어?’

“뭐라는 게냐?”

둘째 나리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갑자기 북,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고, 두 사람은 멍해졌다.

‘이 소리는 마치……, 마치…….’

이어 악취도 풍겨오자, 정요는 그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둘째 나리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아버지―”

둘째 나리는 화가 나서 눈을 부라렸고, 나가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갑자기 아래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요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으스스 떨었다.

‘아버지께서 어찌 나를 죽여서 입을 막으려는 듯한 눈빛을 하시는 거지?’

정요는 아버지의 괴상한 표정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하여 또 불안해하며 외쳤다.

“아버지―”

둘째 나리는 정요를 노려보며 밧줄을 꺼내 자신을 망신시킨 딸의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였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정요는 알고 있었다. 유린당할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눈앞의 사람을 믿는 방법밖엔 없었다. 둘째 나리가 아무리 사나운 눈빛을 하고 있더라도, 정요는 눈 딱 감고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정요는 딸과 다른 사내가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로서, 화내는 것은 정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둘째 나리가 냉정함을 되찾은 후, 설득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둘째 나리가 오줌을 지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둘째 나리는 티끌만큼의 이성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정요가 이렇게 살짝 다가오자, 그의 마지막 지푸라기마저 짓밟는 느낌이었다.

둘째 나리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눈앞의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죽여서라도 입을 막아야겠어!’

둘째 나리는 이미 손을 뻗어 정요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가늘고 아름다운 목덜미가 큰 손에 붙잡히자 금세 숨이 막혀왔다.

정요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갈수록 정요의 목소리는 더욱 갈라졌다.

정요의 두 눈이 뒤집혔고, 고통이 밀려왔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아……, 버지, 그, 그러지 마세요―”

정요는 두 손으로 둘째 나리의 손을 힘껏 붙잡았고 두 다리를 닥치는 대로 버둥거렸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 쥐어 짜낸 목소리는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둘째 나리는 이미 이성을 잃었고, 정요를 죽이고 말 것이라는 듯 사정없이 목을 졸랐다.

정요도 이를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온몸의 힘이 서서히 풀려갔다.

‘여, 여기서 죽는 건가?’

정요는 몽롱한 상태로 생각했다.

‘안 돼, 절대로 여기서 이렇게 억울하게 죽지 않을 거야! 그래, 교용, 교용이 있지!’

가까스로 생긴 희망에, 정요는 힘을 쥐어 짜내 근처의 의자에 발길질을 했다.

의자가 넘어지며 큰 소리가 났고, 방문이 열렸다.

“아가씨―”

갑자기 들어온 사람과 의자가 넘어지며 낸 큰 소리 덕분에, 둘째 나리는 이성을 되찾고 손을 놓았다.

신선한 공기가 정요의 목으로 들어왔고, 정요는 심하게 기침했다.

‘살았구나!’

기절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정요는 가까스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나리―”

교용은 방 안의 상황을 보고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급하게 밀쳐진 문은 아직도 흔들리며 삐걱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둘째 나리는 차츰 이성을 되찾았고, 기절한 정요를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자칫하면 친딸을 죽일 뻔했구나! 아니, 아니지. 이 못된 딸이 염치없이 추잡한 일을 저질렀기에, 고통스러운 마음을 참고 집안을 위한 일을 한 것이다!’

둘째 나리는 자신을 합리화할 이유를 찾고는 교용을 바라봤다.

“네 아가씨가 방금 한 말, 문밖에서 들었느냐?”

“소인은―”

교용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교용은 당연히 문밖에서 귀를 붙이고 몰래 엿들었던 바였다. 둘째 아가씨가 위국공 세자와 정을 나눴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혼란스러운 나머지 뒷말은 듣지 못했고, 정신을 차리고 다시 엿들었을 땐 아가씨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엿들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말해!”

둘째 나리가 눈을 부라렸다.

방금 둘째 나리가 정요의 목을 조르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가 이렇게 눈을 부라리자 교용은 살기를 느꼈고, 더는 망설이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들었어요.”

뜻밖에도 이 말에 둘째 나리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아가씨는 염치도 모르고 황당한 일을 저질렀다. 몸종인 네게도 책임이 있지!”

교용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둘째 나리의 말투가 변했다.

“하지만 결국엔 내 딸이니, 내가 어찌 손을 대겠느냐. 됐다. 아가씨를 데리고 돌아가, 깨어나면 내가 내일 찾아갈 것이라 전하거라. 의원은 부르지 말고. 알겠느냐?”

교용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공포심에 생겨난 힘인지, 그녀는 두세 번 만에 정요를 일으켜 부축하고 재빨리 서재에서 도망 나왔다.

둘째 나리는 방문을 잘 닫고 나서야, 어두운 표정으로 바지를 갈아입고는 서재를 나와 목욕하러 갔다.

* * *

사방에 아무도 없어지자, 정동이 벌벌 떨며 구석에서 걸어 나왔다. 두 손은 찬합을 꼭 들고 있었고, 얼굴엔 눈물 자국이 가득했으며, 너무 세게 깨물었던 입술은 찢어져 있었다.

정동은 서재의 문을 한 번 쳐다보고는 쏜살같이 달아났고, 연교거로 돌아온 뒤엔 침상으로 기어 올라가 이불 속에 숨어버렸다.

잠시 후, 동 이낭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동아, 안에 있니?”

한참 뒤, 정동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

“그럼 들어가마.”

동 이낭이 문을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

“어찌 이리 빨리 돌아온 거니? 네 아버지가 간식을 다 드실 때까지 모시지 않았어?”

정동이 서재에 간 이유는 동 이낭이 부추긴 것이었다.

정요가 동 이낭의 호사를 망쳐놨을 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물론이었고, 혹시나 정요가 나리의 환심을 살까 싶어 정동에게 새로 만든 토란떡을 가져 가라고 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결코 다른 사람들처럼, 그 온화하고 무해한 서녀를 얕보지 않았다. 한 씨가 어리석은 탓에 그 서녀가 제 딸 머리 위로 올라간 것일 뿐, 나리가 가장 아끼는 딸은 자신의 딸이어야 했다.

동 이낭은 탁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찬합을 흘끗 보고는 손을 뻗어 열어보았고, 안에 여전히 토란떡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동아, 아버지께 드리지 않은 거니?”

“저는―”

정동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동 이낭이 침상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동아, 왜 이리 안색이 안 좋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어머니, 제가―”

정동은 순간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동 이낭은 딸이 잘 우는 성정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묻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정동이 충분히 운 것 같자, 그제야 물었다.

“됐다, 동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어미에게 말해보렴. 어미가 방법을 찾아줄 테니.”

정동은 눈물이 그렁그렁해 흐려진 시야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머니, 이번엔 억울한 일을 당한 게 아니라 깜짝 놀라서 그래요. 저를 놀라게 한 사람이 아버지인데도 어머니께서 저를 도울 수 있을까요?’

정동은 결국 서재에서 본 일을 말하지 못했고,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기, 길에서 둘째 오라버니가 정미를 보러 가고 있길래, 오라버니와 몇 마디 나누려고 했어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저를 상대하지 않아서…….”

“그것 때문이니?”

동 이낭은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파, 정동의 이마를 슬쩍 건드렸다.

“어리석은 것아, 몇 번이나 말했어. 네 둘째 오라버니는 마음이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었으니, 더는 바보짓을 하지 말라고! 시간이 있으면 네 셋째 남동생과 노는 게 낫지!”

정동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동 이낭이 떠난 뒤, 정동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정미를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