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정요의 곤경
“예? 어머니께서 제게 혼사를 정해주셨다고요?”
한 씨는 매괴의(*玫瑰椅: 의자의 한 종류로, 주로 대갓집 여인이 씀)에 앉아 태연자약하게 차를 마시며 정요를 흘끗 쳐다봤다. 그러자 갑자기 마시던 차가 더욱 향기롭게 느껴져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 혼사는 나도 크게 나서지 않았단다. 네 아버지께서 고르고 또 골라 정한 혼사지. 나리께서 그간 일찍 나가서 늦게 돌아오신 것도 네 혼사를 위한 것이었단다.”
한 씨는 점점 창백해지는 정요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
“요야, 네게 이 일이 갑작스럽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너도 올해 열여섯이야. 더는 혼사를 미룰 수 없어. 그러니 네 아버지께서 최근 몸이 편치 않으신데도 너를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신 거란다. 이 혼사는 가장 좋은 것이니, 늘 효심 가득하던 네가 따뜻한 국을 끓여 아버지께 찾아가 보는 게 좋겠구나.”
정요가 대답을 하지 않자, 한 씨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요야?”
정요는 그제야 이성을 되찾고 입술을 떨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한 씨가 손을 휘저었다.
“그럼 가보거라. 나는 네 셋째 여동생을 보러 가야겠다. 열이 나더구나.”
“그럼 물러나 보겠습니다.”
정요는 이연원 문을 나오자마자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고, 교용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아가씨?”
“비켜!”
마음이 혼란스러운 정요는 교용을 확 밀치고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가씨―”
교용이 급히 쫓아갔다.
정요는 둘째 나리의 서재로 향했다.
“아버지, 계신가요?”
정요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당황했는지, 한참 부스럭거리던 서재 안에서 동 이낭이 나왔다.
동 이낭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둘째 아가씨가 왔군요.”
정요는 잠시 멍해졌고, 왜 동 이낭이 여기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리고 동 이낭은 아주 짜증이 났다.
‘요 며칠 나리께서 내 방에 찾아오지 않으시기에, 사람을 보내 유심히 관찰한 결과 매일 집에 돌아오면 한 씨를 찾아간다는 것을 알게 됐지. 오래 머물진 않았지만, 이는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야. 오늘 나리께서 모처럼 일찍 돌아오셨기에 보양식을 끓여 와 기회를 틈타 나리를 모시고 마음을 잡으려고 했는데, 이 대낮에 둘째 아가씨가 어찌 찾아온 거지?’
그러나 평소 고아한 정요는 지금 동 이낭의 기분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기에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동 이낭, 아버지께 볼일이 좀 있습니다.”
동 이낭은 불쾌한 기분을 꾹 참고 웃었다.
“얼른 들어오세요.”
동 이낭은 들어가서 창가에 놓인 찬합을 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리, 둘째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으니, 소첩은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나리는 최근 계속 정요의 혼사 때문에 바빴고, 오늘에서야 일이 마무리되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침 며칠간 혼자 서재에서 지내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는데, 뜻밖에도 예쁜 동 이낭이 찾아온 것이었다.
아쉽게도 입가의 연지를 몇 입 맛봤을 때, 누군가 방해를 했을 뿐이다.
둘째 나리는 자만한 지식인이었기에 체면이 중요했다. 그는 대낮부터 동 이낭이 찾아온 것을 딸에게 들킨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좋지 않았기에,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가보시오.”
둘째 나리는 정요를 바라보며 물었다.
“요야, 무슨 일이냐?”
동 이낭이 나가고서야, 정요가 대답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이미 제 혼사를 정하셨다고요?”
둘째 나리는 뿌듯한 듯 대답했다.
“그래.”
“아버지, 저는 시집가고 싶지 않습니다!”
정요가 갑자기 무릎을 꿇자, 둘째 나리가 깜짝 놀라 물었다.
“요야, 그게 무슨 뜻이냐?”
정요는 이미 마음이 아주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줄곧 자신이 모든 일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혼사는 자신이 아무리 대비한다고 해도 저도 모르는 사이 조용히 결정되는 일이란 것을.
