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난-135화 (135/375)

135화. 상사절

“이건…….”

정미가 건넨 종이를 받아본 셋째 나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종이에는 몇 줄의 글이 적혀있었다.

[부인과가 아니면 진료를 보지 않음. 생사존망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진료를 보지 않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진료를 보지 않음.]

“미야, 첫 번째는 그렇다 쳐도, 뒤의 두 가지는 조금 지나친 것 아니냐―”

셋째 나리는 의료인은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주의였기에, 정미가 정한 세 가지 원칙에 꽤 불안해졌다.

‘미는 여자아이이고, 게다가 백부의 귀녀이기에 사내들의 진료를 봐주지 않는 것은 그리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뒤의 두 가지, 특히 세 번째 원칙은 정말 건방지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정미는 셋째 나리가 밖에 모인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듣지 못한 듯 침착했다.

“숙부님, 저는 부의예요. 평범한 맨발의 의사가 아니라요.”

정미가 아혜에게 부의를 배우게 된 후, 아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었다.

정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혜의 말에 동화되어왔다.

부의의 지위는 초연했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기까지 할 수 있으니, 자신을 낮춰서 다른 사람들에게 깔보여서는 안 됐다.

게다가 부적을 만드는 데에는 자신의 정혈이 필요했다. 몇 번의 치료로 이미 몸이 허약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이런 규칙을 정하지 않으면 요절할지도 몰랐다.

셋째 나리는 멍하게 듣더니 정미의 차분한 눈동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 네 말도 맞다.”

‘내가 잊었구나. 정미는 부의다. 아무 의관의 의원이 아니야.’

애초에 정가의 조상이 부의의 능력으로 황제의 존경과 회인백이라는 지위를 받고, 천하의 공경을 받았으니, 얼마나 초연한 품격이었겠는가.

‘정미는 아직 어린데도 이런 뛰어난 재능이 있으니, 함부로 낮춰서는 안 된다.’

셋째 나리가 깨달은 것 같자, 정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숙부님, 나가셔서 사람들에게 이 세 가지를 전해주면 됩니다. 받아들일 거예요.”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규칙이 많을수록 나를 높은 신의로 여기게 되겠지. 아무 곳이나 나설수록, 부르면 곧바로 오는 맨발의 의사로 여겨질 거야.’

셋째 나리는 나가서 백성들에게 정미의 ‘삼불치(三不治)’ 규칙을 전해주었다. 일부 백성들은 불만스러워했지만, 직접 대우의 아내가 살아서 제생당을 걸어 나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들에게 반박하며 설명했다.

이렇게 정미가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을 살려낸 일은 더욱 멀리 퍼지게 되었다.

* * *

정미가 제생당에서 나와 백부로 돌아갔을 때, 자신의 앞으로 온 두 장의 서신을 보았다. 하나는 내일 함께 봄 호수를 보러 가자는 화서의 서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운선산(云仙山)에 가보자는 조청공의 서신이었다.

정미는 화서를 보고 싶었지만, 호수에 가고 싶진 않았다. 한지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조청공의 초대에는 기꺼이 응하고 싶었다.

얼마 전 조청공에게 한지와 정요의 일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조청공은 뭔가를 만드느라 나올 시간이 없다고 하여 만날 수 없었다.

내일 산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정미는 두 사람에게 답신을 써 보냈고, 점심식사를 한 뒤에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덕소 장공주부로 향했다.

* * *

정미는 장공주에게 휴가를 신청하려고 했으나, 뜻밖에도 돌아갈 때쯤 덕소 장공주가 먼저 말했다.

“내일은 상사절이니, 아가씨들끼리 재밌게 놀거라. 여기 올 필요 없다.”

정미와 다섯째 공주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덕소 장공주의 말투가 휙 변하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모레엔 너희 둘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시험해보고 싶구나. 특히 정미는 승마와 활을 배운 지도 꽤 되었으니, 어떻게 되고 있는지 봐야겠다.”

정미는 활을 처음 배우는 것이기도 했고, 다섯째 공주와도 잘 맞았다. 덕소 장공주는 조카에게 마음이 잘 맞는 벗을 만들어주고자 다섯째 공주가 우선 정미에게 기초를 가르쳐주게끔 하였고, 자신이 직접 가르치지 않아 왔다.

정미는 장공주의 말에 긴장이 되었다.

배운 기간이 짧기도 했고, 부적을 배우는 데에 체력을 많이 썼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 뒤 별다른 연습을 하지 않곤 했다. 모레 시험을 본 뒤 체면만 구긴다면 다행이지만, 장공주가 실망하여 쫓겨나게 된다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정미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다섯째 공주와 함께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안달이 난 다섯째 공주의 표정을 흘끗 보고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도 한 손으로 몇백 근의 바위를 들 줄 알았다면, 저렇게 안달이 났겠지!’

