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정요의 혼사
정미는 정요를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매일 의관에 가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녀는 염송당에서 나오자마자 한 씨를 찾으러 갔다.
“뭐라고, 앞으로 매일 너와 함께 의학을 배운다고?”
한 씨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이제야 그 여우 같은 계집이 태자와 놀아난 것을 알게 되어, 앞으로 절대 외출을 하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순식간에 어머님의 지지를 얻어 매일 외출을 할 수 있게 되다니! 정말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한 씨가 벌떡 일어났다.
“안 된다, 가서 네 조모님께 말씀드려야겠어!”
정미가 한 씨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어머니, 조모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어요. 저는 의관에 가는데, 정요가 어찌 가지 못하겠냐고 하시더라고요.”
한 씨가 발걸음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정미에게 말했다.
“일단 비서거로 돌아가거라. 이 일은 방법이 있으니.”
‘어머니에게 언제부터 방법이 있으셨다고?’
정미의 마음속에 근심이 스쳤지만, 얌전히 비서거로 돌아갔다.
‘됐어, 앞으로 내가 정요를 확실히 지켜보면서 허튼짓을 못 하게 하면 될 거야.’
* * *
“둘째 오라버니?”
정미가 비서거에 도착했을 때, 뜻밖에도 정철이 비서거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기뻐하며 다가갔다.
“얼마나 기다린 거야?”
“방금 왔어.”
정미는 오라버니의 안색을 살폈고, 그의 눈에 핏발이 선 것을 보고는 꾸짖었다.
“오라버니, 어젯밤에 밤새워 공부한 거지? 딱 봐도 잠을 제대로 자지 않은 얼굴이잖아.”
정철은 소매에서 물건을 꺼내 건네며 순조롭게 화제를 돌렸다.
“미미, 열어봐.”
정미는 붉은 융단의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치마를 입은 3촌(寸) 정도 크기의 소녀가 금색 단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소녀는 독특하게도 황금색의 긴 머리에 푸른 두 눈을 가지고 있어, 정미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오라버니?”
정철이 웃으며 손을 뻗어 소녀가 서 있는 단상의 어느 곳을 몇 바퀴 비틀었다. 그러자 은은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며, 금발 머리의 소녀가 음악에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정미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고,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었지만, 꾹 참고는 정철을 쳐다봤다.
“오라버니, 얘, 얘가 어떻게 춤을 추는 거야?”
말하는 사이에 음악은 점점 잦아들었고, 춤추는 소녀도 동작을 멈췄다.
정철은 여동생의 멍한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해외에서 들어온 물건이야. 오늘 나갔다가 운 좋게 신기한 물건을 파는 가게가 열려있는 걸 봤거든. 이걸 보자마자 미미가 좋아할 것 같아서 상사절 선물로 사 왔지.”
정미는 그제야 일 년에 한 번 있는 상사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떠올렸다.
그녀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단상 위 소녀를 보며 말했다.
“상사절에 선물을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지만 정철은 늘 일 년 내내 각종 핑계를 찾아 자신에게 선물을 건네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미는 달달한 웃음만 짓게 되었다.
“오라버니, 어떻게 움직이게 한 거야?”
정철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단상 쪽의 장치를 가리켰다.
“살짝 비틀었다가 손을 놔 봐. 그럼 움직여.”
정미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를 시도해보았다. 살짝 비틀고 놓으니, 정말 다시금 음악이 나오며 소녀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정말 고마워. 마음에 들어.”
정미가 정철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상사절이 되면, 우리 같이 답청을 나가자.”
정철이 정미의 눈빛을 피했다.
“나는 그날 아마도 다른 일이 있을 거야.”
상사절은 예로부터 남녀가 서로 만나 마음을 고백하는 날이었다.
‘나와 미미가 함께 가면 쓸데없는 일을 키우게 될 거야.’
그러나 정미는 정철의 뜻을 오해했다.
