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재회
한편 한지는 조청공과 함께 사람이 없는 곳에 도착했다.
조청공이 멈춰서서 웃었다.
“한 세자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면 여기서 말씀하시지요. 너무 멀리 가면 다른 이들이 저희를 찾지 못해 걱정할 겁니다.”
한지는 저도 모르게 조청공을 평가하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격식 있는 행동은 보통의 규수들보다 더욱 우아해 보였고, 누가 봐도 아주 좋은 아가씨인 듯했다.
하지만, 한지의 마음에 들진 않았다.
마음에 한 사람을 품고 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마음에 차지 않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벼운 사람들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한지는 그러지 못했다.
한지는 오직 정요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조청공의 맑은 눈빛을 마주하자, 한지는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조 아가씨―”
한지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다시 침묵했다.
조청공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쳐다봤고, 속으로 불만스러워했다.
‘얼른 그 음악상자를 보고 싶어서 마음이 급한데, 한 세자는 아주 이상하구나. 할 얘기가 있다고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 정말 알 수가 없어. 혹시 중요한 일이라 말하기 어려운 걸까?’
조청공은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한 세자, 천천히 말씀하세요. 급하지 않습니다.”
한지는 갑자기 조청공의 웃는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돌려 멀리 내다보다가, 초목 사이로 온화한 소녀의 녹색 치맛자락이 어렴풋이 보이자 깜짝 놀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
“조 아가씨, 사실……, 사실 제겐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산림은 고요했고, 그저 새와 벌레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옷자락이 펄럭였다.
한지는 참지 못하고 조청공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정혼녀가 이런 말을 들으면 갑작스레 노발대발하진 않더라도, 상심하여 화낼 순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이미 질책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조청공은 한참 멍하니 있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한 세자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혼인 후 우리 둘의 관계가 얼음처럼 차가울 거란 걸 미리 알려주시려는 건가요?”
‘얼음’이라는 단어에 조청공이 생각하는 결혼생활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그런 생활은 자신에게 그리 영향이 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단지 시집을 간 후에도 지금처럼 기계와 장치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한 세자가 허락만 해준다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면 혹시 한 세자와 거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면, 계속 그 사람을 연모한다고 해도 간섭하지 않을 거야. 억울하지도 않을 테지. 내 마음속 일 순위는 성가신 사내 따위가 아니니까.’
한지는 조청공이 ‘얼음’ 같은 말을 하며 이렇게 침착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제겐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조 아가씨께서는 현명하고 정숙하시며 인품과 용모 모두 출중하시니, 제게 시집오시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 같습니다.”
“그 말의 뜻은?”
한지가 결심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집안에서 많은 애정을 받으시는 거로 압니다. 만약 우리 둘의 혼약을 취소할 방법이 있다면, 쌍방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조청공은 의아한 듯 한지를 흘끗 쳐다보더니,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한 세자께서 혼약을 취소하고 싶으신데, 왜 스스로 나서지 않으시는 겁니까? 우리 조가가 평범한 집안이긴 하지만, 그리 간절하게 매달릴 가문도 아닌데 말이지요.”
“조 아가씨,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희 어머니께선 몸이 편치 않으셔서, 제가 이야기를 꺼내면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실까 봐 그렇습니다. 만약 저 때문에 어머니께서 화병이라도 나신다면 죄를 저지르는 게 될 겁니다.”
조청공은 여전히 아름답게 웃는 얼굴로 정곡을 찔렀다.
“한 세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 당신이에요. 혼약을 취소하고 싶으신 것도 당신이고요. 그런데, 어머님께서 화병이 날까 두렵다고 제게 방법을 구하시는 겁니까?”
조청공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걸 집안에서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말을 마친 후, 조청공은 옷소매를 뿌리치고 떠나갔다.
한지는 그곳에 멀뚱히 서서 성큼성큼 가버리는 조청공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발밑에 뿌리가 내린 듯 꿈쩍도 하지 않던 한지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도 되돌아갔다.
