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길거리의 도둑
“정미 왔구나. 오늘은 조금 일찍 왔네.”
셋째 나리는 가끔 의관에 머무르곤 했고, 의관에 머무르지 않을 땐 일찍 출근했다. 이처럼 제생당에는 셋째 나리의 정성이 깃들어있었다.
셋째 나리는 뒤늦게 정요를 발견했다.
“정요도 왔구나.”
“셋째 숙부님을 뵙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셋째 나리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정요는 앞으로 셋째 나리에게 공부를 배워야 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했다. 그래서 먼저 입을 열었다.
“셋째 숙부께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이렇게 일찍 의관에 오시다니―”
이때 정미가 정요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물었다.
“셋째 숙부님, 그 젊은 부인의 상태는 어떤가요?”
공적인 일을 꺼내자, 셋째 나리는 정요의 인사말을 잊은 채 정미에게 말했다.
“기력은 괜찮더구나. 아침에 대추죽을 끓여주라 했고.”
“지금 부인의 가족도 왔나요?”
“왔단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젊은 부인이 있는 방으로 갔고, 정요는 그 자리에 내버려졌다.
정요는 짧은 시간 안에 두 번이나 창피를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이를 갈며 화를 참고 두 사람을 따라갔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멈춰선 정미는 뒤따라오던 정요를 훑어보며 차갑게 말했다.
“셋째 숙부님, 저는 들어가서 그 부인에게 계속 치료를 할 테니, 관계없는 사람은 모두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세요.”
“걱정 말거라. 그렇게 하마.”
정미가 들어간 후, 셋째 나리는 정요를 쳐다보더니 어딘가로 가서 의서를 한 권 가져와 건넸다.
“정요야, 우선 한 번 보거라. 모르는 게 있으면 숙부에게 묻고.”
정요는 의서를 보자마자 화가 나 죽을 뻔했다.
셋째 숙부가 그녀에게 준 책은 《의학삼자경(醫學三字經)》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나를 얕보는 거야!’
“셋째 숙부님, 이건 이미 읽어봤어요…….”
“읽어봤다고?”
셋째 나리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가, 또 다른 책을 건넸다.
“그럼 이걸 보거라.”
정요가 보니, 그것은 또 아주 기초적인 책인 《약성부(藥性賦)》였다.
“숙부님―”
셋째 나리는 굳게 닫혀있는 방문을 계속 쳐다보며,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는 어투로 말했다.
“읽어본 것이면 복습을 해 보거라. 그나저나 정미는 안에서 어떻게 치료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는 문 앞을 서성거리며 잠시도 방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정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정요는 화가 치밀어 아파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린 약동(藥童)들이나 외우는《약성부》를 안고 조용히 한쪽에 앉아 복습을 시작했다.
* * *
한편 마침내 치료를 끝낸 정미는 조금 창백한 얼굴로 부인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는 그녀의 남편을 불렀다.
“오늘 진료는 끝났으니,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당신은 여기서 아내를 지키고 계세요. 그리고 한 가지를 단단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젊은 사내는 이미 정미를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말씀하세요.”
정미가 입술을 오므리며 문을 흘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나를 제외하고 이 방에 어떤 여인도 들여선 안 됩니다. 여인과 만나 음기가 충돌하면 큰일이 날 거예요.”
젊은 사내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의님, 걱정 마세요. 어떤 여인이든 들어오려고 하면 제가 걷어차 버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오라버니와 옷가게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여기 남아있을 정요가 못된 짓을 하게 둘 순 없지!’
* * *
정미는 방에서 나온 후,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철을 보고는 살짝 웃었다.
“오라버니―”
정철은 오늘 푸른색의 직철(*直綴: 소매가 매우 넓고 허리에는 충분한 여분을 두고 큼직한 주름을 잡은 승복)을 입고 있어, 훤칠하고 출중해 보였다.
정미는 정철을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져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언제 왔어?”
정철이 웃으며 대답했다.
“방금 왔어.”
두 남매는 함께 길을 나섰다. 정미의 경쾌한 발걸음만 봐도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셋째 나리는 그 둘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정미는 철이 앞에서나 그 나이 또래의 소녀 같구나.’
