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정철이 나서다
맹 노부인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고, 숱이 별로 없는 눈썹을 높게 치켜세우며 정미를 꾸짖었다.
“이 못난 계집아, 네가 그리도 멍청한 게냐? 그런 게야?”
정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맹 노부인은 더욱 분노했다.
“네가 한 짓이 아니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대낮에 그 부인에게서 아기를 꺼낸 일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봤는데, 지금 와서 너와 관련 없는 일이라 하면 누가 믿겠느냐? 정말 재수 없는 것 같으니라고, 답청을 나가서까지 백부에게 이런 액운을 가져오다니!”
정철은 더는 듣고만 있을 수 없어 화를 꾹 참고 말했다.
“조모님,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손자가 나가서 보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손자가 꼭 이 일을 잘 처리하여 백부에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철의 일 처리 능력은 맹 노부인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노백야는 종일 집에 있지 않고 자신의 향락만 추구했으며, 큰아들은 회인백이기에 고작 백성 하나 때문에 나설 수 없었다. 둘째는 늘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왔기에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고, 지금 이 일을 처리하기에 가장 적당한 사람은 역시 이 손자밖에 없었다.
맹 노부인의 말투가 조금 따뜻해졌다.
“그럼 네가 가보거라. 사람을 많이 데리고 가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은 두려울 게 없으니, 그 천한 것이 너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걱정 마세요, 조모님. 손자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정철은 말을 마치고 정미를 흘끔 보며 위로하는 눈빛을 건네고는 밖으로 나갔다.
“오라버니―”
정미는 참지 못하고 쫓아갔고, 복도에 나가서 정철을 붙잡고 도자기 병을 하나 건네며 빠르게 말했다.
“오라버니, 이 안엔 지혈생기부의 부수가 들어있어. 만약 그 부인의 복부에 정말 상처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방심한 사이 상처 위에 뿌려버려. 그럼 상처가 곧바로 아물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거야.”
정미는 밖으로 놀러 나가거나 사냥을 나갈 때면 지혈생기부를 꼭 준비해 나가는 습관을 들여왔기에 오늘도 예외 없이 챙겼지만, 죽은 사람에게 쓸 일이 생길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정철은 그 병을 건네받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 차가워진 정미의 뺨을 주무르고는 가볍게 웃었다.
“바보야, 뭐든 네가 이 신기한 것들로 해결할 필요 없어. 어떤 일들은 네 생각만큼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그냥 이 오라버니를 믿어줄래?”
아직 날이 완전히 저물지 않았기에, 옅은 저녁의 볕은 마치 얇은 천처럼 정철의 온화한 얼굴을 희미하게 비췄다.
정미는 그를 마주 보다가 결국 입꼬리를 올리며 작게 말했다.
“당연히 오라버니를 믿지.”
정철이 웃으며 뒤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옷자락이 붙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봤다.
“미미?”
소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저녁 바람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또 오라버니를 성가시게 했어.”
정철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미의 일은 한 번도 성가신 적 없어. 괜찮으니까, 오라버니가 돌아오는 것만 기다리면 돼.”
정철은 마침내 점점 멀어져갔다.
정미는 복도의 기둥 옆에 서 있다가, 맹 노부인의 몸종 아복이 부르자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 * *
정철이 문밖으로 나가 한 번 훑어보니, 겹겹이 쌓인 사람들이 백부의 입구를 가득 둘러싸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깔끔하지 못한 수염을 가진 사내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은은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사내의 붉어진 눈을 보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가 그의 반토막 난 새끼손가락에 시선이 꽂히자, 정철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신이 책임자입니까?”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정철의 기개에 그 사내가 물었다.
정철은 그 사내보다 훨씬 키가 컸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입을 열자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당신이 우리 백부에 와서 소란을 피운 겐가?”
사내는 도박을 목숨보다 좋아했고, 오늘 또 노름빚이 생겼으나 갚을 은전이 없었다. 지금 어렵사리 좋은 기회를 얻은 것이었기에, 눈앞의 사람이 아무리 기개가 있어도 신경 쓰지 않고 즉시 목청을 높였다.
