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속마음을 털어놓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미, 역시 여기 있구나.”
정미가 뒤돌아 사람을 확인하고는 웃었다.
“화서, 여긴 어떻게 왔어?”
정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화서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한지와 다른 사람들이 뒤돌아보고 있던 것이었다.
일행은 적지 않았고, 어떻게 만났는진 모르겠지만 둘째 오라버니네도 함께 있었다.
정미는 저도 모르게 조청공을 흘끗 쳐다보았다.
조청공은 음악상자에 신경을 몰두하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미가 조청공을 잡아당겨 일어나며 웃었다.
“화서, 또 키가 컸네.”
그 말에 화서의 귀 끝이 붉어졌는데, 마치 부끄러워하는 아기 사슴 같았다.
“나는 계속 크고 있지.”
그러고는 입을 가리고 두어 번 기침을 하다가, 정미가 걱정할까 봐 급히 말했다.
“방금 국공부에 오기도 했고, 서둘러 오느라 이러나 봐. 이틀 정도 쉬면 괜찮을 거야.”
정미는 내심 걱정하며 생각했다.
‘나중에 기회를 잡아 배운 지 얼마 안 된 배원부를 화서에게 주어 지금 상태에서 더 악화되지 않게 해야겠어.’
이때 정철이 다가왔다.
“미미, 화서가 네가 운선산에 있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 정말 여기 있었구나.”
정철은 조청공의 손에 있는 음악상자를 쳐다보고는 멈칫했다.
‘내가 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주다니!’
정철은 갑자기 조금 울적해졌다.
‘이 음악상자를 사려고, 여동생에게 선물할 거라는 다른 사내와 팔씨름까지 했다고!’
정미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미가 아는 오라버니는 평소 낯선 여인을 멀리하며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조 언니를 보는 눈빛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설마―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조 언니인 거야?’
정미는 숨을 크게 들이키며 갑자기 모든 것을 깨우친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어쩐지 오라버니가 입을 꾹 다물고 좋아하는 사람을 얘기해주지 않더라니. 심지어 나한테 짜증까지 냈었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정혼해서였구나. 게다가 정혼자는 지 오라버니고!
설마 그때 마차가 고장 나서 우연히 조 언니를 마주쳤을 때, 첫눈에 반한 건가?’
정미는 참지 못하고 곁눈질로 조청공을 흘끗 쳐다봤다. 조청공은 침착한 표정이었고, 낯선 또래들 앞에서 조금의 어색함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정미는 조청공이 참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정미는 이어서 옥수와 난초 같은 오라버니를 쳐다봤다. 볼수록 두 사람이 하늘이 정해준 한 쌍처럼 잘 어울린단 생각이 들었다.
정미는 조금 슬펐지만, 왜 슬픈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한지를 보니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 무슨 일이든 지 오라버니와 연관되면 늘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
지 오라버니는 정요를 좋아하고, 나중에 조 언니가 시집가게 된다 한들 언니에게 차갑게 굴 거야. 그리고 둘째 오라버니도 몰래 상심하여 더 이상 기뻐할 수 없겠지. 이 혼사는 정말 엉망진창이구나.’
정철은 변화막측한 여동생의 표정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할 수 없이 말문을 열었다.
“조 아가씨, 또 만났군요.”
“정 공자.”
조청공은 손에 쥔 것에 온 마음이 쏠려있었기에,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속세에 내려온 적선이더라도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이에 표정은 조금 냉담했으며 무의식적으로 손에 쥔 물건을 꽉 쥐었다.
이를 본 정철은 어이가 없었다.
‘그저 미미가 내가 준 선물을 아무렇게나 다른 사람에게 준 것에 마음이 답답했을 뿐이고 뺏을 생각은 없었는데, 조 아가씨는 정말 웃기는군.’
남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정철이 몰래 정미를 살짝 잡아당겼다.
정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개했다.
“조 언니, 내 둘째 오라버니는 만나봤지? 여기는 내 이모네 사촌 동생 화서야. 저쪽은 우리 집 자매들과 외가의 사촌 형제들이고.”
정미는 왜 국공부의 사촌 여동생들이 보이지 않는지 의아했다. 매번 이런 자리마다 큰 사촌 언니는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한추몽과 다른 여동생들은 절대 빠지지 않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모두에게 조청공을 소개했다.
“여긴 조 시랑댁의 다섯째 소저야, 오늘 같이 놀았어.”
이 말에 정미를 포함한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한지를 쳐다봤다.