이어 둘째 형님과 형수가 떠오르자 속으로 한숨을 쉰 셋째 나리는, 다시 환자를 보러 돌아갔다.
* * *
정미와 정철은 마차를 타지 않고 거리를 걸었다.
정철이 물었다.
“오늘은 환안이 따라 나오지 않은 거니?”
정철은 아무 생각 없이 물은 것이었지만, 정미는 당시 초경 때 환안이 뱀에 물린 거라 착각하고 오라버니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것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고, 정철을 흘끗 노려보고는 말했다.
“왜 그런 걸 물어?”
정철은 어리둥절했다.
‘내가 뭘 물었다고? 요즘 미미가 이상한 것 같아. 말조심해야겠어.’
두 사람은 어느새 옷가게에 도착했다. 그 가게는 ‘운상의(雲想衣)’라는 꽤 듣기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오라버니, 이 여기 옷이 아주 독특하다고 들었어. 지금 유행하는 옷들보다 더 사람이 환해 보인대. 가게 주인이 누구인가 모르겠네.”
정미는 정철을 잡아당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정철은 발걸음을 멈추고 문 쪽에 놓인 두 사람 모양의 나무 인형을 쳐다봤다.
그 나무 인형은 보통 사람 정도로 컸으며, 비율도 진짜 사람을 본떠 만든 듯했다. 남녀 한 쌍이 좌우로 서 있었고, 입은 옷은 다른 가게들보다 더욱 뛰어나고 우아했다.
“역시 조금 특별하긴 하구나.”
정철이 중얼거렸다.
이때 어떤 머슴이 다가와 그들을 맞이했다. 그의 태도는 친절했으며 언행은 영리했다.
정미는 정철을 데리고 한 바퀴 둘러보며, 저도 모르게 옷을 몇 벌이나 구매했고, 그제야 만족한 듯 가게를 나왔다.
정미의 신난 모습에, 정철이 웃으며 말했다.
“미미, 네가 이런 데 관심이 있는 줄 몰랐는데, 그럼 우리 교천성도 가서 볼까?”
정미는 연지 수분을 피한지 오래라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으니 괜찮아. 운상의 구경이 재밌었던 건, 그곳이 새롭기 때문이었어. 어쩐지 장사가 잘되더라고.”
정철이 찬성했다.
“당연하지. 어떤 장사든 남들과 조금 다르게 하면 눈에 띄기 마련이야.”
정미가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오라버니 말이 맞아. 그 육출화재도 주인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 만약 누군지 알면 꼭 그 주인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할 거야.”
정철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미미, 육출화재의 주인을 찬양하는 거야?”
육출화재의 주인은 자신이었지만, 여동생이 그 사실을 모르는 상황에서 모르는 사내를 섬긴단 사실에 정철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정미가 빙그레 웃었다.
“사실 난 한수 선생을 좋아하는 거야. 그리고 육출화재의 주인은 안목이 좋아 그 한수 선생이 육출화재만을 위해 책을 쓰게 했으니, 존경할 만하지.”
“큼큼, 미미, 넌 아가씨니까 앞으로 그런 책들은 적게 봐야 해.”
정미가 오라버니를 흘끗 쳐다봤다.
“이야기는 사람들 보라고 쓰는 거 아니야? 한수 선생이 나 같은 충실한 독자를 잃었다는 걸 알면 분명 상심할걸.”
정철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한수 선생은 절대 상심하지 않을걸. 미미가 보지 않는다면, 한수 선생이 책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테니까!’
“오라버니, 한수 선생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수염도 하얀 나이가 많은 사람일까, 젊고 가난한 서생일까?”
정철이 정미의 머리를 콩 두드렸다.
“쓸데없는 생각 마. 나이 많은 선생이면 어떻고, 가난한 서생이면 또 어때서? 이야기를 보는 거지, 사람을 보는 것도 아닌데!”
“오라버니는 정말 시시해.”
정미가 입을 삐죽이며 투덜대는데, 갑자기 어느 여인의 우렁찬 고함이 들려왔다.
“누가 어서 저 좀도둑을 잡아주세요!”
