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몰래 상조하다
다음 날, 정미는 일찍 일어나 단정히 차려입은 후 한 씨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갔다.
한 씨는 정미의 기력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아마도 앞으로 정요와 함께 제생당에 가야 해서 고민스러운 것이라 짐작했다. 그래서 어제 둘째 나리와 상의한 일을 정미에게 들려주었다.
정미는 깜짝 놀라 물었다.
“어머니가 정요에게 혼사를 찾아주셨다고요?”
한 씨가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뿌듯함을 숨기지 못했다.
“네 아버지가 결정을 내리셔야 되는 일이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네 아버지도 괜찮게 생각하시는 것 같더구나. 몸이 나아지면 사내 집안의 상황을 알아보실 테고, 그럼 이 혼사가 바로 결정될지도 모르지. 그러니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렴. 그 못된 계집이 날뛸 수 있는 것도 며칠 되지 않을 테니. 혼사가 정해지면 집에서 얌전히 혼수를 수놓으라 하고, 그때가 되면 노부인께서도 뭐라 하지 않으실 거다.”
정미는 한 씨의 이런 고효율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 정요를 시집 보내는 것만큼 좋은 게 또 있겠는가? 정요가 시집가게 되면, 태자의 양제가 될 수 없을 터였다.
정미는 어머니에게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기로 결정했다.
“아버지를 뵈러 가볼게요.”
한 씨는 딸이 나리를 보러 간다는 말에 속으로 기뻐했다. 부녀지간에 사이가 너무 나빠도 누구에게 좋을 게 없었으니 말이다.
“가보거라. 네 아버지의 몸이 편치 않으니, 만약 말을 모질게 하시더라도 한번 참아드리고.”
“알겠어요.”
정미는 이 일로 한 씨와 다투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둘째 나리가 쉬고 있는 거처로 향했다.
* * *
“네가 어찌 왔느냐?”
둘째 나리는 기척을 듣고 눈을 떴고, 보이는 것이 정미임을 알아보고는 표정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하지만 마음은 다소 편안해졌다.
‘이 못된 계집이 나를 보러 오다니. 아직 구제 불능인 건 아니구나!’
정미도 모처럼 아버지와 맞서지 않았다. 그녀는 치마를 들고 문턱을 넘어 가볍게 걸어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아버지, 조금 괜찮아지셨는지 뵈러 왔습니다.”
둘째 나리는 당황했다.
‘셋째 딸이 갈수록 요절한 처제와 닮아가는구나.’
정미는 아버지가 평소처럼 차갑게 대하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면서도 그의 곁으로 가 옆에 앉았다.
“아버지, 좀 어떠세요?”
둘째 나리는 정신이 들었고, 셋째 딸의 부드러운 말투에 적응이 되지 않아 정색하며 말했다.
“네가 나를 찾아올 줄도 아는구나!”
정미가 눈을 내리깔았다.
“원래는 어제 찾아뵈려고 했는데, 그 젊은 부인을 살리느라 힘을 다 써서 집에 돌아와 침상에 눕자마자 잠들어버렸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둘째 나리는 또 당황했다.
‘고작 하루 안 봤다고 딸이 다른 집안의 딸이 된 것 같군. 얌전해진 것이 무서울 지경이로구나!’
정미 역시 억지로 얌전한 척 꾸며내는 것이었기에, 몰래 허벅지를 꼬집고 나서야 계속 가식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아버지, 어제는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아버지께 폐를 끼쳤으니, 아버지께서 화내시는 것도 당연해요. 아버지께 말대꾸해선 안 됐어요. 저를 용서하세요.”
정미는 용모가 아름다웠고, 평소엔 차갑고 고집이 강했기에, 이렇게 한 번 무른 모습을 보이면 평소 얌전한 아이들보다 효과가 몇 배는 더 좋았다. 이에 둘째 나리는 마음이 흔들려 가볍게 기침하고는 말했다.
“잘못을 알았으면 됐다.”
