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강매
‘내가 어떻게 꿈에서 본 거라고 말할 수 있겠어! 늘 이렇구나. 정요가 한 짓임을 알면서도 증거가 없다니!’
정미는 아주 분했고, 심지어 어떤 생각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그 화근을 감쪽같이 없앨 수 있는 부수는 없을까?’
이 생각이 들자, 아혜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정미, 왜 그래? 새로운 부적을 배우고 싶은 거야?」
이때, 따뜻하고 건조한 큰 손이 정미의 손등을 덮었다.
“미미, 뭔가 알고 있는 거지?”
정미는 정신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 정요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아주 많은 일들을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할 줄 알곤 했잖아. 아마도, 아마도 부인의 배를 가르는 일까지도 스승 없이 깨우친 거 아닐까?”
정미는 이 말이 인정을 받기 어려운 걸 알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얘기하지 않으려 했을 터였다. 하지만 정철에게는 역시 참지 못하고 말하게 되었다.
“전에 내가 우리 의관에서 살렸던 부인이 갑자기 피를 흘렸고, 태아를 지키지 못할 뻔 했잖아. 그때도 정요 때문이었고, 그리고 지금도 정요가 현장에 있었으니, 아무래도 이 일은 정요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정철은 어떤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한 얼굴이다가, 정미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오라버니가 앞으로 정요의 움직임을 지켜볼게. 게다가 정요의 혼사도 곧 정해질 테니, 꿍꿍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계속 소란을 일으키진 못 할 거야. 미미도 정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멀리하도록 해.”
“응.”
정철이 떠난 뒤, 정미는 고양이를 안고 침상에 올라갔다. 머릿속으로는 아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됐어, 아혜. 네가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지금 배우고 있는 부적도 다 배우지 못했는데, 새로운 걸 배울 생각은 없어! 나 오늘 너무 피곤해, 자야겠어. 그만 시끄럽게 굴어.’
아혜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정말 공부 욕심이 없구나!」
아혜가 조용해진 뒤, 정미는 눈을 뜨고 고양이를 안은 채 생각에 잠겼다.
‘아혜가……, 어떨 땐 내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 건가?’
정미는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마음속에 점점 한기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매번 사람을 해치려는 나쁜 생각을 할 때마다 아혜가 이를 느끼고 나타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미는 갑자기 피곤함을 느꼈다.
정미는 자신이 줄곧 아혜를 경계하는 일이 맞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아혜는 자신에게 가르쳐 준 것이 많으니 사부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경계심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정미는 고양이를 안고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고, 다음 날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 * *
열이 난 직후, 정미는 제생당에도 가지 못했고, 덕소 장공주에게는 사람을 보내 휴가를 내었다.
정미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제생당에 여자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깔끔한 차림이었고, 유모를 쓰고 있었다. 두 여종이 그녀를 모시며 따라다녔다.
셋째 나리는 감히 홀대하지 않고 맞이했다.
그 손님이 물었다.
“실례지만, 정가네 셋째 아가씨가 여기 계시나요?”
여자 손님은 셋째 나리와 가까운 곳에 앉아있는 소녀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저분이 셋째 아가씨입니까?”
“아, 오늘 셋째는 오지 않았습니다. 부인께선 무슨 일이신지요?”
“오지 않았다고요?”
그 손님은 실망하며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저는 태부사(太僕寺) 황(黃) 소경(少卿)의 딸입니다. 셋째 아가씨께 진료를 보고 싶어 왔는데, 계시지 않는다니 어쩔 수 없군요. 언제 의관에 오시는지요?”
셋째 나리가 대답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 며칠 뒤에나 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부인.”
그 여자 손님이 떠난 후, 정요가 의서를 내려놓고 말했다.
“셋째 숙부님, 뭐 좀 사러 나가고 싶어요.”
셋째 나리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사동을 하나 붙여줄까?”
“괜찮아요, 오늘 교용을 데리고 왔어요.”
“그럼 조심하며 다니고, 일찍 돌아오거라.”
정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물건만 사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게요.”
의관 밖으로 나온 뒤, 정요가 고개를 돌려 교용에게 물었다.
“알아봤니?”
정요는 유모를 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교용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피하며 움츠러들곤 대답했다.
“알아봤습니다. 북쪽의 그 거리에 있고, 기진방이라 하는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가게라 합니다. 독특한 물건들을 판다고 하더군요.”
“응, 잘했어.”
정요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북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교용을 흘겨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교용, 설마 나를 무서워하는 거야?”
“아닙니다!”
교용은 부인했고, 자신의 감정이 격앙된 것을 느끼고는 급히 몰래 손바닥을 꼬집으며 억지로 차분한 척했다.
“소인이 어찌 아가씨를 무서워하겠습니까―”
정요가 가볍게 웃었다.
“안 무서우면 됐어. 무서워도 상관없고. 넌 어쨌든 내 여종이니까.”
“예, 예. 소인은 영원히 아가씨의 여종이지요.”
교용은 연거푸 대답하면서도 마음속엔 오한이 났다.
그녀는 사실 후회가 되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총명한 둘째 아가씨가 아니라, 여전히 그 우둔한 셋째 아가씨 곁에 있고 싶을 지경이었다.
교용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을 빤히 쳐다봤다. 손톱 사이에서 흙냄새가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엔 둘째 아가씨가 비수를 들고, 냉정하게 부인의 배를 가르는 모습이 끊임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놀라서 벌벌 떨고 있었지만, 둘째 아가씨는 조금도 떨지 않았어! 둘째 아가씨께선 어찌 이리 간이 크신 걸까, 그건 시체였다고!’
