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파문이 일다
잠시 후, 젊은 사내가 급히 걸어 들어왔고 정미를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더니 갑자기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신의님, 정말 당신 덕분입니다. 아이를 지킬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건장한 사내는 말끝을 흐리며 울먹였다.
“일어나세요. 물을 것이 있으니.”
정미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피곤한 듯 물었다.
“제가 외출하기 전에 당신에게 뭐라고 당부했는지 기억하나요?”
“그럼요, 기억합니다. 그 방엔 신의님 빼고 아무 여인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지요. 여인과 만나면 큰일이 난다고요!”
이 말에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정요는 갑자기 정미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무슨 헛소리야. 여인과 만나면 큰일이 난다니. 내가 기회를 틈타 방에 들어갔을 때는 그 부인은 자고 있었어. 만약 내가 은침으로 그 부인의 허리와 복부에 있는 혈 자리 몇 군데를 찌르지 않았다면, 뒷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건데, 지금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정미는 정요의 생각을 꿰뚫은 듯 정요를 쳐다보며 살짝 웃었다.
정요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속으론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럼 내 말을 듣고 계속 아내를 지켰습니까?”
사내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어찌 신의님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반보도 떨어지지 않았나요?”
정미가 그를 노려봤고, 사내는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중간에 볼일을 보러 다녀왔습니다.”
그는 혹여 정미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봐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주 빨리 돌아왔습니다. 차 한잔을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았어요!”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그 정도 시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에요.”
정미의 입꼬리가 휘었다.
“셋째 숙부님, 저희 의관엔 저와 둘째 언니를 제외하고 다른 여인이 없지요?”
셋째 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전엔 환안도 있었지만, 오늘은 오지 않았으니.’
정미가 다시 정요를 쳐다보고 침착하게 말했다.
“둘째 언니, 들었어? 그 부인은 이미 내 치료를 받아서 배 속의 태아도 안전한 상태였어. 하필 오늘 갑자기 다시 출혈이 난 것은, 분명 다른 여인과 만났기 때문이야. 이 의관에 언니를 제외하곤 다른 여인이 없어. 그래도 내가 언니에게 누명을 씌우는 거라 말할 거야?”
“정미, 여인이 방에 들어갔다고 음기가 충돌하여서 유산을 하다니, 너무 황당한 말 아니야?”
정요는 이런 상황에서 의심을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심을 받는 이유를 뒤집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저런 터무니 없는 말을 믿지는 않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은 믿지 않는다 한들, 부인의 남편은 곧바로 정미의 말을 믿었다.
그는 곧장 정요를 멀리 걷어차며 고함을 질렀다.
“네가 내 아내를 해쳤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여 막을 수 있었던 사람은 정철뿐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철은 정미가 알려주었던 신발 밑창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뒤로는 정요에게 남매의 정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정철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망나니 같은 놈!”
한지가 그 사내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한지는 믿을 수 없었다.
‘내 눈앞에서 정요가 또 남에게 얻어맞다니! 그것도 건장한 사내에게!’
이때, 정철이 순식간에 한지를 막아섰다.
“한지, 흥분하지 마. 진정해!”
셋째 나리도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후, 한지를 막아섰다.
“한 세자, 저 사내의 아내에 대한 일은 마을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네. 아내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저 사내가 다치게 된다면 의관의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그러고는 성큼성큼 정요에게 다가가 물었다.
“요야, 괜찮으냐?”
한지는 마지못해 손을 놓고 급히 정요를 부축했다.
“정요,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정요는 한지의 팔을 잡고 혀끝을 꽉 깨물고 나서야 간신히 기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괜찮냐고? 다른 아가씨였음 어땠을지 생각해보라고!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절대 기절해선 안 돼. 그랬다간 누명을 벗지 못하고 정미의 뜻대로 될 테니까!’