사실 부녀 사이에 그리 큰 원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둘째 나리가 정미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이유는 그저 한 씨가 미우니 정미도 미웠던 것이 컸다. 하필 정미도 정요처럼 단정하고 철든 아이가 아니었고, 정동처럼 여리고 애교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아버지를 만나면 불쾌한 표정을 지었기에 둘째 나리도 정미를 볼 때 기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미의 사과에 둘째 나리는 어제 정동이 와서 그를 안고 울면서 달라붙었던 것보다 위로가 되었지만, 스스로 인정하기가 싫어 손을 뻗어 찻잔을 들며 감정을 숨기려고 했다. 그러나 찻잔은 비어있었다.
이를 본 정미가 급히 말했다.
“제가 따라 드릴게요.”
정미가 몸을 일으켜 따뜻한 물을 따라주고는 둘째 나리를 부축했다.
“아버지,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일어나실 때 허리를 조심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둘째 나리의 허리에 손을 가볍게 걸치고, 살짝 쳤다.
그 순간, 손가락 끝에 맺힌 보통 사람은 알아채기 힘들 정도의 빛이 둘째 나리의 허리로 들어가 사라졌다.
정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미소 지었다.
‘흑마의 상처를 치료해준 부적을 사람에게 써도 되는구나. 그저 부작용이 조금 있을 뿐이지. 하지만 아버지가 얼른 일어나서 정요의 혼사를 처리할 수 있다면 한 번 양심을 속일 수밖에.’
정미는 얼마 전 아혜에게 이 부적의 부작용에 대해 물었던 것을 떠올렸다. 문제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저 정상적으로 요양해야 했을 기간에 흥분하거나 화를 내면, 쉽게 방귀가 나오거나 오줌을 지릴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게 침상에 누워서 요추가 아파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겠는가.
정미는 그래도 자신은 효성스러운 편이라 생각하며 둘째 나리에게 더욱 진심을 담아 웃어 보였다.
‘역시 얼굴이 예쁘면 이득을 보는구나. 예전에 뚱뚱하고 까만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했을 때에는 꽃처럼 웃는다고 해도 자만하고 풍아한 아버지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은 둘도 없이 아리따운 딸이 사랑스럽게 웃어 보이니, 둘째 나리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 말투마저도 조금 따뜻해졌다.
“잘못을 알았으니, 이번에만 용서해주마!”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물 좀 드세요.”
정미도 사실 오늘 아버지의 누그러진 태도에 적응이 되지 않았기에, 그가 물을 다 마신 뒤 부축해서 눕혀드리고는 급히 말했다.
“아버지, 그럼 저는 조모님께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가볼게요. 이따 둘째 언니와 함께 제생당에도 가야 하고요.”
둘째 나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정요는 왜 제생당에 가는 것이냐?”
정미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모르시는군요. 어제 둘째 언니도 셋째 숙부님께 의술을 배우고 싶다고 조모님께 말씀드렸어요. 조모님은 매일 언니가 제생당에 가는 걸 허락하셨고요.”
“까부는구나!”
둘째 나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머니인 맹 노부인이 허락한 일이니, 아들로서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정요의 혼사를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미처럼 아직 급계를 하지 않은 어린 아가씨도 아닌데, 열여섯 된 아가씨가 이렇게 아무 데나 얼굴을 내밀게 둬선 안 됐다. 어렵사리 얻은 명성이 망가진다면 무척 아까워질 테니 말이다.
정미가 떠난 후, 둘째 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뒤척였고, 갑자기 통증이 느껴지지 않자 믿기지 않는 듯 허리를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뒤척여보더니,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자리에서 내려와 한 바퀴 돌고 나서야, 둘째 나리는 허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것을 확신했다.
‘설마 어제 요추를 다친 게 아니라, 그저 살짝 삐끗해서 하루 누워있으니 나은 건가?’
둘째 나리는 믿기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이유밖에 없어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관아에 사람을 보내 휴가를 신청했으니, 당연히 일하러 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서재로 가서 책 한 권을 꺼내 읽다가, 반쯤 읽었을 때 흥미를 잃어 내려놓은 후, 정미의 예상대로 옷을 차려입고는 한 씨가 말한 정요의 사윗감을 알아보러 갔다.
* * *
같은 시각, 정미는 정요와 함께 마차를 타고 제생당으로 가고 있었다.
정요는 가는 길에 여러 차례 이야깃거리를 찾아 정미에게 말을 붙였지만, 정미의 냉담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정요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미, 보아하니 정말로 나와 관계를 끊기로 결심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이 말만은 하고 싶어. 언제가 됐든, 네가 원한다면 나는 여전히 네 언니일 거야. 너를 신경 쓰고, 너를 돌봐주는―”
정요의 말을 듣던 정미는 차갑게 세 글자를 내뱉었다.