* * *

다음 날, 정미는 염송당으로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갔다. 정요도 그 자리에 있자 정미는 저절로 탄복했다.

‘어제 그 건장한 사내에게 걷어차였는데, 오늘 바로 일어날 수 있다니. 외출을 위해서라면 필사적이구나.’

매년 상사절마다 자매는 함께 외출하곤 했는데, 큰집의 정옥과 큰고모님의 진령운까지 함께 나갔다. 둘째 오라버니는 대부분 집에 있지 않았고, 셋째 남동생은 나이가 어려 공부에만 집중했기에 외출하지 않았다.

수도엔 답청할 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았기에, 위국공부의 사촌 형제들과 자주 만나 종일 놀곤 했다.

“요야, 너도 나이가 찼으니, 솔선수범하여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한다.”

맹 노부인이 어른스럽게 당부했다.

“걱정 마세요, 조모님. 주의하겠습니다.”

맹 노부인이 정철을 쳐다보며 말했다.

“철아, 다음 시험까지 삼 년이나 남았으니, 굳이 하루 종일 공부할 필요도 없다. 오늘 여동생들과 함께 나가 놀거라. 네가 있으면 이 할미도 더욱 안심될 테니 말이다.”

어른들은 상사절에 소년소녀들이 놀러 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지만, 수습할 수 없는 창피한 일을 저지를까 걱정을 하기도 했다.

정미가 생각하기에, 정철은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기로 했으니 당연히 승낙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철은 갑자기 정미를 흘끗 보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정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오라버니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조모님, 조 시랑댁의 다섯째 아가씨가 저에게 같이 산행을 가자고 초청해주셨어요. 저는 언니 동생들과 함께 가지 않을게요.”

“조 시랑의 다섯째 아가씨?”

맹 노부인은 오랫동안 다른 집안과 왕래해왔기에, 수도의 많은 가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정미의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위국공 세자와 정혼한 그 아가씨 말이냐?”

이 말에 정요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고 아무 표정 없이 정미를 흘끗 쳐다봤다.

정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맹 노부인이 웃었다.

“그럼 평소에 타는 그 작은 마차를 타고 가거라. 하지만 일찍 갔다가 일찍 돌아와야 한다. 하인을 좀 더 데려가고.”

작년에 정미가 한지에게 고백하여 큰 소란을 피운 뒤로, 맹 노부인은 꽤 화가 나 있던 바였다. 하지만 지금 정미가 미래의 국공 부인과 잘 지낼 수 있게 된 듯하다니 이는 당연히 기쁜 일이었다.

맹 노부인은 한 씨의 우둔한 성정 때문에 지금 자신의 처가와도 사이가 멀어졌으니, 나중에 노국공 부부가 세상을 뜨게 되면 위국공이라는 친척 자리도 유명무실할 거라 여기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염송당을 나섰을 때, 정철이 정미에게 물었다.

“나는 왜 미미가 산행을 간다는 걸 몰랐지?”

정미가 그를 흘끗 노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오늘 일이 있을 거라 했잖아. 왜 갑자기 다른 애들과 함께 답청을 간다는 거야?”

정철은 말문이 막혀 바보 같은 웃음만 지어 보였다.

“내가 사준 옷을 꼭 입어야 해.”

정미는 그렇게 한마디 당부하고는 집을 나섰다.

* * *

마차는 운선산의 산기슭 아래 도착했고, 그곳엔 이미 차를 파는 노점이 몇 개 펼쳐져 있었다. 산행을 온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고, 방금 도착해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노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정미가 마차에서 내리자, 기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동생, 나 여기 있어.”

조청공이 아름다운 얼굴로 맑게 웃으며, 정미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미는 절로 웃음이 나왔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조 언니, 드디어 만났네. 보고 싶어도 만나기가 정말 쉽지 않아.”

“최근 계속 어떤 걸 연구하고 있었는데, 실마리가 잡히지 않아서 놀러 나올 기분이 아니었어.”

“그럼 지금은 어때?”

조청공이 손을 내저었다.

“말도 마. 여전히 별로 진전이 없어. 어머니께서 내가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앞으로 그런 건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니까. 생각해보니 우리가 만나지 않은 지도 꽤 된 것 같아서, 상사절을 핑계로 만나야겠다 싶었지.”

정미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말했다.

“언니, 그럼 바로 산에 오르자.”

그러고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며 덧붙였다.

“산 정상에 도착하면 보여줄 게 있어.”

“좋아. 맞다, 얼마 전 보낸 답신에 내게 할 얘기가 있다고 쓰여있던데, 무슨 얘기야?”