‘내가 어찌 고작 현승(*縣丞: 현령(縣令)을 도와 현의 정무를 처리하는 차관)의 아들 따위에게 시집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 위국공 세자에게조차 몸을 맡기고 싶지 않은데!’
정요는 당황한 나머지 둘째 나리의 책문에 그저 급히 핑계를 댔다.
“아버지, 저 정요는, 정요는 한 번도 수도를 떠날 생각을 한 적 없어요. 가본 적 없는 곳에 갈 생각만 하면 마음이 너무 어지러워요.”
둘째 나리가 웃었다.
“참 어린애 같은 소리구나! 늘 딸아이 중에 네가 가장 듬직한 아이라 여겼거늘, 너도 결국엔 어린 계집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요야, 걱정 말거라. 능광현은 수도와 그리 멀지 않다. 게다가 네 미래의 부군은 이미 거인의 신분이고, 내가 며칠간 알아보니 이번 춘시도 합격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구나. 나중에 관직에 오르면 너도 관부인(官夫人)이 되는 것이다. 이런 복은 모든 서녀에게 오는 것이 아니야.”
마지막 한마디에, 정요는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내가 빛나더라도, 아버지의 눈엔 그저 비천한 서녀일 뿐이구나. 거인이 된 현승의 아들에게 시집가는 것 따위로 지극히 감사해야 한다니!’
둘째 나리는 그저 정요가 여자아이처럼 수줍어할 뿐이라고 여겼기에, 계속해서 당부했다.
“요야, 최근 이틀 동안 계속 제생당을 드나든다고 들었다. 이제 혼사도 정해졌으니, 오늘부터는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서 혼수를 수놓는 것이 옳다. 정미를 따라 놀아대선 안 된다. 됐다, 아버지도 좀 피곤하니, 이만 가보거라.”
“예, 물러나 보겠습니다.”
정요는 넋이 나간 채 방에서 나왔고,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몸을 떨며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다.
‘그래, 아직 조모님이 있어. 그동안 정성을 다해 조모님을 모셨으니, 조모님이 나를 위해 몇 마디 해주실지도 몰라!’
정요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치맛자락을 들고 염송당으로 달려갔다.
교용은 뒤따라 달리느라 숨을 헐떡였다.
* * *
“요야, 어찌 지금 시간에 찾아왔느냐?”
정요는 평소 저녁 시간에 맹 노부인을 찾아와 염송당에서 밤을 지내다가, 다음날 쇄옥거로 돌아가곤 했다.
“조모님,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이미 제 혼사를 정하셨다고 하시는데 알고 계셨나요?”
맹 노부인이 웃었다.
“그 일 때문이었느냐. 왜 이리 놀라나 했더니. 할미도 오늘 알았단다.”
“조모님, 저는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저 정요는 계속 조모님을 모시며 곁에 있고 싶어요!”
맹 노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여자아이가 어찌 시집을 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이야.”
정요는 입술을 깨물고 낙담했지만,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조모님, 너무 급하게 혼사를 정한 것 아닐까요? 제 혼사는 어머니가 주관하는 일이지만, 하지만……, 하지만 조모님도 오늘에서야 알게 되셨는걸요…….”
마지막 말은 누가 들어도 이간질을 부추기는 투였다.
맹 노부인과 한 씨의 사이였다면, 이 말을 들었을 때 분명 화가 날 터였다.
하지만 정요가 오늘 그 ‘만병통치약’을 순조롭게 얻은 것에 하늘이 질투했는지, 맹 노부인이 말했다.
“조금 급한 면이 있기는 하지. 하지만 네 아버지가 고른 것이니 분명 좋은 혼사일 게다. 요야, 걱정 말고 시집가는 날을 기다리면 된다. 네 아버지 말을 들으니 네 정혼자도 올해 겨우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번 춘시를 합격할 가능성이 크다는구나. 이런 훌륭한 청년은 아주 드물단다.”