‘오라버니는 만약 멀리 유학을 간 것이 아니라면, 상사절마다 늘 집에서 공부를 하거나 무술을 연마했고, 다른 일이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잖아.
그래, 오라버니가 그랬었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으니, 설마, 상사절에 그 사람이랑 약속을 잡으려는 건가?’
정미는 갑자기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오라버니가 나와 답청을 가지 않고, 다른 아가씨와 약속을 잡으려 하다니.’
하지만 정미는 이 생각이 아주 이기적이라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고,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는 마음을 가다듬고 정철에게 웃어 보였다.
“그럼 내일 내가 제생당에서 나올 때, 오라버니랑 같이 산뜻한 옷을 사러 가줄게. 평소 고작 몇 벌로 돌려 입잖아. 꾸밀 줄도 모르고.”
얼마 전 교천성 옆에 옷가게가 열었다는 것을 들은 바였다. 옷감도 좋고, 옷의 도안도 좋아 적지 않은 부잣집 사람들이 옷을 재봉하거나 맞추러 간다고 했다.
“어, 그러자.”
정철은 왜 자신이 산뜻한 옷을 사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꽃처럼 웃는 여동생의 얼굴을 보니 거절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는 왠지 모르게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오라버니는 평소 소박하게 입고 다녔고, 내가 조금 산뜻한 옷을 사줘도 거의 입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겠다고 새 옷을 사려고 하는 거잖아. 역시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 남녀 모두 마찬가지구나.’
정미의 기분이 들쑥날쑥 하자, 총명한 정철조차 어리둥절해졌다.
“미미, 그냥 사지 말자. 오전엔 의관에 가고, 오후엔 장공주부에 가야 하는데, 종일 피곤할 거야.”
정미가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떻게 안 살 수 있어. 설마 내가 따라가는 게 싫은 거야?”
“그럴 리가.”
정철이 급히 둘러댔다.
“그럼 내일 내가 의관으로 데리러 갈게.”
정미의 입꼬리가 그제야 휘었다.
“좋아.”
그러다가는 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정철이 당황하며 일어났다.
“미미, 푹 쉬어. 오라버니는 먼저 가볼게.”
‘오늘 미미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남아있기보다 일단 가는 게 낫겠어.’
정미도 정철을 더 남겨둘 이유가 없었기에, 입구까지 배웅하며 당부했다.
“내일 잊지 말고 나를 찾으러 와야 해.”
“응. 잊지 않을게.”
정철의 뒷모습을 보던 정미는, 오늘따라 오라버니의 발걸음이 유난히 빠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미는 가까스로 씻은 후 저녁 식사도 거른 채 침상에 쓰러져 잠에 빠졌다.
* * *
한편 이연원에서 한 씨는 둘째 나리와 상의하고 있었다.
“정요도 올해 벌써 열여섯이 되었는데, 혼사를 서둘러야겠습니다. 나리께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둘째 나리는 종일 허리가 아프고 화가 났기에, 한 씨와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가서 정미 그 못된 계집을 불러오시오. 도대체 아버지인 나를 신경 쓰고는 있기는 한 건가? 이번에 그 계집을 처벌하지 않으면 더욱 무법천지처럼 굴 것 아니오!”
“나리, 정미는 이미 잠에 들었습니다. 낮에 사람을 살리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내일 또 치료하러 가야 하는걸요.”
“정말 사람을 살렸다고?”
둘째 나리는 지금까지도 믿지 못하고 있었기에, 한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사실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의관의 그 소란이 어찌 이리 빨리 가라앉을 수 있었겠어요.”
둘째 나리는 반신반의했고, 여전히 정미에 대해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허리를 다친 탓에 처벌하려 해도 시원치 않아, 일단 화를 참고 차갑게 말했다.
“정요의 혼사는 나도 일찍이 생각해두었소, 4월 초 행방에 이름이 올려진 젊고 가난한 집안의 미혼 사내를 정요에게 붙여주면 되지 않겠소.”