* * *
“둘째 오라버니, 수리딸기 정말 맛있다.”
정미는 수리딸기를 아주 많이 먹은 탓에 가뜩이나 붉었던 입술이 과즙에 물들어 더욱 붉어졌다.
정철이 새하얀 손수건을 건넸다.
“얼른 입 닦아. 산열매가 맛있긴 하지만 깨끗이 씻지 않았으니까. 너무 많이 먹지 마.”
“응, 알겠어. 근데 조 언니도 대단하다. 이렇게 많은 들꽃과 산열매를 알고 있다니.”
정철이 웃었다.
“미미, 그때 교외에서 마주친 조 아가씨를 잊은 거야? 자주 산과 들에 다니시는 것 같던데.”
정미의 눈빛이 반짝였다.
“역시 오라버니는 똑똑해. 그것마저 기억하다니.”
‘둘째 오라버니는 여기저기 유학을 다니는 걸 좋아하고, 조 언니도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규수가 아니니까, 만약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다면 손을 잡고 천하를 여행하며 신선 같은 한 쌍이 될 수도 있겠어.’
정미가 눈을 들자 비스듬히 뻗은 가지들을 헤치며 천천히 걸어오는 조청공이 보였다. 정미는 오라버니와 조 언니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정미는 고개를 돌려 정철의 평온한 옆모습을 보았고, 갑자기 마음이 아파져오는 것을 느꼈다.
“미미, 뭘 보는 거야? 오라버니 얼굴에 꽃이라도 피었어?”
정미가 빙그레 웃었다.
“오라버니 얼굴이 꽃보다 더 예뻐.”
정철의 얼굴은 곧바로 붉어졌고 짜증이 난 듯 정미를 흘끗 쳐다보더니 꾸짖었다.
“허튼소리, 다른 사람이 들으면 웃을 거다!”
하지만 꾸짖고 난 뒤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정철은 정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정색하며 속마음과 다르게 말했다.
“사내가 여인도 아니고, 외모가 뭐가 중요해? 다른 사람이 들으면 너를 경박하다고 할걸.”
정미는 정철의 꾸짖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듣게 하겠어? 게다가, 여인도 잘생긴 사내를 좋아하거든. 아, 맞다. 내가 듣기로는 황제도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를 탐화랑으로 임명하고 행원(杏園)에서 연회를 베푼다고 하던데.”
말을 마친 정미의 표정이 조금 쓸쓸해졌고 작게 말했다.
“다 나 때문이야. 내가 아니었으면 며칠 뒤 행방에 오라버니의 이름이 있었을 텐데.”
정철이 손을 뻗어 정미의 어깨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털어내 주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더 이상 마음에 두지 마. 언제 좋은 날이 올지 누가 알아.”
“오라버니 말이 맞아.”
정미가 입술을 오므렸다.
‘원래 내가 오라버니를 위로하려고 한 말인데, 오히려 오라버니가 나를 위로해줄 줄이야.’
“오라버니.”
정미가 갑자기 손을 뻗어 정철의 팔짱을 끼자, 정철이 그녀를 바라봤다.
정미가 눈을 들고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오라버니일 거야.”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 사람이……, 미래의 올케언니라 하더라도. 이런 이기적인 생각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들킬 수 없어.’
“그럼 계속 노력할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오라버니가 될 수 있도록.”
정철의 맑은 목소리가 광활한 산림 속에서 울리자,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정철은 ‘오라버니’라는 단어를 내뱉자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정미가 정철의 팔을 건드렸다.
“왜 그래?”
정철은 따뜻하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고, 아무렇게나 풀잎을 하나 뜯으며 말했다.
“미미, 노래 한 곡 연주해줄게.”
풀피리 특유의 경쾌한 음악 소리가 울렸고, 놀고 있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피리를 부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진지했다. 산과 들의 새와 벌레조차 울음소리를 작게 내는 듯했고, 이 유유한 음악 소리는 끊임없이 멀리 울려 퍼졌다.