“마을 사람들, 이것 좀 보십시오. 백부에서 권력을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군요. 내 아내의 시신을 모욕했는데, 이런 어린 애송이를 내보내다니, 게다가 나더러 소란을 피운다고까지 한다고요! 다들 생각해보십시오. 나 같은 평민이 얼마나 참지 못했으면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평민은 귀족들과 싸워서 이기기 어려우니, 급한 일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소란을 일으키겠어.”
둘러싼 사람들이 수군거리자, 정철이 갑자기 고함쳤다.
“다들 그 입 다무십시오!”
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웃들의 생각대로 처리하길 원한다면, 오늘 이 이웃들의 앞에서 확실히 처리해보도록 하지!”
정철이 읍을 하며 말했다.
“저는 회인백부의 둘째 공자입니다. 어르신들의 명을 받들어 이 일을 처리하러 왔습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서 제 여동생의 결백을 밝힐 테니, 증인이 되어주십시오.”
정철의 맑고 힘 있는 목소리와 침착한 표정, 그리고 틀림없는 자신감으로 인해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고, 그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주목했다.
정철은 사내를 쳐다보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정확히 들을 수 있게끔 따뜻하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죄를 논하려면 반드시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지. 내 여동생이 당신 아내의 시신을 모욕했다고 함부로 지껄인 건 일단 따지지 않겠소. 오늘 내 여동생이 나들이를 갔을 때, 나도 옆에서 함께했소. 그때 당신은 자리에 있지도 않았지! 묻겠소. 그때 당신 아내의 시신을 들고 산에 오른 소년과 네 명의 이웃들은 어디로 갔소?”
사내는 잠시 멍해졌다가 고함을 질렀다.
“그자들과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저녁에 산에 올랐을 때, 아내의 시신이 훼손된 걸 발견했는데!”
정철이 차갑게 웃으며 반박했다.
“대형(大兄), 이런 일은 증거가 중요하지. 당신이 관아로 간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요. 목소리가 크다고, 트집을 잡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오!”
그러고는 정철이 다시 모두에게 공수했다.
“모두들 들으셨지요. 당시 이자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제 여동생이 저자의 아내에게서 아기를 꺼낼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증거가 되겠지요. 만약 당시 시신은 멀쩡했고, 이후 들개들에게 파먹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까?”
“허튼소리, 이게 어찌 들개들이 파먹은 것이란 말입니까. 내 아내의 배에 있는 상처는 누가 봐도 칼로 벤 자국인데! 이웃들에게 보여 줄 수 없는 상처지만, 관아의 검사는 두렵지 않습니다!”
정철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웃으니, 다른 사람과 맞서는 게 아닌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 같아, 사람들은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대형, 당신은 그 도상(刀傷)이 내 여동생이 태아를 꺼낼 때 한 것이라 말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지. 그 상처는 당신이 우리 백부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려고 일부러 만든 것이라고!”
“다, 다, 당신! 날조하지 마시오!”
정철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모두를 바라봤다.
“여러분, 여러분들 중 오늘 산에 오른 분들도 계시겠지요?”
불구경은 인간의 천성이었고, 대낮의 그 기이한 일을 직접 겪은 백성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말에 세 사람이 머뭇거리며 일어섰고 그중 그나마 용감한 자가 말했다.
“있습니다.”
정철이 웃었다.
“한 사람 더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이 대답했다.
“나머지 하나는 산자를 부르러 갔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산자가 오면 다시 이야기하지요.”
정철이 고개를 돌려 팔근에게 분부했다.
“가서 긴 의자를 옮기라 하거라. 간식과 차도 가져오고.”
잠시 후, 긴 의자가 하나씩 옮겨져 나와 문 앞에 놓였다.
정철이 입을 열었다.
“기다리느라 지치실 테니, 앉아서 차라도 드십시오.”