정미는 한지와 조청공이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지 조금 궁금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누구도 정요의 시선이 조청공 손안의 음악상자에 꽂혀있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정요는 한참 동안 음악상자를 쳐다보고 나서야 사람들을 따라 한지를 쳐다봤다.
분위기가 잠시 어색해졌다.
정철을 제외하면, 한지는 일행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정혼자와 우연히 만나고, 옆엔 좋아하는 사람이 서 있는 상황은 꽤나 난처했다. 하지만 그는 애송이가 아니었기에 곧바로 인사를 건넸다.
“위국공 세자, 한지입니다.”
조청공은 잠시 멈칫하더니, 정미를 흘끗 쳐다봤다.
‘정미가 어찌 오늘 여기서 이들을 우연히 만날 거라 생각했겠어.’
조청공은 화서를 매섭게 한 번 노려보며 저 녀석이 폭로한 거라 생각했다.
죄 없는 화서는 곤혹한 듯 눈을 끔뻑였다.
조청공도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식으로 예를 갖췄다.
“한 세자셨군요.”
사람들은 그제야 조청공과 잇달아 인사했다.
한흘과 몇몇 동생들은 조청공이 미래의 큰형수님임을 알고는, 조용히 한지를 곁눈질했다.
한지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여러 번 조청공을 살피며 생각했다. 오늘 우연히 마주친 일은 난처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쁘다고는 말할 순 없었다.
‘기회를 틈타 조 아가씨에게 잘 말하면, 혼사를 무를 수 있는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조청공이 입을 열었다.
“정 동생, 계속 산을 오르자.”
“좋아.”
정미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연히 마주쳤으니 같이 어울려야겠지만, 산을 오르면 두세 명씩 떨어져 있게 되기 때문에 어색함을 달랠 수 있을 터였다.
운선산은 모두가 와본 산이었고, 계속 올라가기 위해선 산의 오솔길을 따라가면 되었다.
그러나 조청공이 정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정 동생, 내가 다른 오솔길 하나를 아는데, 이 오솔길보다 험하긴 하지만 경치가 아주 좋아. 가본 적 있어?”
정미가 고개를 젓자, 조청공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올해는 내가 그 길로 데려가 줄게.”
“좋아.”
정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정철을 쳐다봤다.
“오라버니, 나는 조 언니랑 함께 다른 길로 갈게. 그 길은 조금 험하다고 하니까, 오라버니는 다른 자매들이랑 이쪽으로 가.”
정철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요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등산은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것인데, 평소 보던 것과 다른 풍경이 있다니 조금 힘들어도 가치가 있을 것 같아.”
이 말에 다른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고, 결국 모두가 함께 조청공을 따라 다른 길로 산을 올랐다.
조청공의 말이 맞았다. 그 길은 다니는 사람이 적어 아직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걷기가 꽤 힘들었다. 특히 정동은 얇은 천을 덧댄 치마를 입어 순식간에 옷감이 긁혀 망가졌고, 화가 나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정옥과 다른 어린 동생들은 아주 좋아하며, 수시로 멈춰서서 들꽃을 꺾어 화환을 만들며 놀았고, 덕분에 길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위로 올라갈수록 공기가 청정해졌고, 사람들의 머리도 따라서 맑아졌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어색함도 점점 사라져갔다.
특히 정옥은 조청공을 아주 좋아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조 언니, 정말 대단해요. 제가 다른 언니들과 왔을 땐 이 길을 몰랐거든요. 보세요, 여긴 산열매도 딸 수 있다고요.”
정옥이 손을 뻗어 손안의 옅은 붉은색의 열매를 보여주었다. 오디처럼 생긴 열매는 아주 사랑스러웠다.
정요가 말했다.
“정옥, 산열매는 함부로 먹으면 안 돼.”
조청공이 옅게 웃었다.
“이건 먹어도 돼. 수리딸기라고 하는 건데, 아직 덜 달 때긴 하지만 그래도 맛이 좋을 거야.”
그러고는 정옥의 손에서 한 알을 집어 살짝 닦고는 입속에 넣었다.
정옥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이 힘들게 딴 열매가 성과를 보는 것을 쳐다보았다. 이내 더욱 버리기가 아까워진 정옥은 조청공을 따라 한 알을 입에 넣어보았다. 그러자 눈이 반짝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맛있어요.”
정옥은 치맛자락을 들고 한흘과 다른 사람들에게 먹어보라고 외쳤다.
몇몇의 어린 동생들은 이 열매를 먹어보더니, 걷지도 않고 수리딸기를 찾기 시작했다.
정철은 이를 보고 어차피 등산의 목적은 얼른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니, 차라리 여기서 잠시 쉬어가자고 했다.