정미는 조청공을 만나자마자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얘기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웃었다.

“산 정상에 올라가서 얘기해줄게.”

“그래.”

자리에서 일어난 조청공이 정미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정 동생, 조금 마른 것 같은데 혹시 그동안 잘 챙겨 먹지 못한 거야?”

정미는 생각했다.

‘매일 부적을 배우느라 피를 쓰고, 승마와 활을 배우기까지 해야 하니, 살이 찔 리가 있나.’

하지만 말을 아끼기로 하고 웃었다.

“아마도 키가 컸나 봐.”

조청공이 눈을 들어 정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여기서 더 크면, 네 옆에 서 있을 수도 없겠어.”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산골짜기에서 새가 지저귀었고, 꽃과 나무가 무성한 3월의 운선산은 아주 아름다웠다. 그리 험한 산이 아니었기에, 보통의 아가씨들도 반 시진 정도면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산 정상에 도착하면 보이는 산천에 가득한 들꽃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두 사람은 여유롭게 산길을 따라 위로 올라갔고, 어느새 산 중턱에 다다랐다.

산 중턱엔 큰 평지가 있었고, 체력이 좋지 않은 아가씨들은 더 이상 위로 가지 않고 경치가 좋은 곳을 골라 쉬기 시작했다.

조청공은 정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안색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는 말했다.

“정 동생, 나 조금 힘든데 여기서 잠깐 쉬다 가자. 네가 내게 보여준다고 한 것도 한번 보고.”

정미는 당연히 승낙했다.

두 사람은 산도화(山桃花) 옆자리를 골랐고, 시녀가 급히 휴대용 의자와 방석을 가져와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오늘 정미는 화미를 데려왔다.

화미는 꼼꼼한 성정이었기에, 물통을 수건으로 두껍게 감싸왔다. 수통을 기울이자 온기가 남은 따뜻한 꽃차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벚꽃 모양 간식을 먹었다. 이 정교하고 예쁜 간식도 화미가 준비한 것이었다.

조청공이 웃으며 말했다.

“정 동생, 오늘은 정말 네 덕이야.”

정미가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이 시종은 다른 건 몰라도, 간식은 아주 신경 써서 잘 만들거든.”

정미는 화미에게 손을 흔들어 자신의 짐보따리를 가져오라 했고, 그 안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 조청공에게 건넸다.

“조 언니, 이것 봐. 재밌지?”

손바닥만 한 붉은 융단의 상자를 열자, 깜찍하고 정교한 금발의 소녀가 아름답게 서 있었다. 그것은 정철이 얼마 전 선물한 것이었다.

“정말 정교하다.”

조청공이 이를 자세히 살피며 손을 뻗어 건네받았다.

전문가인 조청공은 그것의 장치를 살펴보다가, 특정 한 부분을 건드렸다. 그러자 금발의 소녀가 춤을 추기 시작하며 즐거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조청공은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이, 이게 뭐야?”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깜박이지도 않자, 평소의 쾌활하면서 우아한 모습은 사라지고 조금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정미가 설명했다.

“내 둘째 오라버니가 ‘음악상자’라고 하는 걸 새로 연 가게에서 사 왔어. 해외에서 들여온 재미있는 물건들을 파는 가게래.”

“가게 이름이 뭐야?”

조청공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정미를 쳐다봤다.

“기진방(奇珍坊). 언니가 좋아할 것 같아서 어제 여종더러 가보라고 했는데, 다 팔리고 없다고 하더라고. 우선 예약할 수밖에 없어서, 물건이 도착하는 대로 언니한테 바로 보내줄게.”

조청공은 크게 실망하여 ‘음악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손가락으로 금발의 소녀를 살짝 건드리며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에 철면피를 두르고 부탁했다.

“착한 동생아, 이 음악상자인지 뭔지, 나한테 며칠만 빌려주면 안 될까?”

조청공의 눈은 큰 편이 아니었지만, 눈매가 아름다웠고 눈동자는 호박색이었다. 두 손을 모으고 부탁하는 모습은 어린 고양이 같아서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제발 허락해주라. 이 음악상자가 없으면 잠에도 들지 못할 것 같아. 그 기진방에 물건이 도착하면 즉시 네게 돌려줄게. 어때?”

정미는 잠시 마음이 아파 왔다.

이런 희한한 물건은 정미도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둘째 오라버니가 준 것이니 더했다.

하지만 정미의 성정은 그랬다. 친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인색하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언니가 가져가. 기진방에 물건이 도착하면 바꾸자.”

조청공은 그것이 날아갈까 봐 두렵기라도 한 듯 꼭 쥐고 환하게 웃었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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