앉아서 구경할 수 있고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있으니, 누가 마다하겠는가. 긴 의자마다 사람이 가득 앉게 되었고, 동작이 느려 앉지 못한 사람은 화가 나 발을 굴리다가 뒤질세라 간식과 과일을 가지러 갔다.
사내가 분노했다.
“민심을 매수하다니, 저들이 당신을 거들게 하려는 작정이지요!”
정철이 가볍게 웃었다.
“차 한잔으론 민심을 매수할 수 없소. 지금은 이웃 여러분들이 여기서 내 여동생의 결백을 밝히는 걸 기다려 줌에 감사를 표하는 거요. 나중에 헛소문이 돌지 않도록.”
사내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어떤 성정인지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외쳤다.
“그래, 양(楊) 씨. 만약 백부의 사람이 정말 네 아내의 시신을 훼손했다면, 나는 여전히 자네 편을 들겠네. 차 한잔으로 양심을 파는 사람이 될 순 없지!”
“그래, 그래. 걱정 말게!”
모두가 편안하게 앉아 차와 간식을 먹으며 분분히 소리쳤다.
사내는 정철의 차분한 눈동자에 조금 당황했다.
이때 어디선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야윈 소년이 군중 속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소년은 급히 달려온 듯 이마에 땀이 가득했고, 품 안의 우는 아기를 달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크게 외쳤다.
“아버지, 뭐 하시는 거예요. 왜 여기 오셨어요!”
“산자.”
정철이 소년의 이름을 불렀고, 소년은 정철을 보자마자 외쳤다.
“은인님!”
‘은인’이라는 말은 그날 거리에서 정철이 자신을 놓아준 일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다른 사람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산자가 저자를 은인이라 부르기까지 하는데, 저자의 말이 틀림없는 것 같군.’
‘백부의 아가씨가 도운 게 틀림없어. 만약 시신을 훼손했다면, 산자가 은인이라 부를 리가?’
정철은 소년이 자신을 부른 칭호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내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들어 소년을 때렸다.
“이 배은망덕한 자식, 네 여동생을 구해줬다고 어미는 신경 쓰지 않는 게냐? 네 어미의 주검이 온전치 않으니, 환생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게다!”
정철이 손을 뻗어 막았다.
“대형,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도착했으니, 저자들의 말을 듣도록 하겠소. 그리 때리려 하는 건 아버지의 신분으로 아들을 위협하려는 거요?”
사내가 자신의 책문에 말을 잇지 못하자, 정철은 소년을 바라봤다.
“산자, 당시 내 동생이 네 어미의 아이를 받아주었지. 그 자리엔 너만 있었다. 내 동생이 어떻게 아이를 꺼냈지?”
산자가 망설이자, 정철이 따뜻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된다.”
이어 사내를 흘끗 쳐다보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네 아버지가 말하기를, 내 여동생이 네 어머니의 배를 갈라서 아기를 꺼냈다고 하더군!”
“아닙니다!”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부인했고, 모두의 반짝이는 눈빛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품 안의 아기를 꽉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당시엔 저와 그 신의님만 자리에 있었고, 신의님은 제 어머니에게 물 한잔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제 어머니의 배 위에 이상한 원을 그리셨어요. 저도 그게 뭔지는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신의님이 제게 어머니의 바지를 벗기라고 하셨―”
소년은 잠시 멈칫했다.
‘그때, 신의님은 내게 뒤돌아 서 있으라 하셨어. 사실 나도 여동생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직접 보지 못했어.’
소년은 저도 모르게 방금 전 들었던, 정철의 말을 떠올렸다.
– 네 아버지가 말하기를, 내 여동생이 네 어머니의 배를 갈라서 아기를 꺼냈다고 하더군!’
‘안 돼, 만약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아버지의 성정에 억지를 부리실 거야.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순 없어!’
소년은 이를 갈다가 크게 외쳤다.
“저는 여동생이 태어나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신의께서는 제 어머니의 시신을 훼손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아기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아보고 선심을 베풀어 제 여동생의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이 말에 현장이 떠들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