정미도 수리딸기가 아주 맛있다고 생각했고, 정옥이 다가와 같이 따러 가자고 자신을 잡아당기자, 조청공에게 한마디 하고는 기쁜 발걸음으로 정옥을 따라갔다.
한지는 조청공이 혼자 남은 것을 보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결국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조청공은 바위 위에서 쉬고 있었고, 마침 음악상자를 꺼내 연구해보려던 참이었다. 그녀는 머리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자 저절로 고개를 들어봤다.
한지는 가까운 곳에 서서 쑥스러워하다가 따뜻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조 아가씨, 저와 걷지 않겠습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의 대량은 개방적인 편이었고, 예비 부부에겐 특히나 더욱 너그러운 분위기였다. 그들처럼 정혼한 사이라면, 오늘은 원래 한지가 먼저 조청공을 초대해 나들이를 갔어야 했다.
조청공이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래요.”
* * *
걸을수록 초목이 우겨졌고,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한지와 조청공은 점점 사람들과 멀어졌다.
정요는 멀리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흘끗 보고는, 고개를 숙여 가느다랗고 하얀 손으로 소매에서 작은 도자기 상자를 꺼냈다. 도자기 상자에는 ‘운상고(云霜膏)’라고 쓰여 있었다.
운상고는 궁궐의 비약으로, 외상을 치료하는 연고였다. 얼굴의 붓기가 이렇게 빨리 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어제 한지가 보내준 운상고 덕분이었다.
‘궁궐의 물건은 정말 좋구나.’
정요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고, 작고 정교한 도자기 상자를 매만지며 멍해졌다.
정요는 가끔 한지는 확실히 자신에게 잘해주니, 만약 적처가 되더라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위엄있고 아름다운 태자와 화려한 태자비의 봉관(鳳冠)을 떠올리면, 결국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한지 같은 귀족 세자는 아주 많았지만, 존귀한 태자는 하늘 아래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정요는 아직 다 쓰지 않은 운상고를 염낭에 넣고, 한지와 조청공의 행방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지가 정혼을 한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의 감정이 너무 격한 탓에 최근 나를 도와주려다가 도리어 성가시게 했으니.’
정요는 고개를 들어 정옥과 함께 수리딸기를 따는 정미를 쳐다봤다. 정미는 수리딸기를 한 움큼 가득 따서는 손수건으로 받쳐 들고 정철에게 달려갔고, 방긋 웃으며 그에게 먹으라 하고 있었다.
소녀는 의기양양한 모습이었고, 정철이 고개를 숙여 수리딸기 한 알을 먹고는 따뜻한 웃음을 지어 보이자 아주 기뻐하며 눈가에는 화색이 돌았다.
정요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시화 같은 따뜻한 장면을 보자 마음속에 갑자기 황당하면서도 흥분을 숨길 수 없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정철은 정가의 사람이 아니고, 정미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 애정에 눈을 뜬 정미에게 혹시……, 혹시 그 남매의 정이 조금씩 변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요의 가슴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멀리서 남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늘 온화하고 정다운 그들의 사이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고, 정요는 갑자기 떠오른 이 생각을 다시는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정요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만약 정미가 정철을 은애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정말 재밌겠구나. 정미를 애지중지하며 아끼는 정철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정미는 과연 그 용감한 성정으로, 사람들이 곁눈질할만한 짓을 저지를까?’
정요는 둘을 보며 확신에 찬 웃음을 지었다.
정미는 솔직하고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였다. 한지와 소꿉친구이자 위국공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자신이 흔적 없이 몇 번 유인한 걸로 한지에게 마음을 빼앗겨, 한지가 아니면 시집도 가지 않으려는 모습이 되지 않았던가?
‘만약, 만약 한지의 소성년식 그날, 나와 한지가 매화 숲에서 나눈 얘기를 정미가 알지 못했다면, 정미는 지금까지도 그를 이렇게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지금 정미와 내 사이는, 내가 정미에게 영향을 주고 싶어도 예전만큼 쉽지 않은 상황이지.’
정요의 눈빛이 확고해졌다.
‘어릴 적 까칠하고 제멋대로였던 정미는 이복언니인 나를 본체만체했지만, 나중엔 둘도 없는 자매가 되었어. 그러니 지금 이 관계도 회복할 수 있을 거야.’
정요는 꽃과 나무에 기대 한숨을 쉬었다.
‘갈 길이 멀구나.’
그녀는 들꽃을 한 송이 꺾어 짓이겨버리고는 아무 데나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