그때, 정요의 고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용, 사람은 죽어 시체가 되면 그저 가죽일 뿐이야. 닭이나 오리, 토끼와 무슨 차이가 있겠어? 내가 경고하건대, 정신 놓고 있다가 내가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주의해!”
교용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숙연해졌다.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럼 됐어.”
정요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가게의 간판에 쓰여있는 ‘기진방’ 세 글자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도착했구나.”
정요가 기진방에 들어가자, 머슴이 맞이했다.
“아가씨께서 뭘 찾으시는 걸까요?”
“우선 둘러보지요.”
정요는 가게에 진열된 물건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역시 바다를 건너온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저절로 웃음을 짓던 정요는 계산대로 걸어가 지배인에게 물었다.
“가게 주인도 여기 있습니까?”
지배인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가게를 연 이래, 물건이 독특한 탓인지 주인을 묻는 손님은 많았기에 곧바로 대답했다.
“오늘 잘 찾아오셨습니다. 마침 주인어른께서 계시거든요.”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요.”
“그건―”
지배인은 조금 망설였다.
‘주인어른께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보고하라곤 하셨지만, 그건 수도에서 높으신 분들과 교제하기 위함이었지, 이런 아가씨는―’
그러자 정요가 계산대 위에 손을 내려놓았다. 손을 치우자, 은 한 덩이가 드러났다.
정요는 손을 그대로 거뒀으나, 은덩이는 여전히 계산대 위에서 반짝였다.
지배인은 급히 은을 소매 속으로 집어넣고 공수하며 말했다.
“위층으로 모시겠습니다.”
정요가 살짝 몸을 숙이며 인사했다.
정요는 교용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고, 아실(*雅室: 고급스러운 방)로 들어가 잠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사내는 서른 안팎으로 보였고, 차분한 눈빛엔 연륜이 묻어나왔다.
인사를 나눈 뒤, 사내가 물었다.
“아가씨께서 무슨 일로 소생을 만나고자 하셨을까요?”
정요가 이 위(魏)씨 성을 가진 사내에게 말했다.
“위 주인, 제가 보니 이 기진방에서 파는 물건들은 모두 해외에서 들여온 진기한 물건들이더군요. 방금 당신의 말과 행동도 범상치 않았습니다. 바다에 나가신 적이 있는 분이지요?”
사내는 잠시 멍해졌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안목이 예리하시군요. 소생은 동만(東灣)의 동쪽에 있는 작은 나라에서 수년간 머물다 최근에야 고향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게를 열었군요.”
정요가 웃으며 소매를 털고 상에서 손을 떼자, 상 위에 은표(銀票) 한 겹이 나타났다.
사내는 안색을 굳히며 정요를 빤히 쳐다봤지만, 유모에 얼굴이 가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자 신중하게 물었다.
“무슨 뜻이십니까?”
정요가 웃었다.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 당신을 찾아온 것은, 사고 싶은 물건이 하나 있어서입니다.”
“어떤 것이 마음에 드셨는지요. 소생이 싸게 넘겨드릴 수 있습니다.”
“할인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위 주인께서 넘겨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정요가 손가락으로 은표를 살짝 매만지며 말했다.
“해외에 ‘금계랍(金鷄蠟)’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위 주인을 찾아 사고 싶은 물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내는 깜짝 놀랐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억지로 웃었다.
“농담을 하시는군요. 소생은 그런 물건을 들어본 적 없습니다. 여행기에서 지어낸 것이겠지요.”
정요는 차분한 말투로 은표를 밀어내며 말했다.
“위 주인께서 우선 은표의 가격을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접힌 은표는 일고여덟 장은 되어 보였고, 한 장마다 천 냥이나 되었다.
사내는 정요를 더욱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칠팔천 냥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해외에서의 금계랍 하나의 가격보다 몇십 배는 되는 금액이었기에, 판매한다면 결코 손해를 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신약(神藥)은 당연히 자신의 손에만 있어야 했다.
정요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마음을 굳게 먹고 한마디 했다.
“한 통만 사겠습니다.”
평범한 한 마디였지만, 사내는 실수로 찻잔을 건드려 엎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는 찻물이 옷을 적시는 것도 생각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아가씨께선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정요는 대답을 피하며 웃었다.
“최근 해금(海禁)이 조금 풀렸으니, 해외에 가본 사람도 아주 많겠지요. 금계랍을 아는 사람도 위 주인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위 주인이 하나만 가지고 계신 게 아닌 걸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은표들로 한 통만 사면 됩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절대 누설하지 않을 것이고요. 어떻습니까?”
사내가 망설이자, 정요가 덧붙였다.
“위 주인께서도 ‘구슬을 품은 것이 그 죄’라는 도리를 아시지요?”
사내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께서 이리 찾아오셨는데, 소생도 당연히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지요.”
정요가 가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저 아가씨께서 오늘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고, 다른 이들에게 누설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당연하지요.”
정요는 그제야 원하는 바를 이루고 기진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는 것을 눈치챘고, 가게 몇 군데를 더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운상의에 들어가 교용과 옷을 바꿔 입어 미행하는 사람을 따돌린 후 백부로 돌아갔다.
그러나 뜻이 이루어져 득의만만하게 돌아온 정요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