“숙부님, 괜……, 괜찮습니다……”
정요가 간신히 말을 내뱉자, 한지는 마음이 더욱 아파왔다.
“정요, 그냥 아무 말 하지 마. 말하지 말거라.”
정요는 눈을 부라릴 뻔했다.
‘이 망할 자식, 중요한 때에 방해 좀 안 할 수 없을까!’
사내는 뒤늦게 후회가 되어 도움을 청하듯 정미를 바라보았다.
“신의님, 저, 저는 고의로 그런 게 아닙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여인인 것을 잊었습니다. 걷어차선 안 됐는데!”
정미는 생각했다.
‘누가 여인은 걷어차면 안 된다고 했어? 정요처럼 사갈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때리면 내가 얼마나 통쾌한데. 이 사내는 정말 괜찮군. 이자의 아내를 구해준 보람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정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님, 다 물어보았으니 우선 나가게 하세요. 또 소란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요.”
셋째 나리가 얼른 사내를 쫓아냈고, 정요는 고통으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벽을 짚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셋째 숙부님, 숙부께서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계시니, 오라버니들 앞에서 제 결백을 증명해주세요. 이 세상에서 여인이 방에 들어갔다고 음기가 충돌하여 유산이 일어나는 그런 기이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정미가 차갑게 웃었다.
“언니, 계속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건, 결국 언니가 그 방에 들어갔다는 걸 인정하는 거 아니겠어?”
정요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 내가 지나갈 때 방문이 열려있었고, 부인은 자고 있길래 그저 문을 닫아줬을 뿐이야…….”
결국 마지못해 인정한 셈이었다.
정미가 웃었다.
“방금까진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며? 내가 언니한테 누명을 씌운 것처럼 굴었으면서.”
정요가 반박했다.
“나는 그저 지나가면서 문을 닫아줬을 뿐이야. 다른 짓은 하지도 않았어!”
정미는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셋째 나리를 쳐다봤다.
“셋째 숙부님,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계시니 모두의 앞에서 말씀해주세요. 그 상태의 부인을 누가 살릴 수 있었을까요?”
셋째 나리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최소한 내가 보기엔, 그 부인이 왔을 땐 이미 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 배 속의 아이는 지킬 수 있었나요?”
“그건 더욱 불가능하지!”
정미가 숨을 들이쉬며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빨갛게 부어오른 정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들었어? 불가능한 일이야. 근데 나는 해냈잖아. 그런 내가 말한, 여인이 그 방에 들어가면 음기가 충돌하여 유산한다고 했던 경고를, 언니는 무엇을 근거로 의심하는 거야? 언니가 부의를 알아?”
그러고는 미묘한 말투로 말했다.
“아니면 의술에 대해 잘 알아서, 음기가 충돌하는 것 외에도 짧은 시간 안에 유산을 하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아는 거야?”
정미는 의술에 대해서 그리 많이 알지 못했지만, 전력으로 부인을 살린 이후 그 부인의 전신을 살펴보며 외력에 의해 상처를 입은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떠한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침으로 어떤 혈 자리를 찔러야 혈액을 빠르게 돌게 할 수 있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허리와 복부의 혈도 몇 곳을 살펴도 정미는 침 자국을 찾을 수 없었다. 때문에 정요가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정미는 이 일의 증거를 찾을 수 없을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최소한 정요가 모두의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게 들통났으니.’
천 리에 달하는 제방도 개미구멍에 무너지는 법이었다. 온화하고 단정한 정요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알리게 되었으니, 좋은 시작이었다.
“정미, 내가 어떻게 그런 걸 알겠어!”
정요는 아픈 몸보다 답답한 마음에 더욱 괴로웠다.
‘내가 그 부인을 손본 이유는, 정미가 신의라는 명성이 널리 퍼지게 하지 않기 위함이었어. 정미는 이미 내게 적의가 있고, 그 부인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지만 의관의 모든 사람들이 정미를 추앙하고 있잖아. 만약 정말 다 낫게 된다면 앞으로 내 처지가 더욱 곤란해질 게 뻔했다고!’