“잔소리!”
그러고는 유모를 쓰고 문발을 걷더니 마차에서 내렸다.
‘정말 모르겠어. 분명 우리 둘은 예전에 말다툼을 하고 사이가 틀어졌는데, 정요는 왜 나를 볼 때마다 애틋한 자매처럼 굴어서 구역질을 나게 하는 거지?’
그때, 정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요의 눈에는 강렬한 증오가 스쳤다.
‘역시 정미구나. 한 번 내친 사람은 진흙처럼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데, 도대체 뭘 믿고 이렇게 떳떳하게 남을 미워하는 거람?’
“둘째 아가씨―”
정요가 한참을 내려오지 않자, 마부가 불렀다.
정미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사이, 마부는 노양백에서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건장한 사내로 바뀌어 있었다.
이 사내는 노양백의 아들이었고, 며칠 전 정철이 그를 찾아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이유를 말하진 않았지만, 정철의 말투 속에서 아버지가 뭔가 잘못을 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정철이 화를 내지 않고 그저 아들을 찾아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게 한 것은 아주 감사한 일이었다.
가차 없는 집안이었다면 하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욕을 하고 때리거나 팔아 내쫓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사내는 마부의 일을 더욱 성실히 하게 되었다.
정요가 차갑게 마부를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마차 벽에 걸려있는 유모를 쓰고, 마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정미를 쫓아갔다.
“셋째 아가씨, 오셨군요.”
“셋째 아가씨께 인사 올립니다.”
제생당이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머슴들은 한창 바쁜 상태였다. 하지만 모두가 정미를 보면, 곧바로 하던 일을 멈추고 정미에게 인사를 올렸다.
정요는 뒤에서 따라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 태도의 변화가 어제부터 시작된 것임은 눈치채지 못했다.
예전에 정미는 높으신 백부의 아가씨였고, 얼굴을 숨긴 채 의관에 왔었다. 의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몹시 궁금해했지만, 기껏해야 뒤에서만 얘기하고 최대한 정미를 멀리 피하며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의관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에게 있어 신의보다 더욱 존중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사람이 비록 그저 어린 아가씨일지라도 말이다.
정요는 질투가 났지만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때, 어떤 머슴이 웃으며 정미와 인사하고는 정요를 훑어보며 이렇게 물었다.
“셋째 아가씨, 오늘은 환안을 데리고 오지 않으시고, 다른 아이를 데려오셨네요?”
정미가 피식 웃으며 뒤에 반보 정도 떨어져 있는 정요를 흘끗 쳐다보고는 웃었다.
“그래, 내 둘째 언니야.”
환안은 달거리가 온 탓에, 아침부터 정미의 방에 쳐들어와서는 주인님과 사별해야 한다고 엉엉 울었다. 정미는 자신이 초경 때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난처한 마음을 참고 환안에게 잘 설명해주었고, 집에서 푹 쉬게 두었다.
머슴은 얼굴이 새파래져 연신 읍을 했다.
“둘째 아가씨,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달아났고, 달아나면서 생각했다.
‘내가 평범하게 생긴 덕분에 귀한 아가씨께서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구나. 앞으로 나를 잘생기게 낳아주지 않은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아야지!’
머슴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고, 정요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소매 속의 손을 떨고 있었다.
‘머슴이 나를 여종으로 보다니. 여종으로 보다니! 게다가 하필이면 정미의 여종으로 보다니!’
유모 아래의 얇은 천 덕분에, 정요는 더는 숨기지 않고 정미를 노려볼 수 있었고, 정미의 유모를 벗기고 그 어여쁜 얼굴에 따귀를 내리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하지만 정요는 그저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정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정미와 나란히 섰다.
“정미, 가자.”
이에 정미가 비웃는 듯 아닌 듯한 말투로 말했다.
“가자, 이번엔 뒤에 떨어져 있지 말고.”
“걱정 마. 다신 뒤에 떨어져 있지 않을게.”
정요는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답했다.
정미는 그녀와 실랑이하기 귀찮아, 소매를 내치며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