정미와 정철이 소리를 듣고 쳐다보자, 열두 살 된 까맣고 마른 소년이 앞을 빠르게 달리는 것과, 그보다 조금 더 뒤에서 중년 부인이 쫓아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부인은 뚱뚱한 편이었고, 숨을 헐떡이며 쫓아가고 있었다. 그 부인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멈춰서서 손가락질했다.
정철이 손가락을 튕기자, 동전 하나가 튕겨 나가며 소년의 뒷무릎을 맞췄고, 소년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지자 쫓아오던 부인도 소리를 질렀고 동전도 가벼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 짐승 같은 놈, 나 같은 사람의 돈도 훔치려 하다니. 오늘 네 부모 대신 너를 호되게 혼내주마!”
건장한 몸의 부인은 그 소년을 덥썩 들고 뺨을 몇 대 때렸다.
“내 돈주머니는 어딨어, 얼른 내놔!”
부인은 소년을 때리면서 돈주머니를 찾았고, 소년은 몸을 꼭 감싸 안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철은 갑자기 쓸데없는 일에 끼어든 것을 후회했다.
그들에게 다가간 정철이 말했다.
“아주머니, 그만 하세요. 이 애가 돈을 얼마나 훔친 겁니까?”
“이 녀석이 제 돈주머니를 통째로 가져갔고, 그 안엔 동전이 백 개도 더 있었다고요!”
동전 백 개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정철이 손을 뻗어 은 조각 하나를 건넸다. 은 조각은 동전 백 개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아주머니, 이걸로 손해를 메꾸는 셈 치고 이 아이를 그냥 보내주세요.”
부인은 은 조각을 건네받고 이로 깨물어보고는 그 소년에게 침을 뱉었다.
“짐승 같은 놈, 좋은 사람을 만나서 다행인 줄 알아!”
부인이 가버리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술렁였다.
정철이 선행을 베풀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얼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철은 그저 부인이 잃어버린 돈을 찾는 것도 모자라 이 소년을 죽일 듯이 때리는 것을 보고, 만약 정말 자신의 눈앞에서 인명사고가 난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 나섰던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고, 정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미미, 가자.”
정미는 그 사나운 부인에게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이 도둑 소년에게도 관심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 남매는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났고, 소년은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자 믿기지 않는 듯 기어서 일어나 재빨리 달아났다. 그러다 갑자기 또 어떤 것에 뒷다리를 맞아서 비틀거리며 바닥에 넘어졌다.
정미와 정철이 그 소리를 듣고 몸을 돌려 쳐다봤다. 소년은 앞으로 고꾸라져있었고, 뒷다리에는 반쯤 먹은 탕후루가 붙어있었다.
이번에 소년은 탕후루 때문에 넘어진 것이었다.
정철은 갑자기 소년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도둑질을 했다고 이렇게 재수 없어지다니, 앞으로 아주 힘들어지겠구나.’
이때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도둑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고도 이렇게 그냥 도망치려고 한 거야?”
정미는 그쪽을 쳐다봤고 갑자기 골치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서가복!?’
서가복은 유모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았고, 3월의 따뜻한 햇살 아래 아름다운 얼굴은 더욱 고와 보였다.
그녀는 정미와 마주 보고는 눈을 반짝이더니, 얼굴에 웃음꽃이 펴서는 그 도둑을 데리고 다가왔다.
“미 동생, 이런 우연이 있나?”
정미가 되물었다.
“가복 언니, 얼굴은 다 나았어?”
서가복은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이 못된 계집, 정가의 둘째 공자처럼 잘생긴 사내 앞에서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작은 상처였잖아. 예전에 다 나았어.”
서가복이 손사래를 치더니, 도둑을 앞에 데려가서 정철에게 말을 붙였다.
“정가의 둘째 오라버니, 너무 마음이 넓으시네요.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물건을 훔치는 건 옳지 않은 짓인데, 어찌 이리 쉽게 보내주시는지요? 이 아이 대신 은을 주는 건, 앞으로 계속 나쁜 짓을 하게 내버려두는 것 아닌가요?”
정철이 담담하게 웃었다.
“서가 아가씨의 말씀이 옳습니다.”
정철이 순순히 져주었지만, 서가복은 어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이 사내, 정말 고집이 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