“셋째 숙부님, 제 잘못입니다. 저는 정미가 그런 말을 전달해둔 줄은 몰랐어요. 알았다면 분명 멀리 떨어져 있었을 거고, 부인이 찬 바람을 쐴까 걱정되어 문을 닫아주지도 않았을 거예요…….”
정요는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가련한 모습을 지어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인정하는 게 나았다.
‘다행히 나의 특별한 기법과 연고로 다른 사람에게 흔적을 들키지 않을 테니까.’
“숙부님, 언니가 잘못을 인정했으니 됐어요. 의관에 소란을 일으키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저는 언니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서 숙부께서 원망하실까 걱정했던 거예요.”
정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셋째 나리는 생각했다. 의관에서 그렇게 오래 일했지만 오늘만큼 소란스러웠던 날은 없었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비틀거리는 정요를 쳐다봤다.
“요야, 많이 다쳤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내일도 푹 쉬고. 일단은 당분간 의관에 오지 말거라.”
정요가 눈을 내리깔고 작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관에 온 지 반나절 만에 따귀를 맞고, 걷어차이고, 거짓말을 했다는 오명까지 얻게 되다니, 이게 뭐야!’
여기까지 생각한 정요는 그만 한지의 품에 기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정요!”
방금 정요가 부인이 있는 방에 갔다는 걸 인정한 뒤로 한지는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정요도 아가씨니까 이런 엄중한 뒷일이 두려워서 잠시 인정하기가 겁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요가 기절해버리자 한지의 마음속에 있던 이상한 기분은 곧바로 사라졌고 긴장감과 아픔만이 남았다.
정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숙부님, 지 오라버니는 정혼했는걸요. 둘째 언니와 안고 있으면 좋지 않을 거예요.”
한지의 얼굴이 곧바로 붉어졌다.
“나는 그저 정요가 걱정됐을 뿐이야.”
“네네, 지 오라버니가 제일 걱정되겠지요.”
정미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셋째 나리도 역시 이유를 알아챈 듯 다가가서는 정요를 건네받아 백부로 돌려보냈다.
* * *
다음 날, 정요는 집에 머물며 휴식을 취했고, 정미는 일찍이 제생당으로 갔다.
한 시진 후, 젊은 부인이 사내의 부축을 받으며 제생당을 떠났다.
구경하러 온 백성들 사이에 순식간에 파문이 일었고 그 둘에게 몰려들며 물었다.
“대우, 네 아내가 정말 다 나은 거야?”
사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았어, 나았다고. 멀쩡히 걷고 있는 거 안 보여?”
믿기지 않은 사람들은 곧바로 부인에게 물었다.
“취화, 아이도 지켜낸 게야?”
취화는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이건 정말 기적이야. 그 아가씨가 어떻게 너를 살려낸 거지?”
대우가 눈을 부라렸다.
“어찌 아가씨라 부를 수 있어. 신의님이신데!”
몰려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신의님이지.”
어떤 사람이 머리를 내리치며 말했다.
“맞다, 내 며느리도 회임한 지 다섯 달이 되었는데, 그 신의께서는 분명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알아내실 수 있을 거야!”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얼른 달려갔고, 다른 사람들도 뭔가 떠오른 듯 곧바로 흩어졌다.
잠시 후, 제생당의 머슴이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셋째 나리, 크, 큰일 났습니다―”
셋째 나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에겐 ‘큰일 났다’라는 말이 가장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냐, 천천히 말해 보거라!”
머슴이 헐떡대며 말했다.
“사람들이 엄청 많이 찾아왔는데, 모두가 셋째 아가씨께 진료를 받고 싶어 하십니다!”
“내가 가보마.”
셋째 나리가 나가보자, 대청 안에 사람들이 빼곡히 차 있어 눈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