연주를 마치자, 정철은 넋을 놓고 있는 정미에게 빙긋 웃었다.
“이제 가자.”
다른 어린 형제들도 충분히 놀았기에, 일행은 자리를 정리하고 이어서 산에 올랐다.
* * *
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쯤, 누군가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호기심을 안고 위로 더 올라갔고, 높고 큰 나무 사이로 빠져나가 산봉우리를 돌아가자, 산비탈에 도착하게 되었다.
산비탈은 꼭대기와 아직 거리가 있었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들꽃이 산과 들에 가득 피어있었고 특히 제멋대로 피어난 그 모습에는 화원에 심은 귀한 화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기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아름다움은 먼저 이곳에 오른 사람들로 인해 깨지고 말았다.
그 사람들은 모두 열몇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들이었다. 정미가 그들을 살펴보니, 그중 몇 명은 사냥을 나섰던 그 날 곰과 호랑이를 마주쳤을 때 멀리 달아난 소년들 같았다.
그들은 평민 옷을 입은 사람들과 큰 소리로 싸우고 있었고, 거리가 가까우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말 재수 없군. 이렇게 좋은 날에 왜 죽은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오르는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여기가 답청하는 곳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죽은 사람을 데리고 올라오다니, 간이 부었구나!”
그중 한 사람은 상아색의 도포를 입고 있었고, 도포는 봄볕 아래 은은한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가차 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걷어찼다.
“얼른 이 시체 치워! 며칠간 요양하다가 오늘에서야 처음 나와 불운을 떨쳐버리려고 했건만, 이런 걸 만날 줄이야!”
정미가 냉소했다.
그 소년은 얼마 전 정미가 때렸던 화량이었다. 이 거리에서도 그의 눈 밑에 든 멍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 보였다.
‘이렇게나 빨리 사람을 걷어찰 힘이 생겼다고? 그때 너무 적게 때렸구나!’
걷어차인 사람은 머리에 흰 천을 두르고 있었고, 입은 옷도 백의였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발길질에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으며, 마른 몸을 보아하니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소년임을 알 수 있었다.
“공자님들, 그만 차세요. 그만요! 이 아이가 얼마나 불쌍한데요. 아비는 매일 도박을 하며 집에 돌아오지 않고, 어린아이와 만삭인 아내도 돌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아이의 어미가 난산을 하게 되었고, 산모와 태아 모두 살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이 아이의 이웃인데, 도와주려고 해도 방법이 없어 지금에서야 사람을 들고 올라온 겁니다.”
일행이 말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오늘 귀인들께서 산에 오르시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쪽 길을 오르지 않고 이 길로 올라 봉분에 도착하면 묻으려고 했습니다. 귀인들께서 놀라실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공자님들을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공자님들, 이 불쌍한 집안 꼴을 보시고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용서?”
화량이 더욱 화내며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퉤, 충분히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산모와 태아 모두 죽었다고? 정말 극도로 재수가 없구나!”
이 공자들은 평민을 개미처럼 여겼기에 당연히 조금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했다.
걷어차인 소년은 화량의 말이 자극이 되었는지, 미친 듯이 달려들어 화량의 다리를 안고 깨물어버렸다.
“악, 뭐 하는 거야. 놔, 놓으라고!”
화량이 호통쳤다.
화량의 옆에 있던 소년이 그를 세차게 걷어찼고, 상복을 입은 소년은 멀리 떨어져 나가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였다.
정미는 그 소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도둑질을 했다가 정철이 놓아준 바 있던 그 소년이었다.
‘그날 어머니께 산파를 모셔다 줄 거라 한 말은 사실이었구나. 그럼, 소년의 어머니는 난산으로 죽은 건가?’
정미는 저도 모르게 흰 천이 덮인 들것을 쳐다봤다.
마침 이때, 어떤 소년이 그 들것을 걷어찼다. 들것이 흔들리더니 시체를 가린 흰 천이 옆으로 흘러내리면서, 죽은 부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정미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피하다가, 갑자기 다시 쳐다보고는 표정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