한 씨는 4월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게다가, 가난한 집안의 사내는 아주 인기가 많았다. 그런 사람은 강인하고 고생을 잘 참을 줄 알기에,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처가를 등에 업고 순탄하게 관리사회에 어울릴 수 있었다. 10년~20년 동안 버텨, 딸에게 고명부인이라는 자리를 안겨줄 수 있다면 아주 값진 혼사였다.
그런데 그 서녀를 당장 때려죽이지 못해 한스러운 한 씨가, 어찌 앞날이 창창한 사내를 붙여줄 수 있겠는가!
“나리, 사실 최근에 계속 정요를 대신해 이미 적당한 사내를 몇 명 찾아놓았습니다.”
한 씨는 정아와 대화를 나눈 이후, 재빨리 수도의 적령기 자제를 한 번 훑어본 바였다. 정요의 조건이라면 훈귀 집안의 서자들은 분명 기꺼이 혼인하려고 할 터였다.
한 씨는 회인백부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몇몇 집안의 자제들을 언급했고, 그러자 둘째 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되오. 적모로서 정요를 가벼이 생각해선 안 되지. 내가 평소 딸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다고 하더라도, 정요가 경성 제일 재녀라는 명성이 있다는 것은 모르지 않소. 늘 단정하고 우아한 아이인데, 그런 평범한 서자에게 보내기엔 아깝지 않겠소?”
딸을 보낼 땐 높은 집안으로 보내고, 며느리를 들일 땐 낮은 집안에서 들이는 법이었다.
‘정요는 우수한 아이인데, 왜 더 좋은 집안에 보내지 않으려는 거지? 그럼 나중에 다른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없을 텐데.’
한 씨는 몰래 이를 갈았다.
‘퉤, 뭐가 단정하고 우아하다는 거야. 나리께서 눈이 멀었나 보다!’
안타깝지만 자녀들의 혼사에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아버지였기에, 한 씨는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나리, 공사(貢士)에 합격한 가난한 집안의 학생은 너무 경쟁률이 셉니다. 행방이 붙으면 정요에게 기회가 올는지도 알 수 없지요. 정말 그런 계획이 있으시다면, 지금 얼른 손보셔야 할 겁니다.”
둘째 나리가 진지하게 듣고 있자 한 씨가 말했다.
“춘시에 참가한 학생을 하나 알아봤는데, 아버지가 작은 현의 관리인 듯하더군요. 이번 시험도 십중팔구 합격할 겁니다. 나리, 생각해보세요. 그 학생이 만약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거인이고, 아버지는 관리입니다. 이것도 좋은 혼사인 듯한데요.”
둘째 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 씨가 이어서 말했다.
“나리, 정말로 행방을 기다리신다면, 이 좋은 혼사도 정요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둘째 나리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들어보니 조건이 나쁘지 않은 것 같군. 그 학생의 이름은 뭔가?”
“최자겸이라 합니다.”
둘째 나리가 한 씨를 쳐다보며 물었다.
“부인은 어찌 이리 자세히 알아본 거요?”
한 씨가 웃으며 말했다.
“저번에 나리께서 정요를 가난한 집안의 학생에게 보내신다기에, 그 아이가 시집가서 고생하는 걸 볼 수 없어 훈귀 집안의 아들들을 알아봤습니다. 하지만 이번 춘시에 참가한 학생들도 슬며시 주의를 기울였지요.”
슬며시 주의를 기울였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한 씨는 그저 정요가 태자에게 마음이 있는 걸 안 뒤로 절대 이 화근을 남겨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둘째 나리가 정요를 훈귀 집안의 서자에게 보내는 걸 동의하지 않을까 봐 일찍이 정철을 불러 물어봤던 것이다.
한 씨는 한 가지만 물었다. 이번 춘시에 어떤 미혼의 학생이 확실히 불합격할 것 같으냐는 질문이었고, 정철의 대답은 ‘최자겸’이었다.
둘째 나리는 한 씨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좀 알아보겠소. 그러고 난 뒤 다시 얘기하지.”