정요는 마음속 마지막 희망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침착하게 염송당에서 나왔고, 벽에 기대어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그리 오랜 시간 동안 살아왔으면서, 다른 사람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이렇게 다른 줄도 모르다니! 안 돼,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어!’
“아가씨, 어딜 가시려고요?”
정요는 교용의 물음에 멈춰서서 스스로 생각했다.
‘그래, 어디로 가야 하지?’
한 씨가 말하길, 양측에서 이미 사주단자까지 주고 받아 혼사가 확실히 정해졌다고 했으니, 정요가 어딜 갈 수 있겠는가?
“아가씨―”
교용은 정요가 이리 망연자실한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자신도 따라서 허둥지둥하며 울먹였다.
그녀의 괴로움도 정요 못지않았다.
교용은 정요를 따른 뒤로, 정요의 총명함과 냉정함, 교활하고 무서움 등을 두 눈으로 직접 봐왔다. 그러나 정요를 잘 모시기만 하면 아가씨께서 높은 집안에 시집갔을 때, 자신도 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둘째 아가씨는 위국공 세자도 마음에 차지 않아 했는 걸, 미래의 부군이 어떤 사람이겠어? 그리고 나는 둘째 아가씨가 시집갈 때 따라갈 거니까, 당연히 그런 자들의 통방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현승의 아들이 무슨 말이람?’
교용은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특히 어제의 그 장면은 아직도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었고, 이 일까지 더해지니 기절하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하지만 충격에 쓰러지는 주인은 있을지라도 그런 여종이 있을 리 없었다.
‘내가 기절한다면, 둘째 아가씨는 내가 무능하다 생각해 나를 버릴지도 몰라. 그리고 나는 둘째 아가씨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으니, 버려지면 이후가 어떻게 될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아가씨, 진정하세요. 어딜 가시든 소인이 함께 할게요―”
정요는 교용의 충심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바로 걸음을 뗐다.
교용은 정요를 따라나섰고, 곧 정요가 비서거로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 셋째 아가씨를 찾으러 간다고?’
교용은 몹시 곤혹스러워 몰래 정요의 안색을 살폈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정요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빠르게 걸었고, 아주 예민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황해선 안 돼, 아직 비장의 패가 있어! 만약 정미에게 내가 둘째 오라버니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정요가 씩 웃었다.
‘정미의 성정이라면, 분명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으려 하겠지! 그럼 그때 정미에게 이 혼사를 막을 방법을 찾으라고 하면 돼. 정미는 멍청하지만 좋은 오라버니가 있으니, 정미의 부탁이라면 결코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정철이라면 이 난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야!’
여기까지 생각하니, 정요의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한땐 나도 둘째 오라버니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지. 오라버니와 나는 동병상련인 처지인데, 왜 정철은 늘 정미만 신경 쓰는 걸까?’
하지만 정요는 점점 깨닫게 되었다. 정철과 가까워지려 노력하느니, 차라리 정미와 가까워지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이다.
‘최소한 정미와 사이가 좋으면 이 둘째 오라버니도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니까.’
“아가씨, 도착했어요. 들어가지 않으세요?”
한참을 비서거 문 앞에 서 있는 정요를 보던 교용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정요가 갑자기 뒤돌아섰다.
“들어가지 않을래. 아버지의 서재로 가자꾸나!”
정요는 생각을 바꿨다.
‘아직 가장 급한 때가 아니니, 이 비장의 무기는 일단 아껴둬야겠어. 정미는 지금 예측할 수 없는 능력이 있고, 나도 아직 그게 뭔지 정확히 알지 못해. 그리고 상대하기 어려운 정철까지 있으니, 그를 건드렸다가는 되레 나를 죽여서 입을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요는 이 비밀을 적절한 때에 이용해 정미에게 일격을 가하고 싶었다. 위협할 용도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을 위협하는 것은 마치 흉수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우쭐해 보이다가도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해를 입을 수 있었다. 정요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일은 최소한 지금은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연이은 충격을 겪은 후 정요는 냉정함을 되찾았고, 다시금 둘째 나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